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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대가(4) (235/283)

34. 대가(4)

이원의 앞에 서른몇 번째의 팬이 다가왔다. 이원이 웃으며 인사하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볼을 새빨갛게 붉혔다.

“주, 주이원 헌터님,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찾아 주셨으니 제가 더 영광이죠. 여기 오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음, 학생이에요?”

“아뇨. 회사 다니는데요…….”

“아하, 죄송해요. 너무 어려 보이셔서 대학생인줄 알았네요.”

옆에서, 혹은 무릎에 앉아 보면서 지호는 이원이 직업을 잘못 잡은 게 아닐까 고민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터라 머릿속으로 망상이 이어졌다.

이 녀석은 연기를 잘하니까 배우를 해도 어울릴 것이다. 종종 상상했던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인성이 바른 데다 치밀한 녀석이니, 본래의 성질머리를 들키진 않겠지.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온갖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한 이원은 로맨스에도 나오게 되고… 그리고 상대 배우와 이런저런 것까지…….

팬이 인사한 후 물러나고, 지호는 잠깐의 틈새에 이원의 머리칼을 잡고 쥐어뜯듯 잡아당겼다. 지호는 의아한 얼굴의 이원에게 속삭였다.

“기분 나빠.”

“갑자기?”

매일 바람피우지 말라고 했으면서, 본인은 대중에게 팬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꼬시듯 말하다니.

너나 바람피우지 마. 지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천천히 이원의 머리칼을 놓고 나서야 너무 사이 나쁜 모습을 보인 게 아닐까 싶지만…….

……어째서인지 몰려 있는 이원의 팬들은 대체로 좋아했다. 이유를 모르겠다.

주이원이 사람 홀릴 듯이 굴어서 못마땅하긴 해도, 이원의 사인회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줄을 선 인원이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을 때까지.

특별히 신경을 쓴 듯, 예쁘게 꾸민 팬이 이원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웃으며 이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이원 헌터.”

“네, 안녕하세요.”

팬이 사인지를 내밀었다. 이원이 그걸 태연하게 받아들던 순간, 여자의 손이 사라지듯 빠르게 움직였다. 지호가 여자의 움직임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이원의 손에 여자의 손목이 붙들려 있었다.

암살자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지호의 앞에서 멈춘 손에는 얇은 침이 들려 있었다. 시스템창은 볼 수 없었지만, 분명 등급이 꽤 높은 무기이거나 독 따위가 발려 있을 터.

“나만 노리면 곱게 봐주려고 했더니 지호를 노리네.”

이원이 싸늘하게 속삭였다. 암살자와 맞닿은 이원의 손에서 마력이 피어오른다. 여자의 팔이 마치 썩는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암살자는 발버둥을 쳤지만 순식간에 팔 전체가 시커멓게 변했다. 암살자는 몸을 경련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리 없이, 어디선가 루가 나타났다. 루는 이원에게 고개만 까딱여 인사하고는 암살자를 데리고 물러났다.

지호는 그제야 갑작스러운 소동에도 주변이 잠잠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잠하다. 스킬로 모습을 가린 거겠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지호의 심장이 빠르게 콩닥콩닥 뛰었다. 평소라면 살짝 놀라고 금세 진정했을 텐데, 어려져서 그런지 한 번 놀란 몸이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이런, 놀랐어?”

이원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지호를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안정시키기 위함인지,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환호를 질렀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정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지호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차에 오르자마자 지호는 이원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뭐야, 그거.”

“나를 노리는 놈이지. 몰래 노려도 안 되니까 아예 다들 볼 때 찾아오더라. 그게 대응이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알다시피 안 위험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호가 어려졌으니 노리는 놈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너 지금 날 미끼로 쓴 거야?”

“으응? 아니지. 미끼는 먹으라고 던지는 거잖아. 나는 지호를 완벽하게 지킬 거니까 미끼는 아니지.”

“그게 그거지.”

과보호할 때보다는 낫지만…….

“미리 설명이라도 해 주던가.”

“꼭 찾아오리란 법은 없으니까, 괜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지호가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나도 몰랐어.”

얄미운 말이지만, 순수하게 걱정하는 어조라 지호는 핀잔하려다 그만두었다. 확실히 멀쩡할 때의 지호라면 조금 놀랄지언정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평상심을 되찾았겠지.

“그래서, 조금 전 그 사람은?”

“루가 조사하고 있는데… 딱히 특이한 건 없어 보이네. SSS급 승급을 막고 싶어서 보낸 평범한 암살자 같아.”

“암살자가 평범하지 않은 건 또 뭐야?”

“게네시스나 녹스가 보낸 암살자쯤 되어야 평범하단 수식어를 떼 줄 만하지.”

가벼운 말투지만, 최근 이원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생각보다 가까이 접근한 놈들인데 우리 쪽에서는 제대로 파악한 게 없잖아.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끄나풀을 잡는 게 좋은데…….”

생각대로 잘 안 되네. 이원이 아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멍청한 고양이가 조금 더 유능하면 좋을 텐데.”

“서리 욕하지 마.”

“하지만 적이 이렇게까지 잘 숨는 건 시스템 탓일걸. 그게 아니었으면 나도 진작 잡았을 거야.”

“못해 놓고 괜히 서리 탓하지 말라고.”

“지호 너무해.”

평소에도 서리를 구박하는 이원인지라 쏘아붙이긴 했지만……. 확실히, 서리가 조금 더 힘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시스템은 현실에 개입이 가능한 힘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힘이기에, 별다른 증거가 남지 않는다.

최근 게네시스의 행보는 무척이나 부지런하다. 앞으로의 거사를 준비하듯이. 녹스 또한 암약하고 있을 게 뻔한데, 그쪽은 아예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럼 이제 오늘 걱정 끝.”

깊은 생각에 잠기려던 지호를 이원이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뭐, 숨, 숨 막혀.”

“휴가인데 지호가 괜한 고민 못 하도록 몸으로 처방하는 거야.”

“네가 데려와 놓고 뭔 소리야!?”

지호가 버럭 소리쳤다. 하여간 어이없는 녀석이었다. 물론 이원의 말대로 지금 고민해 봤자 풀릴 건 없지만. 게다가 곧 신경 쓰이는 일도 있고…….

지호는 현재의 고민을 접어두었다. 잠시만이라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 * *

그는 원래 C급 헌터였다.

처음 각성했을 때, 그는 취업이 막막하던 자신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기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들뜬 나머지 잘 알아보지도 않고 계약을 잘못 맺었다. 그는 소위 블랙이라고 불릴 만한 길드에서 2년 내내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그는 자신의 등급이 애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각성자보다는 벌이가 괜찮지만, 화려한 별이 수없이 많은 업계였다. 괜히 고등급의 각성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움츠러들게 되었다.

그러나 시스템과 수호신이 생겨난 이후,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별거 아니었던 그에게 수호신이 찾아왔다. 자신을 ‘흰 발의 전령’이라고 소개한 수호신 덕분에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배경으로 한 하늘 길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으니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헉, 허억…….”

‘흰 발의 전령’과의 계약으로 그는 누구보다 빠른 발을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쳐도 ‘그것’과의 거리는 도저히 멀어지지 않았다.

‘흰 발의 전령’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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