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대가(3)
이딴 짓을 시키다니, 주이원은 분명 미친 게 틀림없었다. 사방에서 밝게 비추는 뜨거운 빛을 받으며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더 웃어 주세요!”
그런 지호에게 사정없이 요구 사항이 들어온다. 무시할 수도 없어서 지호는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렸다. 그걸로는 부족한지 촬영 감독은 추가로 주문했다.
“지호 씨, 너무 딱딱하게 웃지 마시고… 앞에 이원 씨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하.”
농담으로 건넨 말이겠지만, 순간 지호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지금 주이원이 앞에 있으면? 그냥 확 머리를 쥐어뜯어 버릴 건데. 안타깝게도 이원은 지호와 따로 촬영 중이었다.
괜한 불화설이 날까 봐 얼굴을 구긴 채로 있을 수는 없는 일. 지호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자, 서리를 생각하자. 동글동글 귀여운 뒤통수나 세모꼴의 귀. 반짝이는 눈동자와 시옷 자 모양의 입, 보드라운 털 따위를…….
귀여운 걸 생각했더니 다행히 주이원을 생각할 때와 달리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감독도 만족한 모양이다. “좋습니다, 좋아요!” 하는 말과 함께 카메라가 지호를 찍는다.
지호는 겉으로만 웃으면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현재 지호는 최근 청람이 런칭한 의류 브랜드의 광고 촬영장이었다. 평범한 의류 브랜드는 아니고, 일반인을 위해 간단한 방어 스킬 따위를 걸어 만든 브랜드다.
기왕 일반인 대상 아이템을 광고하는 거 각성자가 모델이 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라? 신지호가 어린애가 됐네. 그러니까 데려다 쓰자!’하는 흐름이 된 것이다. 그걸 주이원이 주워 듣고는 홀랑 섭외했고.
누군가는 광고를 찍고 싶어서 안달한다는데. 지호에게는 이 상황이 그저 지옥이었다. 안 그래도 광고 촬영에는 이전부터 안 좋은 기억밖에 없었다.
‘조금 더 맛있게 먹어 주세요.’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어 주세요!’
전에 칼국수의 신인지 뭔지, 청람 식품에서 나온 칼국수 광고를 찍을 때도 엄청나게 힘들었다. 이제 최대한 안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아동복이라니, 이건 아예 자신의 흑역사를 박제해 전국에 뿌린다는 거 아닌가. 아니, 지호의 인지도를 보면 세계에 뿌려질 수도 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이면 형까지 합세해서 부탁하는 바람에… 지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촬영에 임했다.
다행히 촬영은 금세 끝났다. 원래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광고이니만큼 많은 걸 요구하진 않았고, 속이 어른인 지호는 무리 없이 소화해 낼 수 있었으니까.
‘지쳤다.’
가족에게 둘러싸여 가족사진을 찍던 건 지금에 비하면 행복이었다.
터덜터덜 의자로 다가가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지호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었다. 그리고 얌전히 지금의 지호에게는 조금 높은 의자에 앉혀 주었다.
“길드장님,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상대는 평소에는 입을 일 없던 정장 바지와 셔츠를 차려입은 허소리였다. 분위기를 내기 위함인지 알 없는 안경까지 썼다.
그녀는 오늘 신지호의 일일 매니저를 자처해 지호를 따라왔다. 아무 힘도 없는 지호에게 추가 경호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원도 동의했고, 그렇게 허소리가 따라왔다. 솔직히 말해서 재밌으니까 끼어든 것 같지만.
“힘들면 말하세요. 도와드리려고 따라왔으니까요.”
장난으로 따라왔어도 허소리는 착실하게 일했다. 목이 마른 지호를 위해 물을 가져다준 허소리는 조명 때문에 땀이 맺힌 이마를 손수건으로 톡톡 찍어 닦아 냈다.
“굳이… 이런 것까진 안 해도 괜찮아요.”
“에이, 기왕 온 거 열심히 해야죠. 게다가 원래 어린이는 따스하게 보살펴 줘야 한다고요.”
“……어린이 아닌데요.”
“지금은 어린이잖아요?”
웃는 허소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지호는 한숨을 삼키고 허소리가 가져다준 물을 홀짝였다.
그러는 사이, 소리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왜요?”
“아니, 길드 채팅 좀 확인했는데요. 지금 호진 씨가 강태주 머리를 쥐어뜯고 있대요.”
“아주 잘 하고 있네요.”
“그렇죠.”
둘이 흐뭇하게 웃었다. 과거에 강태주와 싸웠다고 해도 지금은 같은 길드원. 큰 앙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골탕 먹는 꼴을 보는 건 즐겁다.
하지만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 큰일이네요. 양호진 헌터는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몸만 어려진 지호와 달리, 양호진은 여전히 몸도 정신도 어린 채였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변화의 기미는 없었다.
강태주의 말에 따르면 며칠째 그런 꼴이었다고 하니…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소리가 고민하는 지호의 뺨을 잡고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무, 무슨.”
“괜히 고민하지 마시고요!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일단은 촬영에나 집중하세요.”
“……그걸 집중하기 싫어서 다른 생각 하는 건데요.”
“에이, 프로잖아요. 프로다운 태도를 보여 주시라고요.”
“모델은 제 분야가 아닌데요…….”
“그런 말 하지 말고, 파이팅!”
허소리가 힘차게 외쳤다. 매사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부길드장 앞에서 계속 약한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지호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호응했다.
“자, 그럼 다음 옷을 입으러 갈까요?”
망할 광고. 벌써 이번이 세 번째 환복이다. 원래는 다 다른 애들이 찍을 예정이었다는데, 이 기회를 살리겠다고 지호에게 죄다 몰아넣어서는…….
지금까지 입은 옷이 캐주얼한 복장이었다면, 이번의 의상은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지거나, 샛노란 색이 아니라는 것에 지호는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어쨌든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었다.
지호는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오늘, 지호와 마지막 촬영을 진행할 상대가 서 있었다. 뚱하게 걸어 나가던 지호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촬영을 준비 중인 주이원은 매번 보는 모습과는 달랐다.
원래도 잘생기긴 했지만 한껏 정성 들인 스타일링이 이원의 분위기를 다소 바꿨다. 이마가 보이도록 위로 올려 정돈한 머리.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슈트 차림.
평소에도 정장을 즐겨 입긴 하지만… 활동성을 생각해 조금 느슨하게 여유를 둔 평소와는 달리, 어깨와 허리 부분을 조여 상체의 굴곡이 조금 더 드러났다. 베스트까지 갖춰 입고, 조금 화려한 커프스나 시계로 꾸몄다.
오늘의 주이원은 공작새처럼 주변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원이 천천히 지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얼굴 위로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성큼성큼 다가온 이원이 지호를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귀염둥이 왔어?”
“좋은 말로 할 때 내려 둬라.”
“어차피 촬영할 때 안고 있는 장면이 많은데? 미리 예습한다고 생각해.”
“하아…….”
골치가 아프단 듯 인상을 쓴 지호를 이원이 어르고 달랬다.
“수익의 10%는 기부할 거야. 지호가 좋아하는 좋은 일에 쓸 거니까 인상 펴.”
“그냥 순수하게 내 돈으로 기부하고 싶어.”
“하하, 너무 그러지 말고 웃자. 지호야.”
화기애애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주변에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호는 이상한 착각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참고로 오늘의 촬영 컨셉은 아빠와 아들… 이었지만.”
“미쳤어?”
“당연히 바꿨지. 그냥 주이원과 한정판 어린 신지호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 컨셉이 더 무섭다. 그냥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장이라도 하고 싶은데.
결국 이 꼴을 광고에까지 박제하는 건 싫지만… 정말 순수하게 신이 난 이원을 보는 건 좋았다.
지호는 정돈한 이원의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살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가를 둥글게 휘며 활짝 웃었다.
그래, 네가 좋으면 좋은 거겠지.
반쯤 포기한 지호 덕분에 촬영장 내내 분위기는 화목했고, 덕분에 꽤 좋은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 * *
안타깝게도 지호의 수난은 광고 촬영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호는 이원의 옆자리에 앉아, 차마 싫은 티도 안 내고 방긋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이원의 사인회 현장이었다. 청람 길드의 아이템을 구매한 사람에게 주는 추첨권. 거기에 당첨된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다. 촬영장과는 다르게 일반인이 잔뜩 모여 있어서 표정 관리는 필수였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건 원래 이원에게 잡혀 있던 일정이었다. 이원은 자신이 지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기왕 원 플러스 원이 더 좋지 않겠냐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그러더니 기어이 지호를 이 자리에 끌고 왔다.
“너는 대체 왜 이런 걸 하고 다녀서는…….”
무심결에 말하던 지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원이 이플리스에서 지구로 돌아오고자 했을 때. 이원은 지호에게 잊힌 탓에 좌표를 찾을 수 없어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다른 차원으로 떨어졌을 때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일부러 사람들에게 확고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잠깐 미안해졌던 지호의 얼굴이 이내 도로 뚱해졌다.
“이제는 내가 널 절대 안 잊을 건데, 이런 건 안 해도 되잖아?”
애초에 잊은 것도 지호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지호의 단호한 말에 이원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지호야……. 감동이야.”
이원은 벅찬 감격을 못 이긴 사람처럼 지호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원이 한술 더 떠서 지호의 뺨에 쪽, 입을 맞추자 그야말로 함성이 쏟아졌다.
뭔데, 왜 환호하는데.
이원은 실없이 웃으며 얼떨떨한 얼굴의 지호를 고쳐 안았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
하긴, 사람을 다 모아 놓고 관둘 수도 없는 일. 지호는 이번에도 포기한 채 얌전히 이원의 무릎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뭔데. 팬 서비스?”
“아니, 그런 거 말고. 지호가 좋아하는 일 이야기?”
“……여기서?”
“보면 알아.”
공수표 같은 말을 던지며, 이원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