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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대가(1) (232/283)

34. 대가(1)

지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서서히 건져 올려져, 꿈속에서 눈을 떴다.

몸을 가득 채운 힘이 한 번에 빠져나가고, 지호는 몹시 공허함을 느꼈다. 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러나 상실감은 이내 적응되었다. 어차피 그건 남에게 빌린 힘이었으므로.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진다. 지호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딘지 조금은 눈에 익은 얼굴. 상대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지호는 뒤늦게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세이라비카다. 지호의 의식에 기생해 지구로 넘어왔던 꿈을 먹는 자들의 수장. 왕으로서 이원을 몹시 아끼는 동시에 세테르의 친우인 자.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지호에게 세이라비카가 고개를 저었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유령처럼 흐릿했다.

천천히 세이라비카가 손을 뻗었다. 가볍게 주먹 쥔 그녀의 손안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새어 나온다. 지호가 손을 내밀자 세이라비카는 쥐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작고 부드러운 감촉. 손안에 든 것을 가만히 쥐고 있으니, 세이라비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귀공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오.

속삭이듯 희미한 목소리는 갈수록 더 작아졌다. 마지막 말을 끝낼 때쯤 세이라비카의 모습은 완전히 흐려졌고, 그대로 사라졌다.

의식체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더 이상 존재한 힘을 잃은 것일까.

지호가 손안에 든 것을 확인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지호의 손을 잡아 다시 쥐었다. 손에 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지호는 희고 단단한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멸망의 대적자였다.

여전히 안이 보이지 않는 짙은 베일을 쓴 채다. 하지만 지호는 그가 자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쏟아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애정은 기껍다기보단 불편하다. 상대가 지나치게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지호는 베일을 확 벗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그건 뭔데 막은 거야? 어디로 사라진 거고?”

─ …….

“테네브가 한 말은 무슨 뜻이야?”

─ …….

“내가 당신이 한 어리석은 선택이 낳은 결과야?”

─ …….

“당신은 날 이용하려는 거야?”

─ 아니, 아니다.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침묵하던 멸망의 대적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척 당황한 목소리. 그에게서는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 나는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

“……그러면 주이원은?”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으로 내뱉는 순간 희미했던 의혹은 형태를 갖추며 선명해진다.

─ 먼 옛날, 내가 아직 관리자이던 시절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테네브가 말하던 ‘관리자이던 시절’은 그가 아직 성군이었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테네브가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그가 갑자기 변한 건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일 확률이 높겠지.

그저 갑자기 미쳐 버린 줄 알았던 테네브의 행동이 누군가의 개입에 의한 거라면……. 갑자기 지구로 내쫓긴 이원의 불행 또한 누군가의 조작에 의한 결과물이 아닌가.

“테네브가 이원이를 지구로 쫓아낸 게… 우연이야?”

─ 악의가 낳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악의… 라고.”

─ 그래. 주이원이 소멸하기를 바라는 존재가 테네브를 부추겼지. 이후의 관리자로 안배된 주이원이 자신의 세계에서 추방되기를 바라서. 외부의 개입은 거기까지다.

“…….”

─ 추방당한 주이원이 지구로 가게 된 건… 필시 그자의 집념이 낳은 필연이겠지.

“……집념?”

아직 어린 시절의, 아무것도 모르고 힘도 없는 주이원이 지구로 가고 싶어 했다고? 지금의 주이원이라면 모를까, 그때의 주이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에 불과하다.

지호는 생각보다 술술 답해 주는 상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멸망의 대적자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지호는 어쩐지 베일 너머의 그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고 여겼다.

─ 나는 예나 지금이나 놈이 싫다.

“뭐?”

─ 관리자의 영혼이 선택된다고 생각하는가?

멸망의 대적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질문을 부정했다.

─ 그렇지 않다. 각오 없이 견딜 일이 아니기에, 관리자가 되기를 선택한 자만이 관리자가 된다. 내가 멸망의 대적자로 살아가듯, 모든 관리자는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길 선택하여 선별되는 것이다.

멸망의 대적자가 천천히 지호를 가리켰다.

─ 네가 그러했듯, 모두가.

어딘지 비통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멸망의 대적자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 다만 주이원은 유일하게 사명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오직 너를 따라가기 위하여. 끊어진 인연을 엮어, 억지로 운명을 이어 가며, 집요하게…….

관리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면, 모든 관리자는 최소한 두 번의 생을 살아 온 셈이 된다.

[운명의 반려]. 그 스킬이 보여 준, 이원과 지호 사이에 얽힌 굵은 쇠사슬. 지호를 꽁꽁 묶어 둔 그것이 어쩌면 두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이어져 온 걸까.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베일 쓴 상대는 가만히 지호를 바라보고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부드러운 시선으로.

“당신은… 뭐야?”

─ 나는 과오를 바로 잡고, 멸망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자. 대던전을 막기 위해 시스템을 만든 설계자이지.

분명 궁금하던 정보였으나… 지금의 지호가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멸망의 대적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손이 지호의 이마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뺨을 매만진다. 몹시 애틋한 손길로.

─ 미안하구나.

서글픈 목소리와 함께, 꿈이 흐려졌다.

꿈속에서 현실로, 다시 한번 의식이 건져 올려진다.

지호는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를 속으로 되뇌었다. 혹시라도 기억에서 흩어질까 봐, 몇 번이고 되새긴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희뿌옇다. 눈에 초점이 당장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젖은 흙 특유의 축축한 냄새와 몸에 달라붙는 습도와 바닥을 쉼 없이 때리는 작은 소리였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비가 지호를 적시지 못했기에, 지호는 곧장 이원이 제 곁에 있음을 깨달았다.

“신지호.”

“…….”

“지호야, 정신 들어?”

주이원.

당연하단 듯이 늘 지호에게 떨어지는 비를 막아 주는 그의 친구. 소중한 가족. 단 하나뿐인 사람.

크고 따스한 손이 지호의 손을 주물렀다. 지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간신히 이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걱정이 어린 진지한 얼굴. 조금 전에 들었던 말들이 생각나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이원이 심각하게 물었다.

“지호야. 괜찮아? 정신 든 거야?”

“…….”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누구…….”

단 두 마디만 했을 뿐인데 이원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놀려먹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지호는 웃으며 정정했다.

“농담이야, 주이원.”

이원이 표정을 사납게 구겼다. 화가 나는 얼굴로 깊이 안도하며, 이원이 지호를 꽉 끌어안았다. 지호는 이원의 몸에 파묻히듯 안겼다.

아니, 이렇게까지 파묻힐 일인가? 지호는 숨이 막혀서 바둥거렸다.

“수, 숨 막혀…….”

“아, 미안.”

이원이 곧장 몸을 떼어 냈다. 지금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원의 품에 안기면서부터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 지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뭐야!?”

지호는 빽 소리를 질렀다.

옷은 어디 가고 지금의 지호는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아래로 보이는 몸은 예닐곱 살 어린애처럼 작았으니까, 죄다 흘러내렸겠지.

지호는 당황해서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상태창이 보이는 대신, 짧은 문장만이 떠올랐다.

시스템 관리

스킬 [지고의 신성]의 페널티가 발동 중입니다. 남은 시간: 19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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