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격돌(3)
오늘의 이지영은 적갈색 머리에 새빨간 눈동자로 자신을 꾸몄다. 사랑하고 또 증오해 마지않는 제 스승과 같은 색이었다.
이전에 스승과 함께 다닐 적 입던 옷을 차려입을까 했지만… 오늘은 움직이기 편한 테크웨어를 입었다. 원래도 편한 게 제일이니까. 새빨갛게 물들여 기른 손톱이 복장과는 대조적이다. 성가신 것은 선호하지 않지만, 이 손톱은 그녀의 무기이자 도구였다.
톡톡. 손톱 끝으로 검은 관을 건드리자 뚜껑이 절로 열렸다. 조금 전에 걸어 둔 수면 스킬로 인해 안에 든 두 사람은 잠든 채였다. 이지영은 관 속의 양호진을 응시하며 짙게 미소 지었다.
“이만 가요, 스승님.”
자리를 옮기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곳이나 남는 땅에서 실험을 진행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이지영이 신중하게 선별한 장소였다.
오래전 구미호를 잡아 죽인 자리. 당시 구미호를 죽인 사냥꾼은 피를 뿌려 특별한 주술을 걸어 두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여우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별 생각 없이 몸을 줄인 호진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있었어도 여우로 돌아갔겠지만… 어찌 보면 진작 몸을 줄인 덕에 힘을 조금이나마 보존한 셈이다.
“상관 없지. 당신이 내 손에 떨어진 이상 시간문제니까…….”
양호진은 구미호지만 요괴라기보다는 영물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인간의 간을 빼 먹고 업을 쌓는 대신 덕을 쌓았다. 덕분에 황룡 같은 성스러운 자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다.
아무리 선량한 스승 아래에서 자랐어도 이지영은 그처럼 될 수 없었다. 약한 것들을 챙기는 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인가? 써먹고 버리면 끝이지.
이지영의 본심을 알게 된 순간, 양호진이 지었던 표정이 수백 년 전인데도 잊히지 않는다. 유일하게 특별했던 스승에게 배신당한 일은 그녀의 기억에 평생 남았다.
“나만 삿된 것 취급 말고 같이 떨어지자고요.”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을 뻗던 이지영이 잽싸게 뒤로 몸을 빼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새파랗게 날 선 단검이 번뜩였다.
이지영을 공격한 건 다름 아닌 강태주였다.
“연금술사라더니, 생각보다 잽싸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꾸듯 몽롱하던 이지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그녀는 강태주를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 스킬도 인벤토리도 다 막아 뒀을 텐데.”
“다 비장의 수가 있지.”
“…….”
“아, 기업 비밀이라 말은 못 해 줘.”
너스레를 떤 강태주는 몸을 일으켰다. 여유롭게 반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일어나는 폼은 영 어정쩡했다. 그도 그럴 게, 강태주의 옆에 고목의 매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존재 때문이었다.
“야, 안 일어나냐?”
“…….”
“정신 차려라, 양호진.”
험상궂게 말하는 강태주를 어려진 호진이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호진과는 다르게 무척 순진무구한 눈빛이었다. 상대가 화를 내는 데도 활짝 웃은 호진은 이내 태주를 꼭 끌어안았다.
“뭐하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태주는 호진을 잡고 흔들었다. 작아졌다고 해도 S급이라고, 호진은 태주에게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이 거기에 반응했다.
“네까짓 게…….”
분노한 이지영이 강태주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졸지에 처음 보는 여자와 꼬맹이 사이의 삼각관계에 낀 강태주는 제 인생에서 드물게 당혹감을 느꼈다.
“지금 뭐냐, 이게?”
“건방지게…….”
이지영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강태주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질투는 최소한 이 새끼 커지고 나면 해 달라고. 그림이 좀 이상해지지 않냐?”
“죽어!”
“아, 그래. 그러시겠지…….”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아니, 대화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태주는 아련한 눈으로 분노한 이지영이 만들어 내는 골렘을 보며 중얼거렸다.
문란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 온 탓에 여럿과 얽힌 치정은 과거에도 몇 번 있었으나, 상대가 겉보기에 예닐곱 살쯤 되는 꼬맹이인 건 또 처음이다.
아니면 인간관계를 잘못 산 대가를 받는 건가. 태주는 호진을 안아 들면서 혀를 찼다.
“너 양심이 있으면 이건 추가금 내라, 진짜.”
줄어들라고 하긴 했지만, 왜 원래대로 못 돌아오는 건데? 이곳이 어떤 주술적 의미가 있는지 모를 태주는 뜻 모를 상황에 불만을 품으며 구시렁거렸다.
그 사이에 이지영의 골렘이 거대한 팔로 바닥을 내리찍는다. 태주는 호진을 안은 채 몸을 뒤로 굴러 피했다. 피할 줄 몰랐던 듯, 이지영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스킬과 인벤토리는 봉인 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테이터스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물론 그쪽도 이전 같은 상태는 아니지만…….
“어딜 도망쳐!”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칠 정도는 된다는 말씀.
강태주는 매번 사선을 넘나들며 싸워 왔다. 그렇다고 해서 100% 죽는 상황에서도 멧돼지처럼 돌진한 건 아니다. 그가 바라는 건 극한의 상황이 가져다주는 스릴이지, 짚단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무모함은 아니었으니까.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는 잘 싸우는 것만큼이나 튀는 것도 잘한다.
“도망치려거든 스승님은 놓고 가! 그러면 순순히 놓아주지.”
“그건 좀 혹하네.”
정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면 냅다 양호진을 던지고 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까지 위급하진 않다. 강태주는 그렇게 판단했다.
갑자기 혼자 나타나 양호진을 빼돌리려는 이지영. 이게 무슨 상황이겠는가? 당연히 발각된 거겠지.
그가 새로 몸담은 길드와 길드장은 꽤 유능하니까 지금쯤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아마 곧 도착할지도 모르지.
쾅!
역시.
굳게 닫혀 있던 창고의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완전히 뜯겨져 날아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상대를 본 강태주가 혀를 찼다.
“문 앞에 인질이 서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임승주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강태주는 쯧, 혀를 찼다.
“아, 허소리가 오는 게 더 좋은데.”
임승주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강태주를 노려본다. 딱히 이상한 의미는 아닌데. 어린 티가 나는 여자애를 꼬실 생각은 없었다. 그냥, 허소리의 일처리가 훨씬 더 섬세하니까.
굳이 자세히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강태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지영 쪽을 눈짓했다.
“자, 저쪽 쳐야지. 저쪽.”
“까불지 마라.”
이를 갈면서도 임승주의 검은 착실히 이지영이 있는 쪽을 향했다. 자세를 취한 임승주의 몸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새파란 검기가 깃든 임승주의 검이 이지영의 골렘을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콰과과과광!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골렘이 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화재라도 난 것처럼 피어오른다. 강태주는 놀라서 임승주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만한 공격력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임승주의 멍청한 표정을 보니 본인의 스킬은 아닌 모양이다. 임승주는 혀를 찼다.
“튀었군.”
애초에 공격을 받을 때의 상황을 상정하여 만든 골렘이다. 어느 정도의 충격만 받아도 폭발하도록 만들어 뒀겠지.
골렘이 만들어 낸 폭발이 만들어 낸 연기가 서서히 걷힌다. 역시나 이지영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음… 작전 성공이군.”
완전히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 강태주는 픽 웃으면서도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어쨌든 구출은 되었으니 잘된 거 아닌가.
상황이 모두 종료된 후, 임승주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이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제야 강태주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좁은 관에 갇혀 있어 온몸이 뻑적지근한 데다가, 양호진을 안은 채 뛰고 구르고 난리를 쳤더니 피곤했다.
임승주가 다가와 강태주를 발로 툭 쳤다.
“괜찮나?”
“괜찮아 보이냐?”
“그쪽은 괜찮아 보이는데…….”
임승주가 말을 흐리며 강태주의 허리에 붙은 양호진을 바라보았다. 호진은 놀란 건지 태주를 꽉 붙든 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진지하게 한참을 노려보던 승주가 자신감 없는 소리로 작게 질문했다.
“설마 양호진의 아들…….”
“미쳤냐? 본인이야.”
“……어떻게 본인이지?”
“몰라, 이 여우 새끼. 몸 좀 줄이라고 했더니 정신까지 애새끼가 되어서는 계속 이 상태다.”
짜증 난다는 듯 강태주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 보니 며칠 씻지도 못했네.” 중얼거리는 태주에게서 승주가 한 걸음 슬쩍 물러났다.
“야. 야, 정신 좀 차려라.”
한숨 쉰 강태주가 호진을 툭툭 쳤다. 그러자 호진이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며 태주를 바라보다가, 상대가 화를 내는 데도 활짝 웃은 호진은 이내 태주를 꼭 끌어안았다.
“범호 님!”
갑자기 목이 졸린 태주가 켁,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승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건가?”
“엉, 그런 거 같더라.”
“설마 이대로 안 돌아오는 건…….”
“안 돌아오면 내가 키워야지.”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임승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제정신인가?”
“왜?”
“아니, 애를 키울 성격으로는 안 보여서…….”
“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 여우 새끼는 잘 키우면 쓸 만할 것 같으니까.”
사악하게 씩 웃는 태주를 보며, 승주는 저 인간에게만큼은 애를 맡기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호진이 작아진 걸 보면서도 승주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1년 전과 달리 임승주에게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길드장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라는.
실제로 그들의 길드장은 뭐든 해결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니까…….
하지만 임승주의 기대는 곧 부서졌다.
“지호야, 사탕 먹을래?”
“……안 먹어.”
조막만 해진 길드장이 청람 길드장의 무릎에 앉아 사탕으로 실랑이하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