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어디로 갔을까(5)
천천히 의식이 깨어났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마른 눈가가 뻑뻑했다. 침침한 눈을 깜박이는데 갑자기 눈가가 시원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주이원이 서 있었다.
“어… 음, 금방 왔네?”
“금방은 무슨. 다섯 시간 지났어.”
목이 가라앉은 지호에게 이원이 물이 든 컵을 건네주었다. 다섯 시간만 지났다기엔 심한 갈증이 일었기에,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왜 그런 꿈을 꾸고 그래.”
“나도 몰라.”
이원이 안쓰럽단 듯이 말했다. 루에게 말한 이상 어떤 꿈을 꿨는지 이원의 귀에 들어갈 것 같긴 했다만. 아주 바로 보고하는군……. 지호가 흘겨봤으나 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득은 있었나요?”
“아뇨. 조작된 꿈은 아닙니다만 자연스러운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몰입하셨습니다. 게다가 너무 오래 잠들어 계시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을 듯한데 제 실력이 미진합니다. 저보다 꿈을 잘 읽는 자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루는 제 스스로가 실망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그런 루를 보고 혀를 찬 이원이 별거 아니란 듯 담담하게 위로했다.
“그건 새로 알아보면 될 일이지. 너는 몽마로서의 인생이 싫다고 했잖아. 너는 왕국 제일의 검사이니 주눅 들 것 없다.”
“……네. 감사합니다.”
이원의 말에 루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인정받았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서린 얼굴은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지호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원이 뜬금없이 당황했다.
“바람피우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적 없거든? 네가 보는 사람마다 의심한다고 해서 나도 그럴 줄 알아?”
“아니, 나도 딱히 자기가 바람을 피울 거라고 의심한 적은 없는데? 그냥 불안하다는 거지.”
“참나.”
지호는 코웃음 쳤다.
어쨌든,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해서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본 건 절대 아니다. 평소에는 다소 험하게 굴리지만, 신뢰해 주고 있으니 저들 또한 충성을 보내는 거겠지. 그런 생각에 뿌듯해졌을 뿐이다.
“그보다, 지호야?”
“……왜.”
어딘지 불길하게 들리는 이원의 목소리에 지호가 움찔했다.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싸한 얼굴로 이원이 지호와 눈을 마주했다.
“지호, 이플리스에서 여자 만난 적 있어?”
“뭔 소리야!?”
“아뇨, 그게 아니라.”
짧게 한숨 쉰 루가 끼어들었다.
“아마 꿈을 통해서 만나셨을 겁니다. 지호 님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고, 허리에 막으로 된 작고 검은 날개가 있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답게 생긴 여자입니다.”
“아름답기는 무슨.”
이원이 정색하며 환영을 만들었다. 지호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곧장 상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플리스에 도착한 날부터 꾸준히 쪽지를 통해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여자. 꿈에서 만난 여자는 지호가 이플리스에 남을 것을 종용했다. 다름 아닌, 제 왕인 주이원이 이플리스에 남기를 원했기에.
거절하자 그녀는 깔끔하게 물러났고,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난 줄 알았다.
“그녀는 우리 꿈을 먹는 자의 수장인 세이라비카입니다. 이원 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이자, 세테르의 오랜 친우이기도 합니다.”
세테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 이 지구에서 지호에게는 게네시스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니까.
“세이라비카가 당신의 꿈에 기생했습니다.”
“기생이요?”
기분 나쁜 단어에 지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호 님의 정신에 의식을 일부 옮겨 두는 겁니다. 옮겨 둔다고 해도 대단한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관리자의 정신에 개입하기는 쉽지 않으니, 최소한의 인지능력만을 지닌 채 거의 잠들어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지금은 사라졌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휴…….”
“자기야. 지금 이게 안심할 일이야?”
지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옆에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이원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의식에 기생하는 건 상대를 신뢰해야지만 가능해. 이건 정신적인 바람이라고.”
“……세이라비카라면 아주 약간의 믿음으로도 의식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이원의 핀잔에 루가 입을 다물었다.
“야, 중요하지. 그렇게 믿은 거 아니야. 네가 나 가둬 놨을 때 도와준대서 잠깐 혹했을 뿐이라고.”
이제는 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지호는 한숨을 쉬고 한심한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마지구에 온 후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설마… 세테르?”
번뜩 떠오른 이름을 내뱉자 루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오랫동안 친우인 동시에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아마 세테르를 찾아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죄다 죽여 놓고 왔어야 했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이원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상대를 향한 확고한 살의가 느껴졌다. 이플리스에서 살해는 이원의 일상이었으니까.
정말로 세이라비카가 세테르를 찾아가 손을 잡았다면 용서할 수 없겠지만… 이원이 저런 식으로 옛 신하들에게 살의를 품고 죽이는 걸 보고 싶진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한 채, 지호는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누나가 부른 건 뭐래?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시집살이 좀 당하고 왔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진짜야. 결혼 반대당하기 싫으면 너 위험한 일에 끼우지 말고 알아서 처신하래.”
지호는 중간에 낀 괴상한 소리를 알아서 걸러 들었다.
“누나는 어디까지 아는 거야?”
“지호네 길드원 둘 실종된 거. 국제 범죄 조직 게네시스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거. 그중에 이지영이라는 미친 연금술사가 있다는 거. 그리고 지호가 관리자라는 거.”
“……다 아네.”
“응.”
지나치게 잘 알고 있어서 당혹스럽긴 한데… 예상 못 한 일은 아니다.
대충이나마 사정을 아는 이전의 능력자들과 현재의 각성자가 섞여 있으니 어디서든 말이 샐 수밖에. 아직은 소수의 헌터 사이에서만 떠돌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아마 평생 숨기는 건 힘들겠지. 물론 당장은 여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안 한다고 하지.”
“자기가 좀 위험하게 굴기는 하잖아?”
말하면서도 찔리는지 이원이 지호의 시선을 피했다.
이 자식, 요즘 얌전하다 싶더니 누나를 찔러서 자신을 단속할 생각인가 보다. 이원의 말은 무시해도 누나의 말은 듣고 흘려 넘길 수 없을 테니까.
“나도 이제 위험한 짓은 안 해. 다만 지금쯤 위험에 처해 있을 강태주랑 양호진 헌터는 구해야지.”
“그래, 내가 말린다고 듣진 않겠지…….”
이원이 몹시 못마땅한 투로 툴툴거렸다.
“일단 사라진 흔적이 없는데, 어디부터 찾아보려고?”
“그건 나도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일단 주하은 씨와 연락 좀 해 봐야겠어.”
“레일레이는 왜?”
“좀 집히는 게 있어서. 물어볼 게 생겼거든.”
지호가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지호는 홀로 밤의 연금술사 길드에 방문했다. 최근 들어 밤의 연금술사의 길드장이 대통령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지호는 어제 갑작스레 연락한 후, 오늘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부길드장인 이희민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처음 볼 때는 사납고 예민한 이미지였는데. 현재, 희민의 만면에는 여유와 웃음이 가득하다.
“어서 오시죠, 길드장님. 저희 길드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 그 씨발놈을 잡아 처넣어 주신 분인데. 당연히 제가 나와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전 부길드장이자 길드장의 아버지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나? 주변을 슬쩍 돌아보니, 다들 맞는 말이라는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당시 신지호의 도움이 없었다면, 밤의 연금술사가 벌어들이는 소득은 권석중의 뒷주머니로 계속 흘러갔을 테니. 권예나 역시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갔을 테고.
“게다가 저희 길드와 거래하는 큰 손 아니십니까. 당연히 직접 모셔야죠.”
“저야말로 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플리스나 세이크리스에서 얻은 잡다한 아이템의 절반은 노네임 길드의 연구실에 주고, 남은 절반은 밤의 연금술사에 판매했다. 지구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재료가 많이 있었던지라 밤의 연금술사는 환호하며 값을 높게 쳐 줬다.
길드의 은인인 데다 최근의 가장 큰 거래처. 노네임의 길드장 신지호는 무조건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신지호 길드장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길드장실에 안절부절못하며 앉아 있던 권예나가 활짝 웃으며 지호를 반겼다. 말을 더듬고 겁을 먹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너무 들뜨지 말고.”
“아, 넵.”
희민의 충고에 예나가 차분해졌다.
“그럼 볼일 보십시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예나야.”
“응, 고마워.”
둘의 사이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게 보였다. 단순히 좋아진 수준을 넘어서 뭔가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엿보인다. 보기 좋았고… 괜히 이원이 생각났다.
‘같이 올걸 그랬나.’
혼자 가라고 한 건 이원이다. 자기가 있는 것보단 지호 혼자 가는 게 경계도 줄이고 협상도 더 잘될 거라나.
‘예전이라면 무조건 따라왔을 텐데.’
분명 이원의 지나친 관심과 염려가 싫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지호를 못 믿어서 따라붙었던 거니까. 이제 혼자 보내는 건 이원 나름대로 지호를 믿는다는 증거인데.
‘괜히 섭섭하네.’
이원도 지호도 사회생활을 하는 만큼 늘 함께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알면서도 계속 보고 싶었다.
눈이 닿는 곳에 이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볍게 손을 뻗으면 이원의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가볍게 손을 겹치면, 분명 이원은 지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단단히 옭아매어 주겠지. 자기야, 하고 부르면서. 단단한 돌을 동그랗게 깎아 놓은 양 부드럽고 단정한 목소리로.
‘아니, 지금 일하는 중인데.’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괜히 발갛게 달아오른다. 지호는 더운 척 괜히 겉옷을 벗었다.
이원이 늘 함께 있었으면 하는 마음. 이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방법을 모른 채, 지호는 간신히 이원에 관한 생각을 떨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