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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디로 갔을까(4) (225/283)
  • 32. 어디로 갔을까(4)

    델타 길드로 향한다는 말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운전대는 루가 잡았고 지호와 이원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옆에 앉은 이원은 루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호를 매만졌다. 손은 그렇다 쳐도 슬금슬금 허벅지를 만지는 손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원은 손등을 몇 번이나 맞았다.

    그러고도 굴하지 않은 이원은 지호를 자꾸만 자리에 눕히려 들었다. 지호는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 루의 눈치를 보다가, 계속 실랑이하느니 이쯤 해서 타협했다.

    이원은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지호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사냥을 끝내고 잔뜩 포식한 육식 동물처럼.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기야, 박해림 찾은 것 같아.”

    “야, 그것부터 말해야지.”

    깜짝 놀란 지호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상체를 반도 일으키기 전에 이원의 손에 제지당했다.

    “정확히는 뼛가루만 찾았어. 죽은 것 같더라.”

    바둥거리며 일어나려던 지호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지호를 덮쳤다.

    “주술을 쓴 흔적은?”

    “박해림의 거처를 찾아보니 주술에 쓰이는 재료가 있었어. 마력 한 톨 안 남기고 말라비틀어진 꼴을 보아하니 아마 쓰고 죽었을 거야. 문제는 무슨 주술을 썼는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추측할 방법은 전혀 없고? 주술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말이라거나…….”

    “박해림은 꽤 괴짜였다고 해. 마을에 열 가구도 채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뭘 하는지 전혀 몰랐다더라.”

    “그래… 그렇구나.”

    이원은 지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원의 태도 때문인지 흉흉하고 심란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조금은 안심되었다.

    “그리고.”

    “……또 있어?”

    “천희성의 삼촌 말인데, 좀 이상해.”

    “존재부터 이상하긴 하지.”

    “응. 일단 주민등록상으로 천희성에게는 외삼촌이 없거든. 혹시 주민등록을 하지 않았는지도 의심해 봤지만, 과거의 기록을 살펴도 마찬가지야. 박정림과 박해림, 두 자매뿐이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 거야?”

    “존재하는 것 같아. 아마도.”

    이원 치고는 꽤 불확실한 어조였다.

    “그게, 주기적으로 천희성을 찾아오는 이가 있어. 그런데 흔적은 없더라. 아주 자연스럽게 없어.”

    “……인위적으로 흔적을 지운 증거가 없다는 거야?”

    “맞아. 기록을 깨끗이 지우려면 지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없어. 그냥 아무도 오가지 않는 것 같아. 다만 천희성이 주기적으로 제 명의 오피스텔에 드나든 흔적은 있어서… 그걸로 추측하는 거지.”

    “그냥 혼자 쉬러 갔을 확률은?”

    “천희성이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대외적인 활동만 봐도 일정이 빡빡한 사람이다. 거기다 뒤로는 게네시스의 조력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굳이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로 찾아가 시간 쓸 여유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휴식이라면 굳이 한 달에 한 번, 정확히 같은 날짜에 갈 리가 없잖아.”

    “그러게. 게네시스라면 굳이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러면 천희성의 외삼촌을 자처하는 사람은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네?”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흔적이라도 잡을 법 한데. 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밝혀낼 것만 많네.”

    “차근차근 하나씩 해 나가면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원이 사근사근 속삭이며 지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여간 남이 보는데 이러지 좀 말라니까……. 말없이 힐난의 눈빛을 보내니 이원이 실없이 웃는다.

    어느덧 차는 연예기획사 드림 로드의 사무실 겸 이플리스 길드 본부에 도착했다.

    “크사냑도 여기 있어. 한국에서 쓸 만한 인물은 여기 모아 뒀으니까…….”

    이원의 설명을 끊고 그의 단말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워낙 연락이 많이 오는지라 어지간하면 무음일 텐데. 이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말기를 확인하니, 무시할 수 없는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신지혜]

    “누나가 무슨 일이지?”

    “그러게. 딱히 처리할 일은 없을 텐데.”

    이원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통화를 받았다.

    ─ 주이원.

    “어… 누나.”

    업무 시간에는 길드장님, 이라고 깍듯이 부르는 신지혜다. 굳이 이름을 부른 건 사적인 이야기라는 뜻. 다소 건성이던 이원의 자세가 곧게 펴졌다.

    ─ 지금 뭐 해.

    “일 좀 보고 있는데…….”

    ─ 지호야.

    갑자기 제 이름이 들리는 바람에 지호가 화들짝 놀랐다.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한번 엄한 목소리가 “신지호.”하고 불렀다.

    “어, 어. 누나…….”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이 들렸다. 이원과 지호는 눈만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물론 제대로 답은 나오지 않았다.

    ─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주이원.

    동시에 뜨끔, 찔렸다. 관리자나 이플리스의 일 같은 건 누나와 공유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대외적인 행보를 신지혜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누구보다 헌터 업계에 정통한 인물이니까.

    ─ 이하연이랑 어울리는 건 이해해. 네가 설마 지호를 두고 딴 마음을 품는 건 아닐 테고, 일로 엮인 거겠지.

    “네, 그렇죠…….”

    어느새 이원의 목소리는 무척 다소곳해져 있었다.

    ─ 그런데 거긴 왜 간 거야?

    “일이 있어서요.”

    ─ 일이 바쁘구나.

    신지혜가 아무것도 모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설명할지 몰라서, 꼭 설명해야할까 생각하며 도피한 끝에, 결국 신지혜가 먼저 나섰다.

    ─ 이원아, 잠깐 청람으로 와라.

    “어, 누나. 나는?”

    ─ 지호는 안 와도 돼. 혼낼 건데, 지호 얼굴 보면 누나 마음 약해져서.

    서릿발 같은 청람 부길드장의 유일한 약점은 신지호였다. 이원이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지호 혼자 놔두고 가도 돼요?”

    ─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똑똑히 말했어, 주이원.

    주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차라리 신지호 본인을 이긴 적은 많지만, 지호가 사랑하는 그의 가족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이원에게도 가족 같은 존재니까.

    ─ 한 시간 안에 와.

    일방적인 통보 후 지혜의 전화와의 통화가 끝났다. 이원은 혼날 게 뻔히 보여서 걱정하는 아이처럼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가 볼게. 누나가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요즘 들쑤시던 것 관련해서 뭔가 알아낸 것 같기도 한데.”

    “그러게…….”

    신지혜는 비효율적인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굳이 지금 이 상황에 이원을 부른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터.

    “둘이 먼저 길드 들어가 있어. 나는 이거 타고 다녀올게.”

    “응. 몸 조심해.”

    “몸은 괜찮겠지. 마음이 너덜너덜…….”

    이원이 괜히 약한 소리 하며 운전석에 올랐다. 그는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행운을 빌어 줘.”

    “누나가 너 안 잡아먹어.”

    “자기가 뭘 몰라서 그래. 원래 처가는 어려운 법이지…….”

    궁시렁거린 이원은 지호가 한 마디 하기 전에 잽싸게 출발했다. 빠르게 나아가는 차를 보는데 옆에 서 있던 루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네?”

    “……반응하시는 이원 님을 보다니, 진귀한 풍경이군요.”

    지금 이원의 행동을 뭐라고 묘사해도 무례가 되는지, 루가 한참 만에야 간신히 말을 맺었다.

    “……진귀하긴 하죠.”

    “왕께서 평범한 시민처럼 구는 모습을 보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보기 좋습니다.”

    루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이플리스 길드에 어서 오십시오. 자, 들어가시죠.”

    원래 소수 정예의 길드라지만 다들 일을 보러 나간 건지, 길드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사냑도 외출한 모양입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네, 실례하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길드 내부는 실제 이플리스 세계의 방을 옮겨 둔 것 같았다. 다른 세상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방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기계가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다.

    지호가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루가 간단하게 차를 내왔다. 지호는 차를 홀짝이며 루를 살폈다.

    “저기, 루.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지호 님께서 궁금하신 것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해 답변하겠습니다.”

    루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로 대답했다. 이건 좀 부담스럽다. 지나치게 정중하다 못해 자신을 낮추는 서비스직 직원을 보는 느낌이다.

    “조금 편하게 대하셔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깍듯하게 말한 루가 씩 웃었다.

    “크사냑이야 이원 님을 어릴 적부터 오래 돌봐왔으니 괜찮습니다만……. 제가 지호 님께 너무 친근하게 굴면 이원 님께서 저를 거꾸로 매달아버리실 것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루는 대답 대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라서 지호는 루를 설득하길 포기했다.

    “그래서 어떤 용건이십니까?”

    “아. 그게, 제가 요즘 이상한 꿈을 계속 꾸거든요. 같은 내용의 꿈이에요. 그러니까 꿈에서, 제가 자꾸 죽어요. 그리고 이원이가 그걸 나중에서야 알게 돼요. 그래서… 뭔가 난리가 난 것 같은데,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나요.”

    꿈의 끝은 항상 흐릿하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끔찍한 결말을 본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던전에 휘말렸다가 빠져나온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던전에서 지호는 최남솔을 만났고, ‘멸망의 대적자’와 계약했다.

    지호는 둘 중에 한 사람이 제 꿈에 이상한 걸 심어놓은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멸망의 대적자’가 꿈은 꿈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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