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어디로 갔을까(3) (224/283)

32. 어디로 갔을까(3)

강태주와 양호진의 실종 건은 일단, 노네임 길드의 중요 인물들에게 사실을 공유한 채 조사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간의 흔적을 찾는 게 그마나 용의하다는 점이다.

지호는 직접 몇몇 사람을 불러 최근의 두 사람에 관해 물었다.

“어어, 요즘 둘이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던데, 맨날 둘이서 쑥덕거리고.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더니……. 던전에서는 그냥 각자 알아서 일하는데, 공략 끝나자마자 둘이 쌩하니 사라지더라고. 회식도 맨날 빼먹고 말이야.”

“종종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어요. 남들에게는 안 들리게 이야기하길래 못 할 얘기라도 하나 싶었는데, 사고 쳤나요?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아, 태주 형이 호진이 자주 데려가더라고요. 호진이는 얌전히 따라가고. 저는 길드에서 따로 일 시킨 줄 알았는데, 아녔나 봐요? 저희 부업도 되나요?”

“그, 그게… 사적인 이야기라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볼 때 두 분, 사귀는 것 같거든요. 길드장님도 꼭 비밀 지켜 주셔야 해요.”

노네임의 길드원들에게 물어본 결과, 두 사람은 이상한 오해를 받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함께 뭔가를 하기는 한 모양이다.

‘아니, 그럼 이쪽에 말 좀 해 주고 움직이든가.’

양호진은 이중 소속이었기 때문에, 지호는 미르 길드에도 사정을 알렸다. 하지만 미르의 길드장인 태용 또한 호진이 최근 뭘 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호진 님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이라면 분명, 뭔가 중요한 일로 움직이셨겠지요.”

“어, 상당히 믿고 있네요.”

“늘 역사의 한복판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임진왜란 때도 앞장서 싸우셨고,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셨고, 그 외에도…….”

근현대사의 역동기를 함께한 현란한 이력이었다. 한창 설명하는 중에 길드장실의 문이 열렸다.

“그 녀석이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건 맞지만, 이번 건은 사감이 섞였을 거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우희였다.

미르 길드에서 떠받들어지는 황룡은 그 위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란한 차림이었다. 윤이 나는 가죽 재킷과 그 안에 헐렁하게 차려입은 셔츠. 단추가 서너 개쯤 풀려 있어서 탄탄한 가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늘도 흐트러짐 없는 한복 차림인 태용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호진이 녀석 얘기 듣고 잠깐 들렀어. 호진이는 분명 이지영을 쫓고 있을 거야. 이건 확실해. 그 녀석이 제일 후회하던 일 중 하나니까.”

“정말로 이지영이 양호진 헌터의 제자인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는 지호에게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진이가 이지영 그것이 어릴 때 주워 왔지. 부모 잃은 어린 것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그러다가 주술도 가르쳐 주고. 그것이 다 클 때까지는 잘 지냈어. 불행은 이지영이가 호진이를 사랑하게 된 데서 시작했지. 호진이가 자식처럼 키운 애랑 정분이 날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사이가 벌어진 건가요?”

“얌전히 멀어졌으면 이 사달이 나지도 않았지.”

우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지영이가 호진이 주변 사람을 해쳤어. 한둘이 아니야. 딸처럼 여기는 애가 그랬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한 터라, 범인을 밝혀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더라.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인간이 죽은 후였지.”

단순한 치정극을 넘어선 연쇄 살인.

“양호진 헌터가 그냥 넘어가진 않았겠네요.”

“아예 죽이려고 했지. 이지영은 간신히 도망쳤고. 그 원한은 상당할 거다. 물론 단순한 원한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원한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애증.”

우희가 불길하게 씩 웃었다.

“지금의 이지영을 만든 근간이자 수백 년을 집착해 온 상대야. 지금의 이지영은 인형술을 즐긴다고 들었는데. 거죽만 멀쩡하게 남겨 놓고 속은 다른 재료로 채워 써먹지 않을까?”

“그럼 빨리 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응, 태용이도 힘 좀 보태 줘.”

화들짝 놀란 김태용이 하얗게 질린 채 버럭 소리쳤지만, 우희는 여유롭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지호는 우희를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당신은요?”

“나는 바빠. 날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많아서…….”

“우희 님은 한국 외 지역의 게네시스를 추적하고 계십니다. 게네시스의 세력은 해외에도 몰려 있습니다. 저희와 같은 뜻을 지닌 이들이 게네시스와 맞서고, 우희 님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돕습니다.”

가볍게 농담처럼 넘기는 우희를 대신해 태용이 잽싸게 정정했다. 우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 모처럼 놀릴 기회인데. 솔직하게 말하기는…….”

“이미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요.”

우희에 관해서라면 진작 조사했다. 뭘 하는지 완벽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진 정보를 토대로 추론하면… 그가 뭘 하는지는 뻔히 나왔다. 한량처럼 보이는 건 껍데기뿐. 우희는 한창 바쁠 때의 이원 못지않게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우희는 조금 머쓱하면서도 뿌듯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안 그래도 신지호,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우희가 지호에게 작은 문양이 그려진 쪽지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뭐죠?”

“관리자만 접근 가능한 던전의 위치야. 우연히 찾았어.”

그 순간 쪽지가 물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대신, 지호의 머릿속에 던전의 위치가 또렷이 남았다.

‘청의 방주…….’

지구 멸망 최후 대비 시스템. 즉, 이 별의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안배된 곳.

그곳의 관리인은 이곳이 지구에 안배된 곳 중 하나라고 했으니, 방주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다른 곳이 더 있을 터. 알아보려고 했지만 워낙 범위가 넓어서 제대로 된 진척이 없었는데… 예상 못 한 소득이었다.

‘좀 멀긴 한데.’

멀어도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다. 청의 방주에서도 각성자를 강화할 수 있는 수호자의 보주를 얻었으니까. 분명히 여기도 비슷한 게 있을 터였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한번 찾아봐.”

“네, 감사합니다.”

“지호 님, 필요하시다면 저도 언제든지 돕겠습니다. 꼭 불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우는 태용에게 지호가 웃으며 인사했다. 나름 훈훈한 두 사람을 보던 우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거야?”

“네?”

“아니, 젊은 애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왜 그렇게 데면데면 구냔 말이지.”

우희의 말에 태용이 잔뜩 당황했다.

“길드장과 길드장 사이고…….”

“여기 사적인 자리잖아? 아직 별로 안 친한가? 관리자님은 우리 태용이가 마음에 안 들어?”

태용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안 좋은 쪽으로 들쑤신 주제에, 우희는 혼자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거라 나는 이만. 정 중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씩 웃은 우희가 손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벌어지며 거대한 문이 생겼다.

“안녕, 꼬마 친구들. 다음에 또 보자.”

인사한 우희가 문 안으로 사라졌다. ‘꼬마 친구들’이라는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용은 문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았다.

고개를 돌린 태용은 다소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러면 왜…….”

“그, 딱히 말 놓자고 한 적 없잖아요? 김태용 헌터도.”

태용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100살 연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걸 보면 확실히 정신 연령은 큰 차이가 없었다.

“저는 사실 지호 님을 친우로 여겼습니다…….”

“아, 아하…….”

“아니면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까?”

김태용이 불편한 건 아닌데, 김태용과 연결된 비단끈이 불편하다.

지호는 다소 처량한 태용을 마주보았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든 얼굴은 연상이라기보단… 귀여운 동생 같다. 결국 지호는 두 손 들었다.

“그럼 편하게 말할… 래요? 말을 놓는 게 좋다면 그래도 되고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어, 그럼…….”

“하지만 지호 님은 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이원 님을 대할 때처럼 말입니다.”

“보통은 주이원에게 하듯 말하진 않는데요. 게다가 저만 말을 놓는 것도 좀…….”

“저도 가능한 선에서는 편하게 말해 보겠습니다. 신지호 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겠습니다.”

아, 확실히 매번 신지호 님, 하고 깍듯한 존칭을 붙이는 건 부담스럽긴 했다. 간절한 눈빛을 보다가 지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니, 좋아.”

생각보다 말이 쉽게 나왔다. 세이크리스에서도 몇 달이나 함께 지내면서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았나.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시간 속에서 확실히 친해졌다.

뭐, 반려라고 해도 꼭 연인이 된단 법은 없는 거 아닌가? 태용도 지호에게 별다른 연애 감정은 없는 것 같고.

지호의 승낙에 태용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그럼 지호. 나도 조사해 보겠습니다.”

“……외국인이 말하는 것 같아.”

“차차 적응될 겁니다. 그러면 지호는 지호 나름대로 조사를 계속해 주십시오.”

“알았어. 음, 그럼… 일 끝나면 밥이라도 한 번 먹자.”

“알겠습니다.”

깍듯한 대답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참고로 일 때문에 만나는 게 아니라… 친하게 지내자며? 용건 없이 편하게 얼굴 보자는 거야.”

“아!”

역시, 그런 쪽으로는 조금도 생각 못했는지 태용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응, 좋아.”

바짝 군기가 들어 대답하는 태용을 보고 지호는 웃음을 삼켰다. 아직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금방 적응되겠지. 김태용은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용이니까.

“그럼 다음에 봐.”

“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지호는 태용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주차해 둔 제 차로 향했는데… 그곳에 몹시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주이원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이원을 보자마자 지호는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양호진 헌터가 실종되는 바람에 그거 물어보려고 들렀어.”

“응, 그렇겠지.”

이전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이원은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지호는 흐뭇한 얼굴로 이원에게 손짓했다. 지호는 강아지에게 하듯 이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잘할 때마다 칭찬을 해 줘야 하는 법이니까.

“착하네.”

“착하지? 그럼 키스해 줘.”

“…….”

그게 왜 이렇게 되냐. 뭐, 못 해 줄 것도 없지만.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주차되어 있는 이원의 차 창문 너머로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건만.

그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려주었지만, 지호는 대범한 짓을 할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한숨을 쉰 이원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이원의 심복인 루였다. 지구에서의 신분이 연예인이다 보니, 오늘은 촬영이라도 하고 왔는지 화려한 복장에 선글라스를 낀 채였다.

“전력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서 데려온 건데…….”

“계속 하셔도 됩니다.”

“지호는 수줍음이 많단 말이야. 하여간, 다음부터는 알아서 기척 죽이고 숨어 있어.”

“네, 알겠습니다.”

“이상한 명령 하지 마.”

지호는 이원을 말렸지만, 둘 다 지호의 말을 귀담아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