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수상한 녀석들(13)
이제 그만 잘 시간이었다. 최남솔은 침낭을 바닥에 깔고 얌전히 누운 지호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형, 무서운데 우리 꼭 안고 자면 안 돼?”
같잖은 개수작을 부리며 최남솔이 윙크를 날렸다. 곧장 지호의 표정이 못 먹을 음식을 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더 가까이 오기만 해 봐.”
“가까이 가면 뭐, 어쩔 건데?”
성큼 다가온 최남솔이 바닥에 앉아 지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쩌기는. 지호는 최남솔의 이마를 가차 없이 주먹으로 날려 버렸다. 최남솔은 그대로 뒤로 굴러갔다.
“악! 아악!”
“왜 엄살이야. 한 대 더 때려 줘?”
“아, 아파. 진짜 아파. 거시기 걷어차였을 때만큼 아파…….”
“…….”
지호는 힐끔 파티창을 확인했다. 남솔의 HP가 줄어들어 있었다. 지호는 한 번 더 때리려던 주먹을 얌전히 내렸다. 한참 바닥을 뒹굴던 최남솔이 징징거리며 일어났다.
“형, 보조계면서 왜 이렇게 힘이 세?”
“그야 [신체강화] 썼으니까.”
“너무하다, 이 국보급 얼굴에…….”
“국보?”
지호는 최남솔을 가차 없이 비웃었다. 물론 꽤 봐줄만한 얼굴이긴 한데 주이원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남솔이 다시 슬금슬금 지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불쑥 얻어맞은 이마를 내민다. 남솔의 이마는 순식간에 멍이 올라와 있었다.
“형아, 나 아파. 호 해 주라.”
“포션이나 발라.”
지호는 손톱만큼 생겨났던 죄책감을 버리고, 인벤토리에서 보급형 포션을 하나 꺼내 던져 주었다. 얌전히 포션을 받아 이마에 들이부은 최남솔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이… 미남계 한번 써 보려는데 잘 안 되네.”
“…….”
“와, 형 표정 지금 어떤지 알아? 나 상처받는다.”
“주이원으로 다시 태어나서 와.”
“와, 역시 세기의 커플 아니랄까 봐…….”
지호는 헛소리나 구시렁거리는 최남솔을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렸다. 최남솔도 더는 지호에게 치근덕거리지 않고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당장은 최남솔이 얌전해 보이지만… 지호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면 어쩌려고…….’
일단 누가 건드리면 반격하도록 아이템을 써 두긴 했다. 하지만 상대는 정체불명의 힘을 지닌 게네시스다. 차라리 기절을 시킬까도 했지만, 저 녀석도 일단 S급이니 그 정도로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형, 잘 자! 원하면 내 침낭으로 들어와도 돼!”
헛소리를 지껄인 최남솔이 침낭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후, 지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내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소리가 꽤 크다. 노골적인 소리와 완전히 잠든 기척을 보니 안심이 됐지만… 다른 의미로 골치가 아팠다.
안 그래도 워낙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라 불편한 던전에서 자기도 쉽지 않은데. 이대로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깊이 잠들 생각은 없으니 눈이라도 붙여야지.’
지호는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침낭 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꺼풀 아래의 어둠이 돌연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지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눈을 뜬 게 맞는데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듯한 묘한 감각이 들었다.
도저히 가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뭐, 뭐야.”
갑작스레 바뀐 풍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이 들었다. 던전 안에서 갑자기 다른 곳으로 공간 이동했을 리 없으니, 이건 분명 무언가의 환상에 가깝겠지.
분명히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최남솔이 무슨 수를 쓴 걸까?
“아니, 아니야.”
지호는 순간 떠오른 가정을 부정했다.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공간은 너무도 선명했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밀도 높은 마력으로 꽉 찬 이곳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성지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공간.
“여긴 대체…….”
고개를 내렸던 지호는 자신이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몸에 딱 맞는 하얀 색의 셔츠와 푸른색 바지 위로, 금빛 선으로 장식된 하얀 케이프를 걸쳤다.
제대로 차려입은 의복과 어울리지 않게 지호는 맨발이었다. 살갗 아래에 닿는 건 적당히 서늘한 무언가였다.
처음에는 유리라고 생각했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작은 물방울이 튀고, 발 닿는 곳마다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지호가 서 있는 곳은 수면 위였다.
반짝이는 수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푸른빛과 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에 박힌 별이 머리 위와 수면을 빛으로 수놓았다. 하나하나 강렬한 빛은 아니지만 은은한 빛으로 어둠을 가르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오직 하늘과 호수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딱 하나 도드라지는 것이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흰색의 건축물. 뾰족한 지붕을 지닌 작은 탑은 언뜻 보기에도 새하얗다.
탑의 지붕에서는 마치 분수처럼 물이 샘솟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수면 위에 파문을 그리는 대신 흡수되듯 스며들었다.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그때, 건물 뒤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탑처럼 온몸이 새하얀 사람이었다. 상대의 복장은 지호와 비슷했다. 여밈이 보이지 않는 흰 셔츠와 바지, 기다란 케이프까지. 넉넉한 옷 때문에 성별을 알 수 없다. 심지어 하늘하늘한 재질이지만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 베일 때문에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 ■■.
상대가 입을 열었으나 소리가 이상하게 뭉개져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호는 상대를 경계하며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상대는 실망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안쓰러운 모습이다. 그것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신지호.
“당신, 분명 그때의…….”
지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 대던전의 마지막 전투에서 갑자기 개입했던 목소리였다. 지호를 무척 걱정하고 아껴 주었으나… 동시에 지호를 위해 이원을 죽이려고 했던 그였다.
─ 경계하지 마라, 제발.
“당신의 뭘 믿고?”
─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주이원은 해치려고 했잖아.”
─ 그자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노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잠시 숨을 고른 후, 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주이원은 이미 신격을 얻었고, 관리자의 삶을 끝냈다.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 아니, 이건 주이원을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이원은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지. 괜히 이곳에 남아 있다가 신격이 깎인다면 그는 이룬 업적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셈이 된다.
허를 찔린 지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확실히 이원도 신격에 관한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자신의 신격이 깎일 수도 있다고. 마치 테네브처럼… 제대로 된 신이 되지 못한 채 추락할 수 있다고.
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악문 채 상대를 노려보는 지호의 얼굴에는 잠깐의 흔들림이 모두 사라진 채였다.
“그런 건 걱정 안 해. 주이원은 쉽게 흔들릴 녀석도 아니고, 내가 주이원을 지켜 줄 테니까.”
─ 그런가. 너는 그를 위해…….
상대는 체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 그게 네 대답이로군.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걸.”
─ 내가 원하는 것?
상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그대의 안위지.
“왜?”
─ 왜냐고 물으면…….
점점 목소리를 낮추던 상대가 한숨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 당장은 대답할 수 없어.
“뭐야, 수상쩍게.”
지호는 상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저것이 지호에게 적의를 지니지 않은 건 확실하다. 그러나 목적이 뭔지 모르는 이상, 마냥 신뢰할 수도 없었다.
“여긴 왜 나타난 거지?”
─ 아, 그래.
원래의 목적을 잊고 있었다는 듯, 상대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와 아래에 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지호의 머리가 그의 허리께에 닿을 정도.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크기였다.
위협적인 기운을 발산하고 있지 않은데도 상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향을 끼치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시스템을 다루는 자다. 평범한 존재는 아닐 터.
먼 하늘 위의 존재처럼 보이던 자가 천천히 지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흠칫 놀라는 지호의 손을 붙든 그는 지호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싸늘해 보이던 것과 달리 따스한 체온이었다. 그는 지호의 손을 가볍게 들어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베일에 가려져 입술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지호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는 확신이 들었다.
─ 신지호.
“…….”
─ 나와 계약하지 않겠어? 내가 네 수호신이 되어 줄게.
상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애초에 관리자는 미래에 신이 될 존재다. 수호신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계약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런데 수호신의 계약을 맺자니.
게다가 계약을 제안하는 과정조차 이상했다. 보통 수호신은 시스템창을 통해 말을 건넨다.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와 계약하는 수호신은 듣도 보도 못했다.
“무슨 수작인지 몰라도 안 통해.”
─ 수작이라니. 왜 그리 생각하지?
“그야 계약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 아.
상대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이내, 지호의 눈앞으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멸망의 대적자’가 당신의 현명함에 감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