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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상한 녀석들(2) (203/283)
  • 30. 수상한 녀석들(2)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날. 대기실에서 지호는 잔뜩 긴장해 얼어붙어 있었다. 입을 일이 거의 없는 정장은 불편했고, 방송 출연을 위해 한 화장 또한 답답했다.

    세팅해 둔 머리 스타일이 흐트러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호를 옆에 따라온 이원이 격려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자기야.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데.”

    “너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지호가 우울한 목소리로 한숨처럼 내뱉었다. 다들 주목할 줄은 알았지만, 파장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상한 실수 하면 어떡하지?”

    “무슨 실수?”

    “그냥,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거나…….”

    “지호는 아무 말이나 해도 이상하진 않을걸.”

    “……아니면 내가 바보같이 군다거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있으면 그냥 머리를 깨 버릴게.”

    “깨긴 뭘 깨냐…….”

    “하긴, 이제는 지호가 알아서 잘 깨겠지?”

    씩 웃으며 건네는 능청맞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지호의 웃음이 샜다.

    “응, 알아서 깬다. 깨.”

    물론 진짜로 남의 머리를 깰 생각은 없지만… 저 과격한 말은 괜히 듣기 좋았다. 어쨌든 이원이 온전히 제 편이 되어 준다는 뜻이니까.

    어차피 방송이나 여론에 대한 공포는 거의 다 극복했다. 생각보다 더 주목하는 바람에 다소 긴장하기는 했지만. 지금 이원의 응원은 그 잔재마저 시원스레 날려 버렸다.

    괜찮아진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가 볼게, 자기야.”

    “응. 너도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고. 알지?”

    “알았어.”

    “나랑 약속한 거야.”

    “1절만 해라.”

    이대로라면 잔소리가 영원히 이어질 기세였다. 그럼에도 몇 차례나 더 신신당부한 이원은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오늘 이원은 던전을 공략할 예정이었다. 아슬아슬하지만 늦지는 않을 것이고, 곧 던전에 진입하게 되겠지.

    즉, 지호와 가장 가깝고 강력한 주이원의 발이 곧 완전히 묶인다. 이원은 자신이 지호를 지켜 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떠났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이원은 신지호를 사랑했지만 신뢰하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원은 사랑하는 만큼 지호를 강하게 불신했다.

    이원의 변화는 이세계에서 시작됐다. 이원은 자신이 바란 게 그저 지호를 지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앞장서는 지호를 말리지 않고 도왔다. 그 과정에서 지호가 묵묵히 해내는 것을 보고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나갔다.

    지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무지 이원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믿어 보려고 해도, 상대는 자신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했으니까.

    이원이 지호를 믿게 된 만큼, 지호 역시 이원을 이전보다 더 이해한다. 이원이 어떤 위협 속에서 살아왔는지, 그걸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도. 그동안 지호가 아집이라고만 생각했던 건 이원 나름의 생존방식이라는 것을.

    가까웠지만 영원히 닿지 않을 평행선상의 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좁아지고 있다. 완전히 맞닿을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힘을 내 봐야겠지.

    어쨌든 오늘 방송 출연을 겸해서 허수혁을 만나는 건 이원과 함께 계획한 일이다.

    오늘 지호가 맡은 역할은 미끼. 조승택이 합류한 게네시스나 녹스 모두 이원이 없는 지호를 만날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 일부러 자신을 노출했다. 혼자 이 방송국에 남음으로써.

    저쪽에서도 지호가 대놓고 미끼를 던졌단 것쯤은 알겠지만, 이건 놓치기 힘든 기회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올 게 분명했다.

    지호가 마음을 굳게 먹고 있을 때 누군가가 대기실의 문을 노크했다. 어느새 촬영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지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조금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펑!

    문 앞에서 들린 작은 폭발음에 지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갑작스럽지만 놀라진 않았다. 위협적인 마법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너무도 익숙한 마력이었으니까.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며,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눈처럼 보슬보슬 내려왔다. 빛과 함께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장미 꽃잎이 흩날리며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깜짝 놀란 스태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탄성을 내뱉었다. 가벼운 장난에 긴장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지호는 발걸음도 가볍게 촬영장으로 향했다.

    * * *

    지호의 걱정과 긴장이 무색하게도 촬영은 정신없이 휘몰아쳐 시종일관 훈훈한 분위기였다. 입담 좋은 MC들은 신이 나서 말을 걸어 댔고, 약간 신지호 특집처럼 되어 버렸지만, 촬영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진이 빠지긴 했지만. 지호는 촬영진과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말기를 열어 힐끗 확인만 했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주이원

    자기야, 나 이제 던전 들어가.

    몸 잘 챙기고,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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