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업적(6) (201/283)
  • 29. 업적(6)

    자신만만하게 웃는 우희를 바라보던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희를 향해 눈을 치뜬 채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말해 봐요, 게네시스에 대해서.”

    “이대로는 말 못 하겠다면?”

    우희는 이원을 힐끗 보았다. 이원을 쫓아내고 그들끼리 이야기하자는 노골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그냥 해요. 어차피 어디서 말하든 난 주이원과 정보를 공유할 거니까.”

    “부부도 아니고.”

    우희의 비꼬는 말에 지호는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던 이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 행동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원이 움찔 놀랐다. 지호는 안심시키듯 따뜻하고도 커다란 손을 감쌌다.

    “우린 부부보다 훨씬 진한 사이죠.”

    “호오…….”

    우희의 눈이 퍽 흥미롭다는 듯 둥글게 휘었다. 지호의 단호한 말에 이원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잡힌 손을 뒤집어 지호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단단하게 얽힌 체온을 붙들며, 지호는 우희에게 사납게 쏘아붙였다.

    “우린 가족이니까.”

    “…….”

    이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호의 손이 으스러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억센 힘이다. 옆자리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지호가 해명했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부부는 이혼하면 그만이잖아? 가족은 계속 가족이고…….”

    “남보다 못한 가족도 많아.”

    “……우리가 남이야?”

    “굳이 따지면 남이지. 난 너뿐만 아니라 너희 가족도 내 가족으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에 지호는 배신감을 느끼며 이원을 흘겨보았다. 배은망덕한 소리를 한 주제에 이원은 오히려 자기가 화난 얼굴이었다. 지호야 그렇다 쳐도 부모님이나 형, 누나는 가족으로 여겨도 되는 거 아닌가?

    “야. 너 지금 그게 말이라고…….”

    “으학, 하하하하!”

    가만히 듣고 있던 우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앞뒤 안 가리고 화내려던 지호의 뺨이 붉어졌다.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지호는 이원의 손에서 슬그머니 제 손을 빼냈다. 이원은 싸늘한 얼굴로 그저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그걸 본 우희는 더 신나게 웃었다.

    이라희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우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눈물을 닦으며 진정한 우희가 개운한 얼굴로 씩 웃었다.

    “좋아, 웃기게 한 대가로 알려 주지. 사실 네가 어떻게 나오든 알려 주려고 했으니까. 안전하게 보호하는 게 불가능하니 최소한 정보라도 많이 알아야 하지 않겠어?”

    “말해 줄 거면서 시비 걸지 마세요. 그냥 무시하는 수가 있으니까.”

    “어이쿠, 이런. 무서운데……. 그래, 그럼 진지하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우희가 식탁에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 SSS급이 세 명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셋 있다는 건 들었어요.”

    “응. 나랑 노네임 그리고 레비아탄. 이렇게 셋이 있지.”

    “……노네임이요?”

    “그래, 너희 길드랑 이름이 같지? 무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름도 없고 직업도 없고 세상만사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놈이야. 어차피 이번 일에도 안 끼어들걸. 애초에 마지막으로 발견된 게 100년 전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무성의하게 지었던 길드명과 같은 이름이라니, 우연이라고 해도 신기하니까.

    “무명은 됐고. 내가 말하려는 건 레비아탄이야. 나는 이놈이 게네시스의 수장일 거라고 생각하거든. 아니, 확실해. 이놈 외에는 없지.”

    레비아탄이라면 분명, 신화 속 환상의 동물인데. 지호도 어렴풋이 그 존재에 관해 알고 있었다.

    딱딱한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 코에서는 연기를,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 너무도 거대하여, 때로 바다 그 자체로도 불리는 악몽 같은 존재가 바로 레비아탄이다.

    “워낙 유명하니까 대충 알고 있지? 전설 속의 그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지만, 일단 엄청나게 오래 산 늙은이야. 나도 몇천 년은 살았는데, 내가 태어날 무렵에도 늙은이였으니까. 앞으로 만 년은 너끈할걸.”

    상상도 할 수 없이 오래된 생물이었다. 오래 살아 온 게 반드시 강함을 상징하진 않지만… 원래부터 강력했던 생물이라면 분명 세월만큼 쌓아 온 게 있을 터.

    “당신보다 훨씬 강한가요?”

    “그래.”

    도발적인 질문에 우희는 순순히 대답했다.

    “같은 SSS급이라고들 하지만, 나보다는 레비아탄이 더 강해. 바다에서는 EX급이라고 해도 될 거야.”

    게다가 지구는 대부분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레비아탄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플리스의 주이원이 그랬듯.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원의 관리자로서의 힘은 지구에서 쓸 수 없으니까.

    “다행히도 지금은 레비아탄의 동면기다. 본체는 잠든 채, 드문드문 제 의식만을 내보내서 활동 중이지. 워낙 오래 산 녀석이라 늘 활동할 수는 없거든.”

    “그나마 다행이네요…….”

    “곧 동면기도 끝나겠지만.”

    좋다 말았다. 그래도 당장 활동할 수 없다면 대비할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최소한 레비아탄이 깨어났을 때, 기반 정도는 없애 둘 수 있도록.

    “게네시스 일원 중 지금 한국에 들어온 건 이지영이다. 아마 너도 알 거로 생각한다만.”

    “……알죠.”

    게네시스의 연구 시설을 습격했을 때, 시스템창을 통해 이지영의 이름을 확인했다. 지구의 시스템인 ‘녹스’에게 설계도를 받아 인조인간을 만든 700년 산 연금술사.

    양호진은 완전히 그녀를 미친 연금술사라고 표현했다. 애초에 게네시스에 협력하는 것부터가 제정신은 아닐 터였다.

    우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 인간은 정도를 몰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든 하지. 특히나 악랄한 건 누군가를 세뇌할 때인데, 몹시 정교한 수라…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릴 수 없지. 너 또한 마찬가지고. 아무리 시스템의 보조가 있다고 한들, 그쪽에는 녹스가 있으니 네 눈을 가릴 수 있어.”

    “…….”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거다.”

    비각성자를 죽이고 각성자만의 세상을 만들려는 게네시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금술사 이지영, 서리와 같은 시스템이지만 삐뚤어진 목적으로 행동하는 녹스까지.

    하나같이 골치가 아픈 상대였다. 게다가 저들 외에도 게네시스의 뜻을 따르는 자는 많을 것이다. 그동안 무시당하던 F급 각성자가 강해짐에 따라, 게네시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르고.

    “힘든 상대겠지? 나는 언제든 네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꺼져.”

    “이 녀석이 조금 더 셀지 몰라도, 기반은 내가 훨씬 넓거든. 세계 각국에 내 영향이 뻗쳐 있으니까.”

    “여기서 죽으면 그 기반도 끝이겠지.”

    “난폭한 남자 대신에 나로 갈아타는 거, 생각해 봐.”

    우희는 사납게 받아치는 이원을 무시한 채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자개처럼 반질거리는 명함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거 내 명함이야.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

    오래된 유물같이 생겨서는, 명함 위에 적힌 건 우희의 이름과 연락처였다. 지호는 이원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우희의 명함을 받아 들고, 제 명함도 그에게 건네주었다.

    “심심할 때 불러도 좋고. 내가 좋은 곳을 많이 알거든. 너 같은 모범생은 가 본 적 없는 곳 말이야.”

    “지저분한 곳에 지호를 끌어들이지 마.”

    “나는 대체 네가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는데… 지저분한 쪽을 잘 아나 봐? 나는 그냥 술 한 잔 마시며 이 세상에 관해 이야기 좀 나누자는 건데. 음양의 이치에 대해 논하고, 다른 쪽이 취향하면 같은 양의 조화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건전한 교제를 나눌 수도 있을걸?”

    결국 참다 못한 이원이 젓가락을 던졌다. 우희의 미간을 노린 젓가락은 벽에 깊숙하게 박혔다. 우희는 “어이쿠, 무서워라.” 라며 호들갑을 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 본다. 태용이가 많이 보고 싶어 하던데, 그 애에게 연락이라도 해 줘.”

    이원은 윙크하는 우희에게 다시 한 번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 간발의 차로 피한 우희는 윙크를 하고 여유롭게 선글라스를 꼈다. 우희가 방을 나서자마자, 이라희는 미안하다는 듯 꾸벅 허리 숙여 사과하고 그를 뒤따랐다.

    문을 노려보단 이원이 지호를 꽉 끌어안는다.

    “저거 진짜 맘에 안 들어.”

    “뭐 언제는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있었냐.”

    “저런 노친네, 진짜 싫다고…….”

    “그래, 그래.”

    이번은 우희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 댔으니, 이원의 심정이 영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호는 이원의 품에 얌전히 안긴 채,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지호를 만지고 주무르던 이원은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가자고 할 줄 알았더니, 식탁에 시선을 돌린다.

    “그럼 마저 먹고 가자.”

    “먹는다고?”

    “입맛 떨어지는 새끼도 사라졌겠다, 좋은 거 많이 차려놨는데 남기지 말고 먹어야지. 먹으면서 얘기해.”

    하긴, 입맛이 떨어졌다고 음식을 버리면 쓰나. 지호는 얌전히 수긍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느릿하게 먹으며 이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지영이라.”

    “왜?”

    “그 여자, 연금술사라고 했지. 연금술사는 기본적으로 뭘 하든 재료가 필요하거든. 보아하니 멀쩡한 재료만 쓸 것 같진 않은데… 그걸 해외에서 게네시스를 통해 받는 건 부족할 거야. 한국은 보안이 꽤 잘되어 있으니까.”

    이원의 말대로였다.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한국 내에서도 사 들이고 있을 테고, 특이하거나 불법적인 재료까지 모은다면… 분명 이지영의 단서를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전에 찾아갔던 블랙마켓에는 없을 것이다. 이미 한 번 털린 곳인데다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겐 꽤 대중화된 시장을 직접 이용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하늘 길드를 파 볼까.”

    게네시스와 손잡았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 얼마든지 귀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

    “좋은 생각이야.”

    이원이 지호의 말에 동의하며 씩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