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업적(5)
상대를 몹시 경계하듯 이원이 지호를 확 잡아당겼다. 차 안인지라 불편하게 뒤로 쓸린 지호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룡을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 지호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불쾌해하는 이원의 반응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번은 유달리 불쾌해 보였다.
“도망을 다닐 때는 언제고 이제야 당당하게 나서는 거지?”
“미친개에게 맞서서 뭐 하겠어? 피하는 게 제일이지.”
얕잡아보는 이원의 말에도 황룡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황룡은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황룡의 뒤에 서 있던 이라희의 눈동자는 그녀의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바쁘게 굴러다녔다. 뒤늦게 이라희가 황룡님, 하고 속삭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음, 라희 군이 겁을 먹으니 그만하지. 뭐 네겐 볼일 없고, 내가 관심 있는 건 신지호 군이라서.”
노골적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지호를 훑었다. 불쾌하게 여길 법도 한데, 이상하게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호를 향한 황룡의 시선은… 호기심도 섞여 있지만 착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애정이 담겨있어서.
잘 모르는 이의 애정이라, 그저 영문을 모르겠고 낯설기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계가 되진 않았다.
“제게 무슨 용건이시죠?”
“할 말이 조금 있거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어?”
“이야기 정도라면 어려울 것 없지만…….”
순순히 대답하며 지호는 자신을 꽉 붙든 이원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별다른 힘이 담기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이원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좋아. 대신 나 보는 데서 이야기해.”
“네게 물은 게 아닌데. 지호 군의 의견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네 명령에 따르라는 걸까?”
잔뜩 꼬인 말투지만 평소 지호가 탓하던 부분이었기에, 이원이 멈칫했다. 지호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하시죠. 어차피 모르는 상대와 둘이서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모르는 상대라니, 이름은 많이 듣지 않았어? 마음이 아프네.”
마음이 아프다고 한 사람치고는 대단히 멀쩡한 얼굴로 답한 황룡은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둘이서만 대화할 생각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대신 여기서 떠들기는 장소가 적절치 않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때?”
“그래요. 그럼 타시죠.”
지호의 말에 황룡과 이라희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 * *
마침 식사 때이기도 해서, 지호가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아무래도 황룡의 차림은 대단히 위화감이 들었지만, 직원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나란히 좌식의 식탁에 마주 앉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홀로 즐거워 보이는 황룡이 지호에게 인사했다.
“반가워. 내 이름은 우희야. 편하게 불러.”
“아, 네…….”
“아주 오랫동안 만나고 싶었어.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기뻐.”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우희가 자연스레 지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려고 했다. 그 사이를 이원이 끼어들어 우희는 지호의 손 대신 이원의 손을 잡게 되었지만.
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이원의 손 위를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원의 얼굴이 혐오스러운 바퀴벌레에라도 닿은 것처럼 대번에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지호도 우희와 이원의 손이 맞닿은 걸 보니 이상할 만큼 기분이 나빠져서, 재빨리 이원의 손목을 잡아 우희의 손에서 빼냈다.
“하하, 아하하!”
가만히 보던 우희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우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목을 젖히고 크게 웃었다. 그 옆에 앉은 이라희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지호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태도의 우희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답잖은 장난치러 오신 거면 갈게요.”
단호한 지호의 태도를 본 우희가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손을 내젓는다.
“아, 아니야. 미안, 이제 장난 안 칠게. 설마 내가 네 시간을 뺏으려고 왔겠어?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했지.”
“…….”
“물론 일방적으로 얻고 가려는 건 아니야. 서로 정보 교환을 하자. 네게도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게네시스에 대한 정보, 궁금하지 않아?”
우희가 자신만만할 만도 했다. 지호가 무시할 수 없는 정보였으니까.
게네시스. 비각성자를 모두 ‘청소’하여 죽이고, 각성자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미친놈들의 모임. 서리와 같은 시스템의 일부인 녹스가 협력하는 대상. 지호를 가짜 몸에 넣어 조종하려고 했고, 성공할 뻔했던 만큼 주의가 필요한 단체였다.
원래도 요주의 단체였지만 요즘은 더더욱 신경 쓰이긴 했다. 각성자가 제멋대로 활개 치는 지금은 게네시스에게 최적의 상황이니까.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고, 손쉽게 제 동료를 물색해 세력을 늘이기에 딱 적절한 때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지호는 사납게 우희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쪽에 궁금한 게 뭔가요?”
“궁금한 거라, 글쎄.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또 장난인가 싶어서 험악하게 구겨지는 지호의 얼굴을 보고 우희가 미간을 톡톡 쳤다.
“예쁜 얼굴 구겨지는데 인상 찌푸리지 마.”
“장난 좀 그만해요.”
“장난 아닌데. 앞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의 호불호는 꼭 알아둬야 하는 정보 아냐?”
지호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상대에게 혀를 찼다.
“제가 좋아하는 건… 이런 장난을 치지 않는 진지한 태도요.”
지호가 쏘아붙인 말에 우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었다. 몇천 살은 먹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으음, 그건 좀 어렵겠는걸……. 다들 나를 원체 무서워해서 바꾼 태도거든.”
“…….”
“나도 원래는 저 녀석만큼 살벌했단다.”
우희가 이원을 가리켰다. 지호가 슬쩍 이원을 돌아보았으나 부드러운 미소만을 마주했다. 분명 저게 원래 짓고 있던 표정은 아니겠지. 대체 어떤 얼굴이었던 거야……. 쯧, 혀를 차며 지호는 우희를 돌아보았다. 궁금하긴 해도 당장 중요한 건 이원의 문제가 아니다.
“됐고, 다른 거 물어볼 건 없어요?”
“그 외에는 딱히 없는데……. 나중으로 미뤄둘까?”
“그냥 지금 물어보시죠.”
“심각한 걸 물어보진 않을 테니까. 대답의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 가서 대답하기 싫으면 답을 또 미뤄도 되고.”
“…….”
“편하게 생각해, 나는 너를 강제하지 않아. 태용이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지켜 주자는 생각인 것 같으니까. 태용이의 뜻대로 미르도 굴러갈 텐데. 내가 네게 손을 대겠어?”
“그럼 당신은 김태용 헌터와 생각이 다른가요?”
그냥 넘기기는 의미심장한 말에 질문하자, 우희가 입술 끝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웠지만 미소가 드러내는 의미는 확실했다. 긍정. 김태용과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
분명, 미르 길드의 모두가 지호를 지지하는 건 아니라고 했었다. 그 반대파 중의 한 명이 우희였을까. 그가 SSS급 각성자임을 감안하면 몹시 위협적이다.
“뭐하러 굳이 위험을 무릅쓸까? 조금 더 안전하게 있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했었지.”
더없이 무해하고 무고한 사람처럼 부드럽게 속삭인 우희가 이원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화 안 내네?”
“그야 이 놈도 같은 생각이니까 화 안 내겠죠.”
은근슬쩍 찔러보는 우희의 말을 지호가 딱 잘랐다. 시종일관 우희에게 휘말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저희한테 계속 시비 거는 거예요?”
“아니. 꼭 해야 하는 말이지. 이젠 정말로 본론이야.”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로 우희가 씩 웃었다.
“사소한 건 어찌됐든 너를 지켜야 한다는 데는 나도 동의해. 그래서 경고하려고 왔단다.”
“경고?”
“그쪽이 쫓고 있는 조승택이 게네시스와 접촉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으득,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이원이 주먹을 올려둔 테이블이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분노와 달리 이원의 얼굴은 몹시 차가웠다.
“게네시스에 관해서는 그쪽 이방인보다는 우리가 더 잘 알 거야.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을 하려 했어.”
마지막까지 약을 올리며 우희는 여유롭게 말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