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업적(3) (198/283)
  • 29. 업적(3)

    지구로 막 귀환했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지호는 순식간에 정신없이 일에 휘말렸다.

    시스템창이 만인에게 공개된 것부터 시작된 여러 가지 기능의 업데이트는 균열이 발생한 이래 헌터 업계의 최고로 큰 사건이다.

    아주 많은 차원을 뒤져도 이만한 변화는 전례가 없을 것이다. 보통은 기능이 하나씩 개방될 텐데, 지호와 이원이 만들어 낸 특수한 상황 때문에 모든 기능이 단번에 개방된 거니까.

    시스템창의 도입으로 전투 능력이 없어서 능력이 낮게 측정되던 직업군의 등급이 대폭 조정되어, 결과적으로는 상승했다.

    파티 시스템은 기존 던전 공략 방식을 완전히 바꿔 버렸고, 길드 시스템은 이전까지 회사와 거의 유사한 형식이었던 길드의 많은 부분을 다시 세웠다.

    서리의 수작 덕분에 모든 일의 공로자가 된 지호에게 물밀듯 연락이 쏟아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주이원이 유명해질 때보다 더한 관심이 지호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원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 나갔다. 하지만 지호는 하루아침에 전 세계를 뒤집어 버렸다.

    지호가 생각하기에도 일개 개인이 세우기에는 외면할 수 없을 만한 큰 업적이었다. 덕분에 지호는 곧장 SS급으로 승급됐다.

    이제 지호의 등급을 SSS급으로 올리느냐 마느냐를 논의 중이긴 한데, 워낙 타국의 반발이 심해 힘들 것도 같다. 국내에서는 지호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해 속이 터진단 반응이었지만, 지금만으로도 지호는 충분히 만족했다.

    이번 일로 노네임의 명성이 높아지며, 노네임으로 길드 가입 문의가 쇄도 중이었다. 특히 이번에 새로 S급 헌터가 된 채집꾼 구영도의 자발적인 합류는 큰 이득이었다.

    그렇게 급한 일정을 마친 지호는 현재 균열이 발생한 현장에 나와 있었다.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이라고 생각하고 나온 거였지만.

    “음, 길드장님은 그냥… 안 나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참 망설이던 임승주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전에 지호를 현장에서 쫓아내려 애를 쓰던 자신의 전적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에 지호가 신경 쓸 리 없는데도. 지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인파가 몰려서 이건 자칫하면 위험하겠어요. 지나가는 길에 잠깐 지원만 하려던 건데…….”

    “네. 다음부터는 그냥 두십시오. 게다가 여긴 저로도 충분합니다.”

    부끄럽다는 듯 말하는 임승주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이 듬뿍 담겨 있다. 제법 그럴싸한 수호신과 계약한 이후 임승주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물론 그럴 만한 거물과 계약한 것 같긴 한데. 소리가 말하길 ‘좀 재수 없는 상태’라고 할 만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지금의 임승주를 허소리가 봤다면 분명 저 멍청이,라고 욕하며 삿대질했을 짓이다. 잔뜩 신나서 잊은 것 같지만… 지금 임승주는 지호의 호위를 위해 함께 외출한 참이니까.

    호위가 꼭 필요하진 않았지만 임승주가 힘에 취해 본분을 잊어서야 곤란했다. 아무리 몬스터를 상대하고 싶어서 두 손 근질근질하다고 해도 그렇지, 여기 대기 중인 길드가 없는 것도 아닌데…….

    물론 그 길드가 등급 가늠을 제대로 못 하고 헌터를 보내 밀리고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긴 했지만 너무 흥분했다.

    “임승주 헌터.”

    “네?”

    “물러나서 나중에 뒷정리하세요.”

    “네?”

    지호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수호의 창.]

    가볍게 읊은 스킬의 시동어와 함께 마른하늘에서 새파란 번개가 내리친다. 바닥을 내리찍은 번개는 모든 것을 태울 만큼 위협적으로 보였으나… 정작 지상에 원래 있던 것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오직 몬스터에게만 해를 끼쳤을 뿐.

    “아.”

    제법 오랫동안 지호를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임승주가 흥분해 취해 깜박했지만, 몬스터를 상대로라면 지호가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는 없었다.

    균열 처리가 까다로운 건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다. 주변을 부수지 않고 몬스터만 죽이는 게 어려운 거지.

    그런 의미에서 지구와 지구의 관리자인 신지호에게 적의를 품은 상대만 공격하는 [수호의 창]은 몹시 효율적이었다. 균열 처리에 관해서는 지호를 넘볼 자가 더 이상 없을 정도로.

    다만…….

    “우와아아아!”

    요란하게 환호하는 소리며 높이 치켜든 스마트폰의 카메라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지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손으로 문지르며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돌렸다.

    다소 부끄럽긴 해도 사람들이 안심하고 잔뜩 몰려든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다. [안정화]를 켜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이후 안정된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사실 모든 게 좋은 쪽으로만 굴러간 건 아니었다.

    각성자의 전력이 보강된 건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힘을 악용하려는 사람도 그만큼 생겨났다. 특히 계약한 수호신과의 합이 안 좋은 쪽으로 맞아떨어지면 재앙이었다. 수호신과의 계약 여부는 [감정] 스킬로도 확인할 수 없으니 더더욱.

    지호야 관리자의 특권인지 어떤 수호신과 계약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계약이라는 게 한순간에도 이루어지다 보니 조금 전까지 안전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때문에 최근 수호신과 계약한 각성자의 범죄가 헌터 협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당장은 이득이 커서 사람들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피해에 눈을 돌리게 될 테니.

    지호는 그런 범죄와 관련해서, 오늘 헌터 협회의 의뢰로 협회 본부에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럼 임승주 헌터. 정리하고 이만 물러날…….”

    임승주에게 건넨 말이 주변에 몰린 사람들의 환호에 묻혔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지만, 그 행동을 예측한 녀석이 허리를 끌어안는 게 먼저였다.

    “야.”

    지호의 뾰족한 목소리를 즐기듯 이원이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하지 말라고 하기도 전에 부드러운 입술이 뺨에 쪽 닿는다.

    미친 새끼가 이젠 보는 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도 익숙해져서 지호 역시 기겁하던 전과 달리 그러려니 하게 됐다. 분명 이 장면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혀 여기저기에 퍼다 날라지겠지……. 그래, 입술도 아니고 뺨인 게 어딘가.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물론 포기한다고 해서 이원의 행동이 곱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지호는 매번 소란을 피우는 이원을 뿌리친 채 자리를 피했다. 그 뒤를 졸졸 따르는 걸 보고 환호성이 커진 건 착각이라고 믿고 싶다.

    차에 올라탄 지호를 자연스레 따라온 이원이 옆좌석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임승주의 자리를 뺏은 이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 낯이었다.

    “너 안 바쁘냐?”

    “지호보다는 한가할걸.”

    “…….”

    사실 요즘의 이원은 정말로 바쁘지 않았다. 뻔질나게 해외 출장을 다니던 이원의 일정이 대부분 무산됐으니까. 길드 경험치를 올려야 한다는 걸 알자마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원을 부르던 대부분의 길드가 일정을 취소했다.

    길드 공략 자체가 길드의 자산이 된 만큼 이제 어지간하면 스스로 해결하려 들 것이다. 이원의 잦은 해외 출장도 빈도가 확 줄어들겠지.

    지호와 눈이 마주친 이원이 불쌍한 척 눈을 깜박였다.

    “이제 나 백수 되면 자기가 먹여 살려 줄 거야?”

    “백수는 무슨…….”

    애초에 해외 출장 건은 이원의 부가 수입일 뿐. 여전히 청람은 소유한 던전이 가장 많은 길드였다. 게다가 최근 인벤토리 아이템 관련 사업을 정리하고 다른 쪽 사업을 확장한 탓에, 길드의 수익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차가 출발하고, 이원은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새빨개진 귀를 문질렀다. 지호가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하자 이원이 낮게 웃었다.

    “오늘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안정화] 스킬을 켠 이후, 한동안은 어지러웠지만 이젠 정신을 차렸다. 다 알면서도 하루에 몇 번이고 끈질기게 묻고 나서야 이원은 안심했다.

    “다행이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응.”

    “자기 무리시키는 놈들은 내가 다 죽일 테니까.”

    말은 잘한다, 이전 세계에서 자기가 신나서 지호를 굴리며 단련시켜 놓고. 지호는 직접 쏘아붙이는 대신 말을 아꼈다. 어느새 헌터 협회가 가까워졌다.

    그래도 작년 말에는 협회에 오는 게 덜 부담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주목받게 된 이래, 더더욱 부담스러워졌다. 이전처럼 단순한 호기심을 보이는 게 아니라 청탁을 하려 드니까.

    게다가 그 청탁의 방향이 썩 좋지 않았다. 지호에게 돈이나 권력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지호를 꼬시기 위해 사람을 들이밀었으니.

    덕분에 요 며칠간 본의 아니게 스캔들이 몇 번 터졌다. 난데없는 스캔들도 황당하지만, 그럴 때마다 은근슬쩍 찔러보는 사람도 골치였다.

    “…….”

    물론 이원이 생글생글 뒤에서 웃고 있으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오다가도 무슨 맹수라도 본 것처럼 피하는데… 지호가 돌아볼 때의 이원은 항상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이라, 대체 왜 저리 기를 쓰고 피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