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계의 종착지(4)
크사냑의 몸통 박치기!
효과는 굉장했다!
바닥에서 목이 한껏 꺾어 위를 쳐다봐야만 꼭대기가 보일 만큼 높은 탑이었다. 그 거대한 탑이 상대적으로 작은 크사냑의 공격에 수수깡처럼 꺾였다. 단순히 맨몸으로 부딪쳤다기에는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부러져도 형체를 유지하는 수수깡과 달리 벽돌로 쌓인 탑은 꺾인 부분부터 무너졌다.
쿠르르르릉!
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요란했다. 지호가 귀를 막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굉음은 간신히 끝이 났다.
다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다 무너진 탑의 잔해는 모래로 변해 사방으로 흩날렸다. 몬스터가 이런 식으로 분해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크기 때문에 모래 폭풍처럼 모래가 튀는 건… 확실히 드문 경험이었다.
크사냑이 지호를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더니 제 몸을 둥글게 휘어 그 안쪽에 띄워 둔 후, 대신 모래 폭풍을 맞았다.
모래 폭풍이라고 해 봤자 모래나 잔 먼지를 뒤집어쓸 뿐 위협적인 건 아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부드러운 빛을 띤 크사냑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크사냑의 눈은 지호만을 보는 게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을 좇는 눈이다. 자연스레 크사냑이 이원을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쭉, 크사냑은 이런 식으로 주이원을 지켜보며 아껴 주고 있었을까. 지호는 얌전히 크사냑의 황금빛 몸체에 몸을 기댔다. 모래 폭풍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미세한 먼지조차 사라진 이후에야 크사냑은 지호를 다시 등 위에 올려 주었다.
“음, 별일 없이 쓰러트려서 다행이네요.”
[지호 님 덕분입니다.]
“제가 뭘요. 크사냑이 다 한 건데.”
[조금 전 쓴 스킬은 주변을 물과 동화시켜 제 육체를 강화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물의 기운을 지닌 스킬이니… 위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습니다. 단순히 부딪친 정도로 끝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만…….]
“와.”
그럼 아까 그건 정말 단순한 몸통 박치기였다는 건가? 적어도 움직임 자체에 따로 스킬이 걸린 줄 알았는데.
[조금 전 쓰러트린 것은 최소 SS급입니다. 물론 제 스킬도 자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던전이라고 해도 SS급 몬스터는 희귀합니다. 기껏해야 한둘 정도 더 보겠지요.]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게다가 수속성 스킬을 지닌 건 크사냑 혼자가 아니니… 이 정도면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해 볼 만했다.
[그럼 아이템을 회수하고 계속 가시죠.]
크사냑의 말에 지호는 몬스터가 쓰러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내부에 아이템을 수납해 두기라도 했던 걸까. 아이템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이템 무더기가 지호의 키를 조금 웃돌았다.
대던전이라고 하더니 아이템의 규모마저 어마어마하다. 좋은 아이템은 물론이고 식량이나 포션까지. 만약 던전 공략이 길어지더라도 충분히 식생활을 뒷받침할 만큼의 소득이었다.
* * *
아이템을 수거하고 다시 출발한 길.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요란하게 전투 중인 새카만 흑룡을 발견했다. 새파란 벼락이 아래로 내리꽂히자 적은 새카만 숯처럼 변해 쓰러진다. 적을 쓰러트린 흑룡은 곧장 이곳으로 부리나케 날아왔다.
[지호 님!]
반가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태용의 몸체가 빛을 내며 줄어들었다.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으나 빛 때문에 맨몸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허공에서 생겨난 천과 장신구가 자연스레 태용의 몸을 감싼다. 풀어 헤쳐진 머리가 높이 하나로 묶여 마무리되는 것을 끝으로, 태용의 발이 사뿐히 크사냑의 몸 위에 착지했다.
마법 소녀 변신물 같다.
아니, 그냥 그거다. 물론 김태용의 경우에는 마법 소년이겠지만.
지호는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애송이.”
“……아, 안녕하십니까.”
암호인 걸 아는데도 태용이 흠칫했다. 나이만 많지 좀 귀엽긴 한 것 같은데.
크사냑이 천천히 몸을 아래로 내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크사냑은 김태용처럼 화려한 모션은 없었다. 내심 실망하는 사이, 익숙한 마력이 가까이 다가왔다.
지호는 주인을 다시 만난 강아지처럼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지호가 본 건 전에 없이 싸늘한 얼굴을 한 주이원이었다. 천천히 다가온 이원은 지호에게 낮게 속삭였다.
“실망이야, 신지호. 이제 꼴도 보기 싫어.”
“…….”
분명 암호문인데, 저렇게 차가운 얼굴로 말하니… 괜히 심장이 덜컥거렸다. 어색하게 굳은 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이걸로 하자고 한 건 자기인데 놀라면 어떡해.”
“……그런 표정으로 하자고 한 적은 없으실 텐데, 이원 님이 놀린 거잖습니까?”
크사냑은 좋아하는 상대를 괜히 괴롭히는 어린애를 보듯 이원에게 눈을 흘겼다. 이원은 크사냑의 구박은 신경 쓰지 않고 지호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지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놀랐어?”
“아니, 별로.”
지호는 태연한 척 고개를 저었다. 이원이 대뜸 냉정한 말을 해서 놀란 것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원을 피한 건 아니다.
이원을 좋아하지 않을 때조차 그 존재를 자연스럽게 여기던 지호다. 하지만 지금은 낯선 사람을 대하듯 화들짝 놀랐다.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 멀어진 거리가 어색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이원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이원은 이유를 묻는 대신 히죽 웃으며 지호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오랜만에 지호의 발발 떠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변태야? 아니, 난 너한테 발발 떤 적 없거든?”
“있어. 기억은 안 나겠지만 도저히 그 큰 건 안 된다면서, 음.”
중간에 크사냑에게 한 대 얻어맞은 이원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지호는 영문 모를 목소리에 상대해 줄 여유가 없었다.
“조금 열이 나는데, 좀 쉬어 가도 될까요?”
어지간해서는 먼저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신지호다. 곧장 다른 세 명이 그러자며 동의했다. 특히 이원은 언제 장난쳤냐는 듯 심각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쉬자. 지호는 잠깐 쉬고, 크사냑, 넌 지호 먹을 거라도 요리해. 아까 얻은 아이템 중에 쓸 만한 거 있나 분류 좀 하고.”
“알겠습니다.”
결정이 나자마자 빠르게 캠프가 지어졌다. 이플리스의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만들어 낸 아이템 중 하나였다. 간단하게 설치가 가능한 건 물론, 작고 초라해 보이는 외부와 달리 안쪽은 호화롭고 넓은 주거용 아이템.
이플리스에서도 몇 번 써 본 적이 있어서 지호는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대충 몸을 씻어 내고 흐물거리는 몸을 대충 가운으로 두른 지호가 욕실의 문을 열자 이원이 심각한 얼굴로 지키고 서 있었다.
지호는 이원을 무시하고 곧장 침대로 향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침대로 다가온 이원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지호를 흔들었다.
“자기야. 열이 난다고 그렇게 찬 물로 씻으면 어떡해? 잠깐 이불 좀 걷어 봐.”
“싫어. 추워…….”
“추우면 내가 맨살로 꼭 안아 주는 게 더 도움 될걸?”
미친 소리 하고 있다. 지호는 이불 속에 뜬 시스템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스템 관리
상태이상 발생!
애욕: 호감도가 일정 이상으로 높은 상대를 만났을 때, 육체가 상대를 원하도록 반응한다. 상대의 신체 일부를 섭취하면 나챠 아포트의 알을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