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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계의 종착지(3) (192/283)
  • 28. 세계의 종착지(3)

    이원의 배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린다. 지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원을 노려보다가 발로 걷어찼다. 충격을 받은 이원이 비틀거렸다.

    “지, 호야…….”

    “짜증 나니까 그만하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지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이원이 씩 웃었다.

    “음, 어디서 들켰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주이원이랑 안 똑같아.”

    주이원은, 아니 ‘주이원을 닮은 것’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지호는 검을 꽉 쥐었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주이원을 닮은 걸 베어 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구나, 아쉽네…….”

    몬스터는 가볍게 웃더니 이내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다. 몬스터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이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지호는 혀를 차며 떨어진 아이템을 주워들었다.

    “기분 나쁘게 굴고 있어…….”

    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주이원이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홀라당 넘어갈 뻔하긴 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마력의 느낌조차 어느 정도 비슷했으니까.

    혹시나 그런 류의 몬스터에게 현혹될까 봐 암호를 정해 둔 게 다행이었다. 이원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로 지정했으니.

    “후우…….”

    지호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몬스터는 이미 사라졌는데도 묘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느낌이다. 지호는 잔뜩 경계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잔뜩 각오하고 온 덕인지 딱, 예상한 만큼 할 만했다. 쉬운 구역에 떨어진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구역도 아닌 듯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지.

    한 걸음 발을 옮겼을 뿐인데 갑자기 나타난 용암지대나 바닥에서 솟아오른 몬스터 따위는 꽤 난관이었다. 슬슬 제 힘으로만 사냥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을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고래가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의 몸체. 유유히 하늘을 떠다니는 고래의 꼬리가 지나간 곳을 따라 황금빛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다가 점점 거품처럼 사라진다.

    인간보다 수십 배나 큰 고래가 유유히 지호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다. 크사냑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오셨습니까, 폐하.]

    “암호라고 해도 적응이 안 되네요…….”

    크사냑은 침묵했으나 희미한 떨림으로 봐서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크사냑에게만 희미한 떨림일 뿐… 지호는 거대한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느껴졌다. 몸 전체가 진동하는 스마트폰처럼 한참이나 떨린 후에야 크사냑이 실례했다며 사과를 건넸다. 진정한 크사냑이 얌전히 몸을 바닥에 댔다.

    지호는 조금 망설이다가 크사냑의 등 뒤로 훌쩍 뛰었다. 지호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자 크사냑은 훌쩍 날아올랐다. 잡을 게 없어서 긴장했는데 흔들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원 님께서 가장 먼저 찾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셨는데, 질투하시겠군요.]

    “날아다니는 쪽을 이기긴 힘들겠죠.”

    [그렇지요. 저는 꽤 괜찮은 탈것이지요?]

    “네? 아니, 탈것이라뇨. 제가 잠시 신세 진 건데 그런 생각은…….”

    [아, 물론 지호 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시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원 님께서는 제 가장 큰 장점이 승차감이라고 하셨습니다.]

    “…….”

    주이원 이 새끼,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지호는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제가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게요.”

    [아닙니다. 저는 이원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게 좋습니다.]

    “…….”

    조금 이상한 취향인가. 지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유유히 날던 크사냑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이플리스에서는 그리 편하게 대하는 상대가 저뿐이셨습니다. 이곳에 와서 다행이지요.]

    머릿속에 대고 직접 말하고 있어서 그런가… 크사냑의 감정이 지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심으로 이원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지호는 크사냑의 금빛 거대한 몸체를 내려다보다가 속삭였다. 그에게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작게.

    “크사냑은 그런 생각 안 하나요? 세테르처럼…….”

    [하지 않습니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크사냑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찌나 단호했던지, 그 목소리에서는… 세테르를 향한 분노마저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래전부터 제 소망은 이플리스의 번영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이 행복하시기만을 바랍니다.]

    “왜 그렇게까지 주이원을 아끼시는 거예요?”

    얼결에 툭 튀어나온 말은 실수였다. 게다가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지 않았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말이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평소 지호는 질투라는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이원을 이기고 싶어 했지만 호승심에 가까웠다. 스스로가 치졸하게 느껴지는 이 감정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주제넘게도 제가 가족도 없이 그분만을 모시며 지내온지라, 가깝게 여겨지나 봅니다.]

    “주제넘다뇨. 저는 그냥…….”

    [연인 간에 더 가까운 사이를 질투하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연인 아닌데요.”

    정색하며 말했지만 크사냑은 그다지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지호는 어차피 귀담아듣지 않을 법한 크사냑에게 끝까지 주장하는 걸 포기하고, 대신 그가 조금 전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럼 크사냑은… 주이원이랑 가족같이 지낸 건가요?”

    [음… 이건 비밀입니다만. 사실 저는… 그분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제 일방적인 감정이지만… 그분을 지금에 비하면 한참 어리실 적부터 돌봐 와서 그런지. 그럴 필요는 없고, 제게 가능한 게 아닌데도… 최대한 그분을 지켜 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크사냑의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호도 자주 느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던,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

    두 사람은 무려 네 자리가 될 만큼의 시간을 함께 지내왔다. 그만 한 마음과 신뢰가 쌓인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아빠 같은 마음이라는 거죠?”

    [주제넘게도 그렇습니다. 이원 님께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그런데 주이원, 뭐 약점 없어요?”

    [네?]

    “거기서 쭉 봐 오셨다면서요. 좀 쪽팔리는 일이라든가, 뭐 없어요?”

    [음. 지호 님께 쓴 편지가 제법 있을 텐데…….]

    “편지요?”

    [새벽에 지호 님이 뵙고 싶을 때 적어 두신 편지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새벽은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하는 시간이라…….]

    “…….”

    주이원이 감성에 듬뿍 취한 새벽에 작성한 편지라. 듣기만 해도 궁금하다. 문제는 이미 이플리스에서 떠나왔다는 거지만.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마법 연습을 하다가 실수해서 폭발하는 바람에 지붕과 함께 날아가신 적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방어 마법 덕에 다치지는 않으셨으니 괜찮습니다. 그냥 맑은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셨을 뿐…….]

    “푸핫.”

    결국 웃음이 터졌다.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주이원이라니…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전혀 상상도 안 간다.

    [검술 연습하다가 얻어맞기 싫다고 도망치신 적도 있고.]

    “그래 놓고 날 그렇게 굴렸다는 거예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도망치신 곳에서 불쌍하게 주무시고 계셔서 넘어가 드렸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화에 연신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이원을 보면 상상도 안 되는 소리다. 하긴, 지금의 이원이야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 연륜이 쌓였을 뿐. 막 그곳에 갔을 때는 지호와 비슷한 나이였을 테니까, 아직 서투르고 그만큼 힘든 일도 많았겠지.

    마냥 우습기보다는 안쓰럽기도 하고. 그 곁에 자신이 있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기도 했다.

    [지호 님.]

    “네?”

    [새삼스럽지만 이원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할 말인데요.”

    간곡하게 말하는 크사냑을 보며, 순간 느꼈던 질투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이원을 지탱해 준 소중한 사람에게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지호가 뭔가를 더 말하려던 순간, 근처에서 제법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강력한 마력이다.

    [조심하십시오.]

    크사냑의 충고를 들으며 지호는 몸을 한껏 낮춘 채 집중했다. 지금 당장 지호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렇게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크사냑은 지호의 [수속성 강화] 스킬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대체 어디에 몬스터가 있는 거지. 정신을 잔뜩 집중한 채 주변을 돌아보던 순간…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크사냑은 빠르게 날아올라 거대한 공격을 피했다.

    “뭐, 뭐야, 저게.”

    지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을 공격했던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걸 몬스터로 불러도 괜찮을까?

    눈에 보이는 건 4, 50층은 될 것처럼 까마득한 높이의 거대한 탑이었다. 온통 시커먼 색의 탑에서는 검은 연기가 희미하게 일렁거리다가 사라진다. 얼핏 보아서는 건축물로밖에 안 보인다.

    “골렘 같은 건가?”

    [네. 여러 개의 골렘이 합쳐진 형태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크기지만…….]

    “아니, 초반부터 너무 센 놈이 나온 거 아니에요?”

    심상치 않은 마력은 물론이고 크기 자체만으로도 지나치게 위협적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호 님이 계시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크사냑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적을 앞두고도 오히려 이쪽을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정을 준다. 이플리스에 막 떨어진 이원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곧, 크사냑이 스킬을 사용했다. 황금빛 몸체 위로 은은한 푸른빛이 맴돈다. 그와 동시에 주변 역시도 새파랗게 빛났다. 온갖 것이 뒤섞인 세상이 한순간이나마 짙푸른 빛 아래 하나로 엮인다.

    크사냑은 이 공간에 바다를 불러 왔다.

    물이 차 있는 건 아니다. 바다 특유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곳이 바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일렁이는 새파란 빛. 태초의 생명을 품은 거대한 물의 요람.

    바다가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린다. 격렬한 해류에 떠밀려 견고한 탑이 흔들거린다.

    그리고 크사냑은 곧장 탑 쪽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뭔가 더 엄청난 스킬이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쾅!

    크사냑은 탑에 냅다 몸을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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