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계의 종착지(2)
지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의 환청은 단번에 잊힐 정도로 강렬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짧은 단어나 문장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지호가 딛고 선 땅은 딱딱한 암석 위였다. 하지만 몇 걸음 더 가면 보드라운 풀이 자라나 있었고, 거기서 몇 걸음을 더 가면 하얀 눈이 녹아 지저분하게 더러워진 채였다.
이상한 건 바닥뿐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자라난 식물은 기묘하게 뒤틀려 자라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의 식물인데도 부분 부분 전혀 다른 계절을 지나쳐, 왼쪽은 열매를 맺었는데 오른쪽은 메말라 붙은 식이었다.
이 던전은 여러 가지를 잔뜩 쏟아붓고 휘저은 것처럼 엉망진창이다.
모든 세계의 종착역.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어마어마한 죽음으로부터 파생된 원한이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지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것 같은 지옥에서 그가 기댈 만한 이는 보이지 않았다.
“…….”
미리 경고했던 그대로이긴 하지만… 혹시 몰라서 지호는 마력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찾을 수 있기는커녕 구역질만 몰려 왔다. 지호는 먼 곳까지 찾아보려던 것을 포기했다.
대던전은 동시에 들어가더라도 다른 던전처럼 같은 곳으로 보내 주지 않는다. 그나마 아예 다른 영역으로 보내는 건 아니라 걸어서 찾을 수 있는 범위 내에 떨어진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다른 세 사람은 무사할 것이다. 사실 그들 중 가장 약한 건 지호였으니 걱정할 처지가 못 되기도 하고……. 어쨌든 몇 시간 동안은 혼자 살아남아야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괜찮아.”
지호는 자신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대던전은 전체가 아닌 일부만 공략하기에 어디로 진입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진다. 물론 비교적 쉬운 영역에 떨어진다고 해도 일반적인 던전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다만 대부분의 던전이 그렇듯 대던전 또한 보스 몬스터가 자리한 중심부보단 처음 떨어지는 외곽 쪽이 한산하고 몬스터 또한 약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지호는 속이 울렁거리지 않을 만큼만 주변을 마력으로 탐색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풍경이 계속해서 바뀌는 와중, 가끔 보이는 문명의 흔적을 볼 때마다 기분이 씁쓸해졌다. 지호는 대던전에 대해 정보를 얻고 들어왔지만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략하지 않으면 출구조차 없는 이곳에서 속절없이 죽어 나갔겠지.
이미 죽은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세상의 사람들은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세이크리스 해방군을 이끌며 이곳 사람들에게도 어지간히 정이 들었으니까.
“…….”
편안한 표정을 짓던 지호의 얼굴이 갑작스레 굳었다.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이동하던 지호는 멀리 발을 내딛어 멀리 훌쩍 뛰면서 검을 휘둘렀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다. 그러나 허공을 갈라야 했을 검은 중간에 먹힌다. 확실하게 상대를 인지한 순간, 풍경과 완전히 동화되어 보이지 않던 몬스터가 형체를 드러냈다.
─ 그륵…….
기괴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몸을 비틀었다. 지호가 뻗은 검은 몬스터의 단단한 뼈와 살에 막혔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몬스터가 지호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호는 입 안으로 스킬을 외웠다.
[클라우 솔라스.]
몬스터를 노리던 방주의 보검에 흰빛이 서린다. 검이 곧장 몬스터를 반 토막 냈다.
지호는 몬스터를 걷어차 그대로 밟고는, 곧장 다시 앞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이 닿은 곳은 몬스터의 팔이었다.
네 발을 짚고 선 몬스터는 뭉개진 젤리와 시럽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질감이었다. 물론 젤리와 달리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완성된 몸에 대충 박아 넣어 둔 것처럼 툭 튀어 나온 눈이 360도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지호를 눈에 담았다.
지호는 몸을 낮춰 몬스터의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툭 튀어 나온 눈이 느리게 굴러갔다. 한 발 느린 반응. 그러나 공격이 확실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한 순간, 검은 무딘 날처럼 몬스터의 위에서 미끄러졌다.
손목을 꺾어 몬스터에게 날을 세우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날붙이 자체가 들지 않는 몸이다. 그나마 [클라우 솔라스]의 흰 빛에는 피해를 입는 것 같지만 그 또한 미미하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다. 지호가 일단 물러나려던 순간.
얼핏 인간을 닮은 사족보행의 몬스터가 머리가 정수리부터 목까지 일직선으로 쫙 벌어졌다.
머리에 이목구비의 형태를 한 게 따로 있어서 머리 자체가 벌어져 입이 나올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꾸덕꾸덕한 액체와 함께 기다란 촉수가 쏟아져 나왔다.
단번에 십여 개씩 다가온 촉수를 모두 막을 순 없었다. 지호가 앞으로 다가온 촉수를 잘라 내며 급히 몸을 물렸지만, 촉수 하나가 발목을 낚아챘다.
“아!”
깜짝 놀라 지호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몬스터가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올렸기 때문에.
균형을 잃은 지호가 휘청거리는 사이, 몬스터의 촉수가 지호의 몸을 휘감았다. 입은 옷이 부식되며 가루처럼 바스락거린다.
한 번 자세를 내어주니 속수무책이었다. 몬스터는 뭐가 위협적인지 잘 아는 듯, 지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아 고정했다. 몬스터에게 닿은 피부가 녹을 듯 화끈거렸다.
‘자기는 아직 경험이 적어서 돌발 상황에 약하네.’
얄밉게 충고하는 소리가 기억 속에서 따라붙었다. 이를 악문 지호를 [클라우 솔라스]를 최대 출력으로 사용했다. 전설 속의 힘은 검에게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강렬한 흰 빛을 터트렸다.
순간 시야가 멀 정도로 강한 빛. 시야를 가린 지호는 길어졌던 보검을 단검의 크기로 줄여서 몬스터에게 던졌다.
비교적 가벼워진 단검은 지호의 의지대로 날아갔다. 쫙 벌어진 몬스터의 입 안쪽으로.
시각 반응이 느린 놈은 환한 빛까지 터지자 단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무방비한 입 안으로 쏙 들어간 단검에서 다시 한번 빛이 터졌다.
쾅!
아무리 겉이 단단하다 해도 속은 약했다. 폭발음과 함께 신체 내부를 공격당한 몬스터는 절명했다. 동시에 지호의 몸을 휘감은 촉수 또한 말라비틀어지면서 힘을 잃는다.
바닥으로 추락하며 지호는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여분의 검을 뽑아, 무게를 실어 발 아래로 찍어 눌렀다.
그러자 조금 전 죽은 몬스터 대신 지호를 먹어 치울 생각에 설레고 있던 다른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은 지호가 자신을 공격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확실히 지호의 검은 놈을 꿰뚫지 못했다. 피부는 갈랐으나 평범한 검으로는 놈의 뼈에 티끌만 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설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한 건가? 지호는 여분의 검에 [클라우 솔라스]를 사용했다. 그러자 빛의 가호가 담긴 검은 두부처럼 몬스터를 잘라 내고, 이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데도 몬스터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불길한 느낌에 지호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쪽 난 몬스터가 폭발했다. 휘말렸다가는 절대 무사할 수 없을 최후의 일격이지만…….
“음.”
지호의 손에서 일회용 아이템이 빛을 발하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만약을 대비해 일회용 아이템이나 포션은 듬뿍 챙겨왔다. 챙겨오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아껴 써야겠지만.
다 쓴 아이템을 던져버린 지호는 조금 전에 죽은 몬스터의 잔해에서 방주의 보검을 수거하고, 몬스터가 죽으면서 떨어트린 마석도 주웠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쉬웠다. 미리 대던전에 대해 경고를 듣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지만.
대던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여러 차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대던전에 속한 몬스터들은 차원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틈새로 숨어들어 위장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온갖 마력이 잡탕으로 뒤섞인 이곳에서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지 않으면 습격당할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 준 덕에 예방할 수 있었다.
물론 싸우는 중에 다소 부상을 입긴 했지만. 지호는 일부가 녹아내린 상의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시스템창을 열어보았다.
status
이름 | 신지호 |
직업 | 세이크리스의 기사 |
등급 | S? |
칭호 | 지구의 첫 번째 ■?, 지구의 첫 번째 각성자, 이세계 왕의 구원자, 세이크리스 신화의 주인공, 칭송받는 자, 바랄의 재앙을 처치한 자, 일격에 아우르를 쓰러트린 자, 심해 마궁의 공략자, 광휘의 검성, 세기의 커플 (더 보기) |
체력 | 2103 |
마력 | 55213 |
근력 | 1001 |
민첩 | 1409 |
스킬 | [OFF]안정화(EX), 별의 축언(EX), 최초의 세례(S?), 흡인의 천구(SSS), 수속성 강화(SSS), 닻별의 인도(SS), 이해(S), 성자를 위한 장송곡(S), 바다의 안식(A), 신체 강화(A), 검술(B), 마법 저항(B), 클라우 솔라스(C), 이플리스의 수호(EX) |
인벤토리 | (2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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