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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비(7) (189/283)
  • 27. 대비(7)

    잠시 후, 방으로 찾아온 크사냑과 김태용에게서 이원과 지호가 사라진 후, 현재 지구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차원이 열리는 순간 많은 수의 각성자들이 알아차렸고, 이유를 찾기 위해 제법 소란스러워졌다는 것.

    둘째, 지구에서는 아직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

    셋째, 대외적으로 주이원과 신지호의 실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소수의 길드 관계자만이 알고 있다는 것.

    넷째, 이플리스에서 두 사람의 실종에 관해 연락을 해 왔다는 것.

    다섯째, 소수의 관계자 중 차원 이동에 관해 아는 사람끼리 두 사람을 찾는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는 것.

    돌아가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귀중한 정보를 두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전력 보강만큼이나 귀중한 정보였다.

    시간이 지구와 똑같이, 혹은 더 빠르게 흘렀더라면… 몇 달이나 사라진 지호를 찾으며 주변이 얼마나 난리가 났을지. 특히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지… 너무 뻔히 보이니까.

    청람 부길드장인 누나는 실종에 대해 아는 듯 하지만. 일단 누나가 섣불리 부모님께 말씀드리진 않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는 것만이 남았다.

    “차원 이동을 위해 크사냑 님과 접촉했습니다. 크사냑 님께 차원 이동에 필요한 마력을 제공하는 한편, 세테르 님이 괜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조건으로 저희 쪽 동행 한 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지호 님과 아는 사이인 제가 함께 오게 된 것입니다.”

    “세테르는 일단… 지구의 SSS급 각성자들이 쫓고 있으니 당장은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 외에 폐하를 추격할 만한 자들은 없으니… 지구에서의 위협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대던전만 해결하면 귀환이군.”

    부연 설명을 마치고 대꾸하는 크사냑의 얼굴은 영 심란해 보였다.

    “대던전을 넷이서 공략한다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우린 셋이서 공략했잖아?”

    태평하게 말하는 이원을 크사냑이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원에게 충성적이던 크사냑의 눈빛이 영 곱지 않았다. 상대가 이원만 아니었다면 주먹이라도 날아갔을 기세다.

    이원이 다른 사람과 의견 차이를 보일 때는… 대부분 이원 쪽이 틀렸다. 지호는 걱정 많은 크사냑을 보며 다소 불안해졌다.

    “그, 대던전이… 많이 어려운가요? 그러니까, SS급이 있어도?”

    “네. 폐하가 안 계셨다면 저희도 결코 무사히 공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대던전을 공략한다는 건 대던전 전체를 공략하는 게 아니라 일부의 공략을 뜻합니다. 어느 구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니…….”

    “운이 좋으면 쉬운 곳에 떨어질 수도 있단 거지.”

    “저희가 공략했던 곳보다 어려운 곳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확률은 낮을걸? 게다가… 너무 최악의 상황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도 알잖아? 나는 악운에 강한 편이니까.”

    씩 웃으며 가볍게 건넨 이원의 말에 크사냑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소 어두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플리스의 이원은 행운보다는 그나마 악운에 강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 왔던 걸까. 이원의 불행한 과거를 듣게 된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크사냑이 지호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이원의 과거를 잘 알고 있다는 게 묘하게 기분 나빴다.

    ‘아니, 별걸 다.’

    계속 함께하지 못했으니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지호는 내색하지 않고 제 안의 시커먼 마음을 털어 냈다.

    지금 당장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지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이원은 그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사람도 잘 골라왔네. 김태용 헌터도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지호가 가진 [수속성 강화]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구성이거든.”

    “아, 확실히 그런 장점이 존재하는군요. 괜찮은 선택 같습니다!”

    지금까지 바짝 긴장해 있던 김태용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당시에 B급 수준이었던 이원의 마법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졌던 걸 생각하면… SS급인 두 사람은 훨씬 더 강해질 게 분명했다. 다 회복된 상태의 주이원만큼은 아니라도, 엄청난 전력이 될 건 분명한 상황.

    “그렇군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겠군요.”

    크사냑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이전보다는 조금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보다 무치스가 쳐들어온 이유는 혹시 들으셨나요?”

    “아, 이곳이 균열의 피해를 받지 않는 걸 보고… 뭔가 대단한 아이템을 획득했다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걸 약탈하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 눈을 반짝이며 작전을 이야기하던 김태용의 눈빛에 분노가 차올랐다.

    “천인공노할 악인들입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진짜 나쁜 놈인 주이원이 동조했다. 평소 이원을 꺼리던 태용이 이번만은 격렬히 동조했다.

    “네. 같이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하지는 못할망정, 약자를 수탈하며 본인의 이득만을 취하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던전이 나오기 전에 청소부터 하고 갈까?”

    정의로운 말을 하면서 주이원은 정말 악당처럼 씩 웃었다.

    * * *

    굳건했던 도시가 침략당하고, 도시의 수뇌부가 침략자에게 무릎 꿇는 데는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이 괴물들…….”

    “제, 제발 목숨만은!”

    지호는 사방에서 울리는 처절한 비명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야, 이 비명을 지르는 놈들은 지금까지 이 도시의 왕처럼 군림하며 비각성자를 착취하던 놈들이니까. 놈들이 흘린 무고한 피를 생각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도시를 지배하던 각성자들이 얻어맞을수록 핍박받던 자들의 얼굴에는 환호가 넘실거린다.

    이곳, 엘사르바는 무치스에 이어 열다섯 번째로 해방되는 도시였다.

    처음 무치스에 쳐들어갈 때만 해도 열다섯 개의 도시에 처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처음 해방시킨 도시, 무치스로 향할 때 단 네 명이서 출발할 때와 달리… 지금은 이쪽도 제법 그럴싸한 군대를 조직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군대는 무치스를 해방하는 과정에서 구출한 세이크리스 왕국 출신의 각성자를 한데 모으면서 조직되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이크리스 해방군’은 여러 도시를 순회할 때마다 동조하는 이들로 수를 불렸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되도록 각성자는 죽이지 않고 제압하되, 크사냑이 인벤토리에 갖고 있던(왜 그런 걸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성자 제어구를 목에 채워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세이크리스 해방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지나온 도시마다 그곳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두었다.

    은둔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온 각성자도 꽤 많아서, 덕분에 지금은 넷이 함께 대던전에 들어가더라도 어지간한 균열을 막을 만큼 전력이 모였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각성자마저 무릎을 꿇었다. 아군의 피가 거의 흐르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에 세이크리스 해방군이 으레 그러하듯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세이크리스의 해방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제각기 지르는 함성이 해방군을 시작으로 도시 전체로 번져 나간다.

    다 좋다. 다 좋은데…….

    “신지호! 신지호! 신지호!”

    그 외침 중에 지호를 목놓아 부르는 것만은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사기 증진’이라는 명목 하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주고는 있지만, 억지로 끌어 올린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 ‘세이크리스 해방군’을 이끄는 건 신지호였다. 처음 무치스를 공격하며 대장을 맡게 됐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야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세이크리스 해방군’이 도시 세 개를 칠 쯤에서야 지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아무리 멸망해가는 세계에서도 소문은 느릿하게나마 전해진다. 세 번째 도시에서는 세이크리스 해방군과 신지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을 영웅처럼 대우했다.

    이제는 이 세계 전체가 세이크리스 해방군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지레 겁먹어 먼저 항복의 의사를 전해 온 자들도 많으니… 정말로 이 세계는 조금씩 희망을 되찾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몇 번 손을 흔들다가 도망친 지호는 새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무너졌다.

    “아, 진짜… 적응 안 되네.”

    “즐겨, 지호야.”

    지호를 따라온 이원이 위로했다. 그냥 얄밉기만 했다.

    “너라면 즐기겠냐!”

    “난 더한 것도 즐겼지.”

    “…….”

    그래, 잘났다. 이 개새끼야. 지호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이거 너무… 쪽팔린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여기 계셨군요, 세이크리스의 영웅이시여.”

    지호는 얄밉게 인사하는 크사냑을 흘겨보았다. 누가 심복 아니랄까 봐, 이원과 죽이 잘 맞아서는. 지호를 ‘영웅’ 따위로 부르는 크사냑은 대놓고 즐거워했다.

    지호는 크사냑에게 타박하는 대신 이원을 검집으로 후려쳤다. 크사냑에게 한 마디 하는 것보단 이원을 때리는 게 훨씬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해서인지 약발이 떨어져서는… 크사냑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설마하니 이원 님이 맞고 사는 남편이 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

    “하지만 한국에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더군요.”

    “맞아. 게다가 지호는 이상성욕이라 날 패는 걸 좋아해서… 아야.”

    “아야는 무슨.”

    지호는 엄살 부리는 이원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지만……. 일단 희망 자체가 죽어가던 세계에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것만큼은 부끄러움을 감수할 만큼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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