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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비(6) (188/283)
  • 27. 대비(6)

    갑자기 뜻 모를 사과만 던지는 이원을 말릴 틈도 없었다.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지호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주이원 이 미친 새끼가 제 배에 마력으로 만든 예리한 칼날을 꽂아 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새빨간 피가 저 혼자 이 세상에서 색채를 가진 양 자극적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가신 지호를 보며 이원은 얄밉게도 씩 웃었다.

    “이제 괜찮아… 잘만 풀린다면.”

    괜찮기는 무슨, 배에 구멍이 났는데 뭐가 괜찮단 말인가. 일단 미친 짓을 저지른 놈답게 눈깔이 반쯤 돌아가 있는데.

    이원의 배에서 흐른 피가 발치를 적시는 순간, 주이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지호는 그가 바닥으로 엎어지기 전에 가까스로 받아 냈다. 가까워진 지호의 얼굴을 보고 이원이 웃었다.

    “지호가 내 몸을 받아 주네… 진짜 다 컸다.”

    “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나 내뱉는 이원을 때리고 싶다. 아니,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면서 자기 배를 뚫는 미친놈이 주이원 말고 대체 어디 있나.

    지호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이원을 바닥에 앉혔다. 이원이 또 이상한 짓 못 하도록 다리를 몸으로 누른 채, 급히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러나 이원은 냅다 상처에 포션을 부으려는 지호의 손을 막았다.

    “잠깐만. 치료하지 마.”

    “너 진짜 미쳤지?”

    “아니, 어차피 뚫린 거… 잠깐만 기다려 줄래?”

    제 배에 커다란 구멍을 하나 내어 놓고, 무슨 종이에 구멍 하나 뚫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지호의 얼굴이 사나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지호는 지금 저를 이플리스로 냅다 데리고 튄 이원마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쌍욕을 쏟아 냈을 법한 지호를 보며 이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음,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되긴 뭐가 돼?”

    “됐다.”

    인내심이 다 닳은 지호가 이원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포션을 입에 처박기 전에, 다행히 이제 괜찮다는 사인이 떨어졌다.

    지호는 지금 이원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별 관심 없었다. 이 미친놈의 배에서 흐르는 피를 막아야겠다는 생각뿐.

    급한 대로 지호는 곧장 포션을 이원의 배에 들이부었다. 지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성능이 좋은 포션은 이원의 피부에 닿기 전에 액체에서 마력으로 화해 상처로 스며들었다. 금세 피가 멎고, 서서히 상처가 낫는다.

    지호는 눈을 의심했다.

    “지호야?”

    정말? 포션 하나에 이렇게 싹 낫는다고?

    지호는 찢어져 넝마가 된 옷을 헤치고 이원의 살갗을 확인했다. 조금 전 구멍이 났던 배는 뚫린 게 거짓말처럼 말끔했다. 그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잘린 것도 붙일 만한 성능의 포션이니, 평범하게 찔린 상처에는 낫는 게 당연하겠지만…….

    상대는 주이원이다.

    이 독한 놈이 부득불 마력으로 제 배를 뚫어 버린 데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전에 봤던 것처럼 상처가 낫지 않아 그대로 속이 들여다보인다거나, 아니면 뭔가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는데.

    만져보고 더듬어 보고 주물러 봐도 이상한 점은 없다. 오히려 그게 더 미심쩍었다.

    “이 새끼, 또 무슨 짓 했어.”

    “자기, 날 오해하는 것 같은데…….”

    지호는 시끄러운 이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뭔가 말하려던 이원은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그리고 지호를 채근하지도 않고 얌전히 바라본다. 명백히 이상한 낌새였으나 반쯤 넋이 나간 지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호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이원을 마저 뜯어보았다. 아예 옷을 벗겨서 보려는데… 그때, 갑자기 이원이 슬그머니 지호의 뒤를 눈짓했다.

    “자기야. 뒤.”

    “뒤?”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또 개수작이겠거니, 퉁명스럽게 대꾸한 채 무시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강렬한 마력과 동시에.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기척에 놀란 지호가 몸을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정말, 이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얼굴이다.

    “…….”

    지호가 곧장 검을 뽑아 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으니까.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지구에 있어야 할, 미르의 길드장인 김태용과 델타의 길드장이자 이원의 심복인 크사냑이었다.

    검을 든 채 잠시 대치하던 지호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게 뭔가의 환각이라면 조금 더 친숙한 이의 얼굴을 하지 않았겠는가? 김태용과 크사냑이라니, 차라리 임승주나 허소리가 나오면 또 모를까. 게다가 둘 다 이 상황을 정확히 짐작하지 못한 듯 얼빠진 얼굴이었다.

    태연한 건 오직 한 사람.

    지호는 얄미운 이원을 흘겨보았다.

    “……너 설마 이것 때문에 뚫은 거냐?”

    배를?

    이원은 부정하는 대신 웃으며 크사냑에게 눈짓했다.

    “크사냑.”

    “네.”

    “이 성벽 쪽으로 다가오는 놈들 제압해.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놀란 적 없다는 듯이 크사냑이 정중한 태도로 명을 받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연하게 질린 지호를 두고 크사냑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자리에 남은 태용은 조금 얼빠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저희가 때를 잘못 맞춰 왔다면 잠시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무슨 소리야. 반문하기도 전에 지호의 허벅지 위로 슬그머니 이원의 손이 올라와 옷 너머로 피부를 문질렀다.

    그제야 지호는 두 사람의 자세가 은근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걸 보고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 묻은 손을 슬쩍 내밀었다. 물론 두 사람의 자세며 차림이 좀 이상하긴 한데, 피범벅으로 이상한 짓을 할 리는 없지 않나?

    “워낙 과격한 분들이시니…….”

    태용이 덧붙인 말이 더 기가 막혔다. 이원이라면 몰라도 자신까지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억울했다.

    아니 이게 억울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이 참으로 현실감 없었다. 위기감은 도망가고 황당함만이 몰려드는 게…….

    상황이 참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지호 혼자는 아득바득 해내던 일이 크사냑 한 번 나서니까 참 쉽더라.

    크사냑은 무치스에서 쳐들어오던 나름의 대군(이었던 것)을 몇 초 만에 간단하게 제압했다. 제압했을 뿐일까, 기절시켜서 한쪽에 곱게 쌓아 두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호 이상으로 당황한 티항크의 주민들 그리고 김태용과 함께 그들을 물리적으로 구속하고 아이템을 벗기는 중이다.

    여기서 가장 놀란 지호는 이원의 멱살을 잡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원을 앉혀 놓고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즉, 주이원이 지구로 돌아온 건 대상을 찾아 좌표를 특정해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그 방법은 이원의 심복인 크사냑 역시도 알고 있었고… 그걸 역이용해 이원은 다른 차원에 제 마력 정보를 발산하고 있었다. 크사냑이 자신을 찾아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지호는 참담하게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애초에 부를 수 있었다면… 아니, 아니지. 누가 올지는 몰랐겠네.”

    “맞아.”

    함께 지구로 넘어온 건 현재 적대적인 관계가 된 세테르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으로서는 무방비한 상태의 자신을 함부로 노출할 수는 없었다.

    “물론, 평소처럼 강한 마력을 쓸 수 없으니까. 크사냑이든 세테르든 찾기 힘들었겠지. 크사냑 말고 누가 하나 더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아직 자세한 사정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크사냑이 미르 길드 쪽과 힘을 합쳐 지호나 이원의 뒤를 쫓고 있던 모양이다.

    잘 된 일이다. 단 둘이 대던전을 헤쳐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지호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이 튀어 나왔다.

    “아니, 이런 수가 있으면 좀 말해 주지?”

    “피와 생명력을 매개로 했다지만 아슬아슬했으니까. 일주일만 더 이르게 일이 터졌으면 회복이 다 안 되어서, 내 목을 잘랐다 한들 제대로 된 신호는 못 보냈을걸.”

    “말 좀 그렇게 하지 마.”

    살벌한 말에 지호가 눈을 세모꼴로 뜨자, 이원이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정말 자르겠어? 그냥, 원래는 이런 수 안 쓰고 부를 생각이었으니까… 어지간하면.”

    이전의 이원 같으면 몰래 부르고 입을 닦았겠지만, 그 또한 지호를 보고 느낀 게 참 많았다. 그래서 되도록 아슬아슬하게 무리하는 선에서 위험을 감수한 채, 때를 기다렸다.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이대로 도망치면 당장은 살아남겠지만 어차피 제대로 된 수련도 못 하고 대던전이 나타날 때까지 도망만 치다가 죽었을 테니까.”

    그렇게 됐다면 정말로 모든 게 끝이다. 이 세계도 두 사람의 목숨도. 지구에서 몸을 던지던 것과 달리 정말 벼랑 끝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판단이긴 하다.

    “설명이라도 해, 다음부터는.”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뭐 임마?”

    “다 죽을 줄 아는 상황이니까 한계까지 수련이 가능했던 거지. 성장도 빨랐잖아.”

    “…….”

    “게다가 말했잖아? 회복이 조금만 늦었어도 못 불렀을 거라고. 대던전이 빨리 나타났을 때의 대비는 해야지.”

    이런 부분에서는 묘하게 맞는 말을 한다는 게 이원의 열받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제 조금 더 열심히 굴려도 되겠다.”

    “뭐?”

    “회복시켜 줄 사람 있잖아.”

    “…….”

    “싫어?”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왜 남을 굴린단 말을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하는지……. 하하. 지호는 이원을 차마 때리진 못하고 얼빠진 웃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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