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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비(5) (187/283)

27. 대비(5)

이른 새벽, 지호는 옆에서 잠든 이원이 벌떡 일어나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설핏 본 이원의 얼굴이 굳어 있어서 졸음기가 확 달아났다.

“왜 그래?”

“이쪽으로 오는 새끼들이 있는데.”

“균열?”

균열에서 발생한 몬스터가 도시를 습격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흔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지만, 이원이 저렇게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지호는 도시 주변으로 몰려드는 마력을 감지해 확인했다. 제법 많은 수의 기척이 도시로 밀려들고 있었으나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거라도 있어? 평소보다 조금 강한 수준 같은데.”

이미 침대에서 뛰쳐나온 지호가 검을 챙겨 들면서 물었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전력은 현재 신지호이니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이원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이원답지 않게 불명확한 말로 얼버무렸을 뿐.

“일단 가 보고.”

지호는 이원과 함께 숙소 밖을 빠져나왔다. 그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도시 안의 망루를 지키던 경비가 종을 쳤다.

“무치스에서의 습격이다!”

“뭐?”

당연히 몬스터일 줄 알았던 지호가 멈칫했다. 도시를 향해 몰려드는 기척은 한둘이 아니다. 지호는 망루 위로 올라가 성벽 밖에서 몰려드는 병력을 확인했다.

적의 수는 대략 200 정도. 이곳 티항크의 인구가 모두 1000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무기를 들고 길들인 몬스터를 탄 채 달려드는 모습에 지호는 아연해졌다. 쯧, 짧게 혀를 찬 이원이 지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지호야.”

이원이 지호를 이끄는 곳은 무치스의 습격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당황한 지호가 멈춰 서자 이원은 냉정한 눈으로 돌아봤다.

“가긴 어딜 가?”

“도시를 빠져나가야지.”

“그러니까 왜…….”

“신지호 님!”

지호의 말을 자르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가가 창백한 낯빛으로 검을 쥔 채 앞까지 달려왔다. 오르가는 무표정한 이원을 한 번 보고, 지호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무치스에서 습격이 왔습니다.”

“갑자기 왜요?”

무치스가 인신매매를 일삼는 무법적인 도시라고 해도, 굳이 티항크를 습격할 이유는 없다. 나름의 방어 체계가 갖춰진 도시와 싸워 손해를 감당할 만큼의 이득이 티항크에는 없으니까.

오르가는 침통한 낯빛으로 입을 뗐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나실리타 님을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제가 피하면 여긴 어쩌려고요.”

“무치스에서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습격을 시작했다면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계속 이어지겠지요.”

“그러니까 더더욱…….”

“상대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망설임을 잘라 내는 오르가의 단호한 목소리에 지호가 움찔했다.

“나실리타 님은 신지호 님도 아시다시피 꼭 필요한 분입니다. 부디 그분만은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오르가 님.”

“……지금까지 몬스터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꾸벅 고개 숙였던 오르가는 잠시 지호의 얼굴은 눈에 담고는 그들이 온 길로 달려 나갔다.

오르가를 다소 경계어린 눈으로 보던 이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뜻대로 무탈하게 끝나서 다행이라는 듯이.

이원이 천천히 바닥에 손을 짚었다. 원래 주이원이 가졌던 마력에 비하면 한 줌, 아니 티끌조차 되지 않는 마력이 땅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원에게는 너무도 적은 양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꽤 강대한 축에 속할 마력. 거기에 반응해 도시 전체에 미리 그려 둔 마법진이 반응한다.

곧 머리 위의 하늘로 새파란 막이 씌워졌다. 도시를 보호하는 결계였다. 한동안은 이것이 티항크를 지켜 줄 터였다. 물론 그 순간이 끝나면 이 도시는 최후를 맞겠지만.

이원은 자리에 멍하니 선 지호를 이끌었다.

“이걸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얼마간…….”

“그래. 들었지? 우리는 그 여자를 챙겨서 탈출하자.”

“잠깐, 주이원.”

“안 돼.”

이원은 지호의 생각이 빤히 읽힌다는 듯이 단호한 기색이었다.

“여기서 항전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언제까지 습격이 이어질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무를 이유는 없어.”

“하지만…….”

“그럼 저기 쳐들어오는 놈들 다 쳐 죽이고 나머지도 오는 족족 쳐 죽일래?”

이원이 상냥하게 질문했다. 전혀 다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온몸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차라리 제압이 가능하면 좋았을 텐데, 저 많은 수를 상대로 사정 봐주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원은 얼어붙은 지호를 보고 한숨 쉬더니, 이내 지호를 다시 이끌었다.

“그냥 따라와. 내가 결정할 테니까.”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비겁하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고집스레 버티고 선 지호를 보던 이원이 한숨을 내뱉는다.

“가고 싶으면 가. 이플리스의 맹약은 유효하니까. 지호가 원한다면 내가 몇 번 더 대신 죽어 주면 되지.”

지호의 몸에서 힘이 탁 빠졌다.

한동안 함께 지낸 사람들의 안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다쳐서 제 곁으로 찾아온 이원의 안위, 시스템의 제안, 지구에서 그를 기다릴 사람들… 냉정하게 재어 보면 추는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겁한 새끼…….”

“잠깐 생각하지 마.”

“…….”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지호야.”

이원이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이원이나 오르가의 말이 옳으니까.

뭐라 입을 떼려던 지호가 순간 말을 삼켰다. 가까이 다가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호의 귓가에 걸렸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감지한 이원이 지호를 잡아끌었다. 이번에 지호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좁은 골목에 몸을 숨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모퉁이를 돌아 몇몇 사람이 그들이 있던 길가로 나왔다.

“우리끼리만 싸운다니 제정신이야? 몬스터 몇십 마리도 쩔쩔매면서. 다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지!”

“도와주지 말고 진작 죽게 놔두든가, 씨발…….”

“아직 도시를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거야. 찾아봐. 일단 찾아서…….”

나름 익숙한 목소리에 깔린 노골적인 원망. 그들이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원망의 기저에 깔린 건 본능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와 절박함이라, 지호는 그들을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원이 지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신지호는 저런 말을 듣고 절대 발을 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이원이 본 건,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의 각오를 굳힌 신지호였다.

“가자.”

“…….”

“네 말이 맞아. 위험을 감수할 순 없는 노릇이지. 여기서 흥분한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조용히 빠져나가진 못할 거야. 그러니까 빨리… 도망치자.”

주이원의 안위를 담보로 걸 수는 없다. 평소라면 지호를 눌러 앉힐 말이 오히려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지호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혼자뿐이었다면, 그리고 책임질 게 없었다면, 신지호는 원하는 대로 제 품 안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감내하더라도 싸웠을지도 모른다. 신지호는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지금 신지호의 결정은 주이원 때문이다. 주이원과 약속해서, 주이원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기꺼이 제 뜻을 꺾었다.

그 누구보다 지호가 변하길 바란 건 이원이다. 지금 지호가 내린 선택에 이원은 박수를 보내며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썩 기쁘지 않았다. 막상 제 뜻을 꺾는 신지호를 보니, 썩 탐탁지 않아서.

이걸 바랐지만… 동시에 이걸 바란 게 아니다.

“이게 그건가, 아빠의 마음?”

“뭐라는 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이원의 중얼거림에 지호가 어처구니없어서 받아쳤다. 이원은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괜히 턱만 매만졌다.

“이상하지. 난 네가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아니면 뭔데.”

“어릴 때 말이야, 네가 학교에 못 가고 병원에 대신 앓아누워 있으면… 나는 그게 참 속상했거든.”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한가롭게 과거나 늘어놓을 때가 아니질 않나. 주이원이 지호의 안전을 두고 느긋하게 굴 녀석도 아닌데.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원은 차분히 제 생각을 짚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텐데 뭐하러 저렇게 아득바득 공부하나, 싶으면서도… 그렇게 다 죽어갈 것처럼 굴던 네가 힘을 내는 게 목표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였으니까, 그게 참.”

“……참?”

“네 목표라는 게 고맙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하고… 그랬단 말이지.”

“별걸 다 질투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였으나… 이렇게 실랑이할 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원은 아예 지호의 손을 놓았다.

“나는 네가 그저 편하게 살길 바랐던 건 아니었었어.”

이원의 발치에서 서서히 마력이 일렁였다. 이미 지금의 이원이 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사용했을 텐데… 애초에 주이원이 저런 의미심장한 말을 쏟아 내고 마법을 썼을 때 좋은 일이 벌어진 적이 없다.

“야, 주이원. 하지 마!”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호는 냅다 소리부터 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아지가 사고 칠까 봐 일단 경고부터 하는 것처럼. 지호의 걱정을 조금도 신경 안 쓰는 못된 녀석은 그저 짓궂게 씩 웃었다.

“이해 좀 해 줘.”

“이해 안 해!”

“나는 네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어.”

아직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던 어린 시절부터 이원은 계속 그런 생각을 해 왔다. 더부살이하는 처지에 이원이 지호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동급생으로서 늘 지호를 쫓아다니며 챙겨 주는 일 뿐.

어른들은 아무나 못 하는 일이라며 이원이 대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원의 기준으로 이건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을 섬세하게 챙겨야 하는 고단함 따위, 늘 지호의 곁에서 그 애를 독점하는 만족감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도 못했으니까.

게다가 지호를 돌보는 건 그 애에게 호감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이원의 자리를 대신 하다 보면, 그 또한 지호를 독점하는 게 훨씬 큰 이득이란 걸 알게 되겠지.

어린 날의 이원이 지호에게 해주고 싶었던 건,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았지만 이원은 가능한 선에서 애를 썼다.

힘을 내다가도 가끔 한계에 부딪쳐 모든 걸 놓을 것처럼 구는 신지호가… 저를 목표로 삼아 힘내 주기를 바라며 그보다 앞서 나가 1등을 고수한다거나.

그것도 결국 이원 좋은 일이 되긴 했다. 지호가 자신을 목표로 쫓아오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 무렵보다 해줄 수 있는 일이 훨씬 많다. 지호의 이상이 높아진 만큼, 이원의 능력 또한 훨씬 강해졌으니까.

“미안.”

지호가 화낼 줄 알면서도 그게 오래전부터 바라 마지않던 이원의 욕심이라, 결국 이원은 화낼 걸 예상하면서도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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