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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비(3) (185/283)
  • 27. 대비(3)

    건물 밖으로 나온 니어트는 흥분으로 새빨개진 뺨을 애써 식혔다.

    ‘나실리타 님을 다시 뵙게 된다니.’

    신지호가 그 끔찍한 무법지대 무치스에서 구해 온 사람은 나실리타 엘폰 쥬메르, 균열이 일어나기 전 그들의 왕국인 세이크리스의 왕세자였다.

    노쇠한 국왕 대신 훌륭하게 국정을 이끌던 나실리타. 하지만 유능한 그녀에게도 균열은 어찌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였다. 물론 나실리타는 균열 사태에서도 어떻게든 남은 왕국민을 수습하려 애썼다.

    그런 나실리타가 석 달 전,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남은 소지품과 몬스터의 발자국으로 막연히 그 자리에서 있던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실리타를 쫓았던 수호 기사 역시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비규환이 된 세상에서 실종은 곧 죽음을 뜻했다. 나실리타 역시 살아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나실리타가 무치스에서, 그것도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지내고 있을 줄이야.

    한때 나실리타를 주축으로 뭉쳤던 세이크리스 왕국민은 환호했다.

    나실리타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는 놀랐지만,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관리자라는 말에 다들 환호했다.

    덕분에 나실리타를 데려온 신지호는 명실상부한 티항크의 영웅이 되었다.

    나실리타가 돌아오고, 신지호가 균열과 던전을 처리해 사상자가 줄어들면서, 그저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눈에 희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니어트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이 다시 살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무너진 도시를 조금씩 재건하고, 식사 때가 되면 집마다 연기를 피워 올리며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대단해.’

    관리자도 아닌 각성자가 이렇게까지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한 적 없다.

    ‘관리자가 아니어도 가능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각성자가 아니더라도 제 역할을 잘하는 것만으로 무언가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니어트는 힐끗 엊그제 고쳐진 시계탑을 확인했다. 신지호처럼 대단한 일은 못하더라도 당장 할 일이 있었다.

    곧장 주방으로 향한 니어트는 곱게 쑨 죽과 물을 챙겨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평소라면 얼씬도 못했을 개방형 던전이지만 지금은 안전하다. 알고 있지만 조금 긴장한 채 니어트는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쿠웅!

    안에서 들리는 무언가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

    “아아아악!”

    그리고 찢어질 듯한 누군가의 비명.

    “…….”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겁했겠지만 니어트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안쓰러운 눈으로 먼지가 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명과 함께 날아가 벽에 처박힌 신지호가 널브러져 있었다. 신지호를 목검 하나로 날려 버린 남자는 그런 신지호를 보며 처량하게 중얼거린다.

    “자기, 어떻게 그렇게 매번 옆구리를 비워 둔 채 달려들 수 있어……. 내가 몬스터였으면 자기 다쳤을 텐데, 상상만 해도 진짜 맘이 아프다.”

    “…….”

    아니, 마음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데.

    누가 봐도 원한이 있는 사람 같건만, 그는 신지호의 남편인 주이원이었다.

    신지호는 저딴 새끼는 제 남편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부부처럼 보였다.

    필사적인 부정이야 뭐… 예전에 니어트의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푸념하던 것(‘이 웬수덩어리! 이걸 걸 내 남편이라고!’라거나, ‘어디 가서 이 집 가장이라고 하지 마!’ 등)과 별 다를 바 없었다.

    항상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죽은 채 발견됐다.

    신지호 역시 주이원이 쓰러졌을 때 며칠이나 제정신이 아닌 채 옆을 지키지 않았나.

    게다가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나란히 서 있으면 그림이 된다. 둘 다 다른 방향으로 잘생겨서, 부부가 아니었다면 그들을 노리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뭐, 지금은 철천지원수 다루듯 수련시키고 있지만.

    “주이원 개새끼…….”

    처음 봤을 때보다 입이 험해진 신지호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났다. 주이원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상처 받아.”

    “상처 받는 놈이 할 짓이 아니지.”

    니어트가 봐도 그랬다. 이 장면만 똑 떼어 놓고 본다면 둘이 부부라는 걸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기척을 느꼈는지 신지호가 곧장 니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척 반색하며 신지호는 니어트에게 다가왔다.

    “고마워.”

    음식을 받아든 신지호는 식기를 쓰는 것조차 귀찮은지 죽을 그릇째 마셨다. 말끔할 때는 어디 귀족 도련님 같은데 지금은 밥 빌어먹는 거지 같았다.

    “정말 그걸로 돼?”

    “응. 먹을 힘도 없어.”

    “그 정도로 먹을 힘도 없다는 게 자기가 노력해야 한다는 증거야.”

    가까이 다가온 주이원이 말을 덧붙였다. 신지호가 살벌하게 노려봤지만, 이내 노려볼 기운도 없는 듯 축 늘어졌다. 그리고 니어트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는 저렇게 크면 안 된다. 사람은 인성이 제일 중요한 거야.”

    “응.”

    저건 옆집 아저씨의 단골 멘트인데. 둘이 정말 사랑하며 잘 지내는구나, 생각하며 니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니어트가 그릇을 받아 나가자마자 지호는 바닥에 늘어졌다. 그런 지호를 빤히 바라보던 이원이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늘어져 있던 지호가 살벌하게 이원을 노려보았다.

    “뭐야. 왜? 당장 일어나라고? 못 일어나. 그냥 날 죽여.”

    “자기, 무서운 말 하네. 내가 자기를 왜 죽이겠어……. 안 죽으라고 하는 짓이지.”

    “그러기 전에 내가 죽겠다.”

    돈 내고 수업하면서 헬스 트레이너를 욕하는 심리를 이제 뼈저리게 알게 된 지호는 이원을 경계했다. 그런 지호를 보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은 이원이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지호의 머리를 들어 제 무릎에 얹었다.

    “바닥에 누우면 불편하잖아.”

    “바닥에 몇 번이나 굴린 건 너……. 하아, 됐다.”

    지호는 넌더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죽일 듯이 굴려대도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렇게 쥐 잡듯 굴릴 줄은 몰랐지만… 그 김에 평소보다 세 배쯤 얄밉게 입까지 털 줄은 더더욱 몰랐지만……. 어쨌든 다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쉼 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수련이 끝날 때쯤 되면 차라리 기절해서 사흘 정도 의식 없이 잠들기를 기도했다.

    정말로 열받는 건 다른 스테이터스가 낮아도 S급은 S급이라는 건지, 자고 일어나면 상태가 괜찮아졌다. 그래서 어제와 같은, 혹은 더 심한 강도로 다시 굴려졌다.

    어쨌든 식사를 했으니 앞으로 10분은 쉴 수 있을 터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하는데… 누군가가 급하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신지호 님!”

    그가 부르기도 전에 지호는 벌떡 일어난 상태였다. 죽겠다고 늘어질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양 벌떡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지호를 급하게 찾을 이유는 하나뿐이다.

    균열.

    이원이 지호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었다.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진 못했어도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한 채 날아오르는 정도는 문제없었다.

    요동치는 마력을 쫓아 균열이 발생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주이원은 거대한 얼음을 만들어 아래로 내리꽂았다.

    퍽!

    강렬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단번에 으깨진다. 비처럼 내리는 거대한 고드름이 사람을 습격하던 몬스터를 쓰러트린다.

    “후…….”

    지호의 스킬로 강화한 덕에 잠깐의 위력은 강하지만, 지금의 이원은 마력 자체가 적어서 마법을 여러 번 쓸 수 없었다.

    대신 이원은 공격과 동시에 고드름으로 거대한 얼음의 벽을 쌓는다. 날아다니는 놈은 없으니 이걸로 몬스터가 곧장 밖으로 나가긴 어려워질 터.

    이원이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린 지호는 아직 죽지 않은 몬스터를 향해 곧장 도약했다.

    서걱.

    일격에 몬스터의 목이 날아간다. 지호는 검을 거두다가 곧장 옆으로 뻗어, 저를 향해 다가오는 몬스터의 머리를 찔렀다.

    하얀빛이 서린 검에 급소를 공격당한 몬스터는 곧장 숨이 끊어진다. 지호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쉬다 왔으면 모를까 한창 수련하다가 온 터라 힘들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지호는 쳐다보지도 않고 검을 뒤쪽으로 찔러 넣었다. 사냥감을 안전하게 사냥하리라 믿었던 몬스터는 단말마와 함께 뒤로 넘어간다.

    검술은 약해도 마력을 느끼는 감각은 예민하다. 남은 몬스터의 수를 가늠한 지호는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곧장 다시 움직였다.

    예전의 신지호는 검을 활용하는 게 단조로웠다. 최대한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크게 휘두르고, 그만큼 동작의 허점도 많아지고. 초보자이니 적을 정확히 찌르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동작이 이전보다 훨씬 간소해졌다. 비효율적인 걸 극히 싫어하는 이원의 검술을 흡수한 덕이었다. 그건 마력에 스테이터스가 치중되어 상대적으로 체력이 낮은 지호에게도 딱 알맞은 검술이었다.

    몬스터가 달려드는 방향을 확인하고 빈틈을 찌르거나 벤다. 다소 부족한 힘은 지호의 스킬 [클라우 솔라스]가 뒷받침했다. 희게 빛나는 검은 스치기만 해도 몬스터를 상대로는 치명상을 입힌다. 찔러 넣으면 아무리 단단한 가죽도 얇은 천처럼 찢어진다.

    나름대로 지능이 있는 놈들인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지호를 에워쌌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 다대일의 전투는 더없이 불리하지만…….

    지호는 가볍게 발을 디뎌 훌쩍 뛰어올랐다. 제 키보다 두세 배는 높게 뛰어오른 지호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몬스터의 머리를 발로 내리찍어 착지했다.

    검을 크게 반원 모양으로 휘두른다. 두 마리까지는 쉽게 베었지만 마지막 한 마리는 뒤늦게 정신 차리고 피했다. 지호는 뒤로 달려드는 몬스터에게 검을 휘두르는 대신, 팔꿈치를 뒤로 찍었다.

    뻐억!

    제대로 턱을 얻어맞은 몬스터가 휘청거린다. 지호는 가뿐하게 균형을 잡고 한 놈을 마저 베어 낸다.

    예전이라면 이 정도의 몬스터를 죽일 때 몇 분은 걸렸을 텐데, 지금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지호는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여유롭게 다음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지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뒤집어쓴 피까지 닦을 수는 없었지만, 지호는 개의치 않고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스템 관리

    ‘검술’의 스킬 레벨이 1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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