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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비(1) (183/283)
  • 27. 대비(1)

    이원은 이틀 내내 창백한 낯으로 미동도 없었다. 그냥 잠들어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믿을 수가 없어서… 지호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계속 이원의 곁을 지켰다.

    불안전한 도시에서 유일한 전력인 자신이 이러는 게 멍청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틀간 도시 근처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호는 하염없이 이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시선으로 얼굴이 닳을 수 있다면 닳을 만큼.

    늘 지호의 앞에서 따뜻하게 미소 짓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자 온도가 차갑게 내려갔다. 이곳 사람들이 슬쩍 보고 갈 만큼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지만, 지호의 눈에는 영 초췌해진 게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깜박 잠이 들었던 지호는 이원의 손끝이 움직이는 걸 봤다. 하지만 이원이 잠든 사흘 내내, 미동도 없는 이원이 움직였다고 너무 많이 착각해서. 제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임을 깨닫고 실망한 적이 너무 많아서… 이번에도 잘못 본 줄 알았다.

    이원이 느릿하게 눈을 떴을 때까지도 지호는 자신이 보는 게 진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안녕, 자기야. 오늘도 예쁘네.”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원의 다 갈라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깨어나면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얼마나 걱정했는지도 모르고 헛소리나 하는 이원 때문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런 소리가 나와, 지금?”

    “걱정했어?”

    “당연하지. 너 쓰러지고 계속, 계속 잤는데. 아니… 하도 움직이질 않으니까 이게 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나는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은 간신히 참았지만, 눈가가 붉게 짓물러져 있어서 얼마나 울었는지는 뻔히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제아무리 이원이라도 뻔뻔한 말이 나오진 않았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전에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으며 이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늦게 찾아온 거?”

    “이제 네 심정을 알겠다. 이 속 터지는 새끼…….”

    “아, 그건 다행이네.”

    이원은 기어코 지호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실실 웃는 얼굴이 정말 화나지만… 정말, 이원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절실하게 이해했다.

    한순간도 제정신일 수 없었다. 이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를 않았다. 이원은 그런 순간을 수십, 수백 번은 겪었다.

    심지어 이원은 이플리스에서 지구로 돌아와 지호가 눈을 뜨기 전까지 2년이나 기다렸다. 각성하자마자 쓰러진 지호가 언제 눈을 뜰지 기약 없는 상태로, 지구 전체를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일하면서.

    그 괴로움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지호의 희생이 괴로웠노라고 말하는 이원에게 충분히 공감했다고 여겼다.

    이렇게 직접 겪어 놓고 보니 알겠다. 지호는 이원의 심정을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하물며 1000년 넘는 세월을 이플리스에서 기다리다가 온 이원이니 걱정은 오죽했을까. 산 채로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심정을 이원은 몇 번이나 겪은 걸까.

    “미안해.”

    다시는 이원에게 제 죽음을 전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도 진심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처절했다.

    “자기야.”

    “미안해…….”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동안 이원의 속을 썩여 놓고 한 번 겪었다고 우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는데.

    “신지호.”

    지호의 눈물에 이원은 정말로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울면서도 지호가 이원을 침대 위로 찍어 눌렀다. 이원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지호가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일어나지 마, 이 멍청아.”

    “자기야, 그렇게 누르면 나 아픈데…….”

    “그러게 왜 아프고 난리야? 진짜 짜증 나. 평소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듯이 재수 없게 굴어 놓고. 잘난 척을 할 거면 계속 잘나게 있을 것이지…….”

    “아, 날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어.”

    “입 다물어.”

    화가 치밀어 쏘아붙이는 지호를 보며 이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지호는 서럽게 계속 눈물을 쏟아 냈다.

    * * *

    지호는 놀라서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분명 잠든 기억이 없는데 언제 잔 건지, 편한 옷으로 바뀐 채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고이 덮은 채다. 게다가 분명 아침이었는데 창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다.

    잠이 덜 깨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지호의 얼굴이 이내 새하얗게 질렸다. 이원이 눈을 뜬 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원이 쓰러져있는 동안 까무룩 졸 때마다 그의 꿈을 꿨기 때문에.

    당장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꽤 잠을 잔 덕에 계속 멍하던 정신이 상쾌했다. 하지만 나아진 상태조차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목이 탔다.

    지호는 신발도 신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발에 닿는 감촉이 차갑고 따끔한지도 모른 채 그저 온 정신이 이원만을 쫓았다.

    “주이원.”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상황. 두리번거리던 지호는 건물 옆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뛰었다.

    “주이원!”

    소리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원을 찾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원은 다른 사람과 함께 둥글게 앉아 도란도란 감자처럼 보이는 작물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황당해진 지호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이원이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정색하고 일어섰다.

    “자기야.”

    “뭐야.”

    지호는 자연스럽게 저를 안아 드는 이원과 믿기지 않는 광경을 번갈아 확인했다.

    “……대체 뭔데?”

    “놀랐어?”

    “아니, 그럼 안 놀라겠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턱짓으로 사람을 부리던 주이원이 갑자기 감자나 깎고 있다니. 이건 이원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놀랄 것이다.

    물론 지구에서는 없던 친화력까지 짜내 SS급이지만 친근한 헌터로 이미지 만들기를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황 따라서 바뀌는 저 태도는 참…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이원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둥글게 눈을 휜 채 지호에게 작게 속삭였다.

    “자기 먹을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래서 다듬고 있었지. 이거 가지 맛 난다?”

    “난 가지 싫은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허둥지둥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호의 뺨에 이원이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지호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는데도 이원은 태연하게 아이를 다루듯 지호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일단 들어갈까.”

    이원은 씩 웃고는 함께 있던 사람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지호를 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은 신고 나와야지. 발 다치면 어쩌려고.”

    “나도 S급이거든? 아니, 근데 진짜 뭐냐고……. 남들 앞에서 그러면 어떡해?”

    “아, 괜찮아.”

    “난 안 괜찮거든?”

    “아니, 우리 무슨 사이냐고 묻길래 결혼한 사이라고 했거든.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여보.”

    “…….”

    진짜 미쳤냐? 너무 황당하니까 말도 나오지 않는다. 지호가 입을 다문 사이 이원은 숙소의 문을 열고 방으로 돌아갔다. 지호를 침대에 내려놓은 이원은 속상한 얼굴로 무릎 꿇고 지호의 발을 매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맨발로 나오면 어떡해.”

    “괜찮… 야, 무릎 꿇지 말고 일어나.”

    “이젠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자, 그럼 부부의 시간을 보내 볼까?”

    이원이 능글맞게 웃으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지호는 제 허리를 끌어안는 이원의 손을 탁 치며 사납게 쏘아보았다.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너 왜 쓰러진 건데.”

    “음, 그게…….”

    “헛소리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라.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은 게 아니면.”

    이상한 소리로 넘어가려고 할 게 뻔해서 지호가 사납게 경고했다. 무척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이원이 이내 녹아내리듯 웃었다.

    “박력 있다, 자기야. 반할 것 같네…….”

    “야.”

    “말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는데.”

    “알겠으니까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라.”

    “아, 안 넘어가네…….”

    지호는 결국 이원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워낙 몸이 단단해서 살이 잘 잡히지도 않는데 이원은 엄살을 부리며 물러났다.

    도무지 똑바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원을 지호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주이원.”

    “으응.”

    “나 네 말 이해했다고 했지. 몸 던지지 말라는 거.”

    “…….”

    “이제 안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속이면, 나도 전처럼 또 무모하게 굴까?”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지호의 말에 이원이 한 방 먹은 듯 멍해졌다가 이내 난감하게 웃었다.

    “지호는 내 입 다물게 하는 데 재능이 있다니까.”

    “…….”

    “나도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은 아니었어. 지호가 좀 진정하면 말하려고 했지. 음, 내가 그냥 좀 다쳤거든.”

    “내가 몇 번이나 죽어서?”

    이미 아라베크에게 들어서 짐작하던 일이다. 이원도 당연히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원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렇게 놀라?”

    “그걸 다 직접 겪었어? 얼마나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

    “아니, 그렇게 들어서…….”

    “…….”

    이원이 지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마음이 편하진 않아 보였지만 최악만은 면했다는 듯이.

    “……내가 기억 못 하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그만큼 죽었으면 지금처럼 멀쩡할 수 없을 테니까.”

    단정 짓는 이원의 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건 결국 이원이 어지간하면 이상해질 만큼의 죽음을 대신 부담했다는 것 아닌가.

    뭔가 말해야 하는데 목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물기가 차오를 듯한 지호의 눈가를 문지르며 이제 울지 말라고 속삭였다. 다정한 말에 더더욱 울고 싶어졌지만 이원이 멀쩡해 보였기에 지호는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뭐가 됐든 네가 죽는 것보단 나아. 결국 둘 다 살아 있으니까.”

    지호가 사과하기 전에 이원이 못 박듯 말했다. 그래도 역시 미안했지만… 아마 지호도 이원이 죽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진심을 내뱉는 대신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사히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짧은 말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원이 지호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서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듯이. 잠시 가만히 있던 지호 역시 손을 뻗어 이원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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