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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2) (182/283)
  • 26.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2)

    이원이 간신히 몸을 추스르려던 무렵, 다시 한번 끔찍한 격통이 이원을 덮쳤다. 몸을 으깨는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이원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고통이 아닌 지호를 향한 걱정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건 어떤 개새끼가 작정하고 지호를 죽이려고 한다고 밖엔 볼 수 없다.

    ‘성급했어…….’

    그제야 이원은 자신이 한 짓을 후회했다. 이 세계로 무작정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신지호가 미워서 이 세계에 묶어 두는 게 아니었다.

    주이원은 이플리스에서 칭송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악명을 쌓은 왕이었다.

    주이원을 자주 마주할 리 없는 일반 시민들이야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수틀리거나 자신에게 거역하면 죄다 죽여 버리는 이원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너무 두려운 존재라 차마 거역하지 못한 채 복종했을 뿐이지.

    다 알면서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오만했다.

    대체 누가 지호를 납치한 걸까. 보복은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감히 어떤 놈이?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폐,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두려운 마음에 트라벨 궁 전체에 내린 명령조차 잊고 입을 연 건, 눈에 익은 궁인이었다. 이원은 손을 들어 궁인을 불렀다.

    “히, 힐러를. 아니면 가까운 곳으로 모실까요?”

    “아니.”

    궁인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이원은 곧장 궁인의 머리에 손을 대고 그를 흡수해 버렸다. 놀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죽어 버린 궁인에게 이원은 혀를 찼다.

    “괜히 쓸데없는 걸 봐서는.”

    피를 토할 만큼 약해진 꼴을 남에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보면 안 될 걸 봤으니 처리할 수밖에.

    이원은 자리에 남은 피를 지워 흔적을 없앴다. 이원은 깊이 한숨 쉬었다. 대체 지호를 빼돌린 사람은 누구일까.

    “……아라베크.”

    지호를 가까이서 돌보고 있던 아라베크 외에 범인으로 특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이쯤 되면 당장 달려왔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아마 아라베크가 이원의 정신에 관여한 건 아닐 것이다. 아라베크와 계약한 신은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까. 대신 은신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작은 다른 놈이 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씨발, 대체 어디…….”

    그 어느 때보다 피가 말랐다. 그 와중에도 한 번 더 고통이 느껴져, 이원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처음에는 죽을 것 같더니, 연달아 이어지자 고통 자체에는 적응된다. 하지만 지호가 죽음에 맞닿았다는 사실은 점점 더 아프게 이원을 찔렀다.

    이원은 지호가 있을 만한 곳을 가늠했다. 트라벨 궁 안에 있을 리는 없다. 상대는 아마 물이 전혀 없는 곳에 있을 것이다. 관련 있는 곳을 죄다 털다 보면 지호가 나오겠지.

    최대한 빨리 지호를 찾아야 했다. 지호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상대가 고문이나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대로 공간을 넘으려던 이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간을 넘을 수 없었다. 어느새 트라벨 궁의 결계가 발동해 공간을 넘는 걸 막아 버렸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단 하나.

    현재 이 세계의 관리자이자 왕인, 나사르였다.

    나사르는 이원이 자신을 찾을 것을 아는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이원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애송이를 죽여 버린다면 이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다. 게다가 몇 번이나 지호의 죽음을 대신 받은 지금, 이원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대신 받는다는 건, 단순히 그만한 부상을 옮겨온다는 게 아니었다. 이원의 생명력과 마력을 모두 쥐어 짜내고 영혼마저 깎아 내려 재료로 써야 했다. 지호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지만 이 순간만은 그게 이원의 발목을 잡았다.

    상대에게 약점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원은 고통을 감춘 채 차갑게 경고했다.

    “비켜.”

    “당신이 내게 명령할 이유는 없다.”

    “같잖은…….”

    “당신보다 약하지만 나도 관리자니, 잠시 막을 수 있다.”

    이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삼켰다. 막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지금 상태로는 어쩌면 승기를 점치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원은 멍청하고 안일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지호에게 친한 척 굴더니 네놈도 한 패였군.”

    “나는 지호를 구할 거다.”

    이원은 귀를 의심했다. 확고한 믿음에 찬 애송이는…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지호를 넘겼거나, 또는 납치범을 비호하게 되었겠지. 이 멍청한 새끼. 이원은 나사르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구해? 다 죽게 생겼는데?”

    “지호를 말려 죽이는 건 당신이다.”

    “아니, 지호는 지금 몇 번이나 죽었어. 나는 지호와 목숨을 이어 두었거든. 궁금하면 확인하지 그래?”

    관리자로서 나사르는 그 세계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스템창을 열람할 수 있다. 단, 관리자인 지호와 스킬을 써서 막고 있던 이원은 예외였다.

    이원은 시스템과 나사르의 눈을 막던 스킬을 해제했다. 이원의 시스템창을 급히 확인하던 나사르의 얼굴이 곧 새하얗게 질렸다.

    “이거… 정말이야?”

    “내가, 지호를 해칠 거라면… 이런 스킬, 을, 걸지는, 않았겠지.”

    “…….”

    이원은 창백하게 질린 나사르를 노려보았다. 이 와중에도 지호가 한 번 더 죽었다. 미친 새끼가 대체 얼마나 죽여 대는 건지.

    “아라베크처럼 지호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비켜.”

    “아, 아라베크인 건… 어떻게 알았지?”

    “머리가 있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어? 너 같은 멍청한 애송이 녀석이 아니고서야.”

    너무 멍청해서 화를 낼 기운도 없다. 고작 두 살짜리에게 똑똑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까지 바란 건 아닌데, 설마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어 일을 망칠 줄이야.

    이원은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나사르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니까 아라베크가 지호를 죽이려 들었겠지. 아니, 나도 멍청했지만.”

    “뭐?”

    “아라베크는 왕을 섬겨. 놈이 충성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너다. 아라베크는 지호에게 손을 써서 어떻게든 나를 협박하려는 거다.”

    그런 것 치고는 거침없이 죽여 대고는 있지만. 어쩌면 시체를 조건으로 협상하려는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는 납득하기 전엔 자리를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알다시피, 내 존재는 네게 딱히 도움이 안 돼. 그러니 어떻게든 치우려는 거다. 이제 좀 알아듣겠나?”

    이원이 이플리스에 온 이후로 선왕파와 현왕파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미 관리자의 자리를 넘겼는데도 아직까지 왕이었던 이원의 존재에 질척거리는 놈들이 많았다. 지구로 따라와서까지 지호에게 손을 대려던 세테르처럼.

    귀찮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 싫었다. 어차피 지호는 자신이 지킬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국 선왕파인 세테르나, 현왕파인 아라베크 둘 다 똑같이 지호를 노렸다. 이원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니까.

    별 거 아니라고 무시하던 이원은 결국 지호를 놓쳤다. 스스로 지호와의 연결을 끊은 사이에.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대한 판이 짜여 있고, 이번만은 주이원이 놀아났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나사르가 결계를 거뒀다. 그리고 이원에게 다가왔다.

    “혼자서 무작정 찾지 말고 나랑 가자.”

    “꺼져.”

    “위치도 모르잖아? 나는 짐작 가는 곳이 있다. 그 몸으로는 돌아다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

    시스템창을 까 버려서 이원의 상태를 들켰다.

    “지호를 구하는 게 먼저다. 지금은 내 손을 잡아.”

    이딴 애송이와 손을 잡고 싶지 않았지만, 지호의 안위가 달린 이상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 만약 계속해서 지호를 죽인다면… 그래서 이원의 모든 것이 깎여 나간다면, 결국 지호는 진짜로 죽는 게 아닌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좋아. 협조하지.”

    “잠시 기다려라. 혹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예상되는 위치를 확실하게 포착해 공간을 넘을 테니까.”

    “마음대로.”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애송이 치고는 옳은 판단이었다. 괜히 마주쳐서 도망치게 두었다가는 위험을 느낀 상대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지금은 도와주겠지만 지호를 아껴 줘.”

    스킬을 쓰면서 나사르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원은 이깟 애송이가 제게 충고를 했단 점이 기가 막혔다. 다른 것도 아니라 지호에 대해 혀를 놀리다니, 관리자만 아니었어도 죽여 버렸을 텐데.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마.”

    “지호도 내 이름을 불러.”

    나사르가 뻐기듯 말했다. 그야 지호는 어린애들에게 친절하니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짜증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닥쳐.”

    “근데 잠들면 당신 이름을 부른다.”

    “…….”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

    태연하게 대답하려던 이원의 말끝이 뭉개졌다. 지금 한 번 더 지호가 죽었다. 이원은 몹시 초조해졌다.

    “빨리 좀 찾아.”

    “찾고 있다. 그런데 쉽지 않아. 아무래도…….”

    “신이 개입한 모양이지.”

    나사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쓸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관리자를 막을 정도로 신이 개입했다면, 계약자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지간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거의 목숨을 내놔야 했겠지.

    무엇을 위해 지호를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하는 거지?

    단순히 이원과 연관되었다고 하기엔 과하다. 아라베크가 지호를 빼돌린 건 이플리스 내의 이해관계 때문이지만, 그 뒤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찾는 동안… 회복이라도 하지 그래.”

    “어차피 이건 스킬로 회복 못 해.”

    다른 스킬이 그릇 안의 마력을 꺼내 쓴다면, 이 스킬은 그릇 자체를 부숴서 마력을 뽑아 낸다. 그릇이 회복되기까지는 결국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원은 다시 한번 찾아오는 격통을 느끼며, 지호가 무사할 때까지 자신이 버티기만을 기도했다.

    어느 순간부터 지호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탐색 또한 더뎠다. 이원은 나사르를 죄다 먹어치우고 싶다는 욕구를 간신히 참은 채 기다렸다.

    그리고 간신히, 마력의 흐름을 쫓아 아라베크가 있던 자리로 갔을 때.

    “…….”

    그곳에 남은 건 작은 조각밖에 남지 않은 시신과 거대한 마력의 잔재뿐이었다.

    “이미… 차원을 넘었다.”

    “…….”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이원은 차원이 열렸던 자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분이 끓었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멍청하게 있을 때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호는 아직 죽지 않은 거니까.

    이원은 곧장 마력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력의 흔적만으로 지호가 간 차원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지호에게 끼워 둔 반지가 존재하는 한 실마리는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다가 이원은 짧게 기침했다. 토한 피를 닦아내며 이원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옆에서 나사르가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조금만 쉬고 해라.”

    “그 사이에 지호가 죽으면?”

    나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입을 다문 채, 이원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거나 마법을 보조하려고 애를 썼다. 이원은 그런 나사르의 시도를 담담히 받으면서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찾았다.”

    “정말로?”

    나사르의 물음에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많이 바닥난 이원 대신, 나사르가 차원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원은 정신을 집중한 채 함께 마법을 쓰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옷은 먼지와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이원은 손으로 가볍게 옷을 털어 냈다. 마력이 스쳐 지나가며 이원의 차림이 깔끔해졌다.

    “지금 옷 같은 게 걱정되는 건가?”

    “엉망으로 가면 지호가 걱정해.”

    걱정 끼치기는 싫으니까.

    지호를 만나기 전에 이원은 다시 한번, 연습으로 되찾은 미소를 얼굴에 그려 냈다. 그리고 곧장 차원을 넘었다.

    차원을 넘자마자 보인 건 황량한 대지에서 누군가와 대치중인 지호의 모습이었다.

    “또 위험한 짓 하고 있네…….”

    이원은 기가 차 탄식하면서도 지호를 꽉 끌어안았다. 뭍으로 나온 물고기가 다시 강으로, 바다로 돌아간 것처럼. 이원도 그제야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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