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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세계(6) (180/283)
  • 25. 이세계(6)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죽음을 내게 전가한 건 아니야. 내가 멋대로 받아 간 거지.”

    “하지만…….”

    “대신 네가 네 몸을 아끼지 않은 건 미안해하도록 해.”

    “알았어.”

    엄하게 말하는 이원에게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원과 연결되지만 않았더라면 여전히 몸을 날렸을 것 같다. 하지만 이원과 연결된 데다가… 니어트의 호통으로 자신의 역할과 위치에 관해 한 번 더 깨닫게 되었으니까.

    지호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원은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일단 그 정도가 지호의 최선이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몸을 던지지 말 것, 그리고… 제 죽음이 이원과 연결되어 있으니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할 것.

    진지하게 다짐하는 지호를 이원이 무거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또 그러는지 평생 지켜볼 거야.”

    “그러든가.”

    지호가 얌전히 대답하자 이원이 웃었다. 별 의미 없이 웃는다기에는 지나치게 기뻐 보이는 모습에 지호는 괜히 찜찜해졌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평생 옆에 있는 거 허락해 주는구나, 싶어서.”

    “다, 당연히 같이 있는 게 당연한 거잖아.”

    “지호 말 꼬인다.”

    “시끄러워!”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얼굴이 화르르 불타오른 게 지호 스스로도 느껴졌다.

    아니, 원래도 이원과 평생 알고 지내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지금 말하는 게 예전의 지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걸… 여러모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이원이 지호를 끌어안았다. 불편하게 닿는 것 때문에 지호가 몸을 빼려고 하는 순간, 이원은 지호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나야말로 미안해.”

    “……뭐가?”

    이원이 딱히 미안할 건 없는데. 이원은 대답하는 대신 지호를 애타게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짐작가는 게 없지는 않아서, 지호는 이원을 함께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화 안 났어.”

    “화?”

    “네가 날 이플리스로 데려간 거. 나를 위해서 데려간 거였잖아. 날 강하게 만들어 주려고…….”

    이제는 이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지호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이원은 “아, 그렇지. 응.”하고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차원 이동에 실패한 것도 누군가의 수작이 맞았겠지. 그때 너 진짜로 당황했고… 네가 할 거면 좀 더 그럴싸한 수를 부렸을 텐데.”

    “맞아.”

    조용하던 이원이 조금 흥분해서 끌어안은 팔을 풀고 억울하다는 듯 격하게 긍정했다.

    “내가 수작을 부릴 거였으면 더 정교하게 했지, 그런 뻔히 보이는 수로 하겠어? 자기는 날 뭘로 보는 거야?”

    “……개새끼?”

    “개새끼이긴 해도 똑똑한 개새끼라고!”

    “맞네, 맞아.”

    근데 그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이냐? 이원을 흘겨보던 지호는 끌어안았던 몸을 떼어 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네가 한 짓 맞지?”

    “아닌데?”

    “맞잖아.”

    “…….”

    “…….”

    “어떻게 알았지?”

    “그냥 감이야.”

    으휴. 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지호가 못 믿어줘서 제대로 삐졌으니까. 두 번째는 엿먹어라 하고 진짜로 실패해 버린다는 건, 이원의 성격 상 꽤 잘 어울렸다. 근거 없는 찌르기에 당해 버린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발뺌하는 건데.”

    “……다음부터 안 속일 생각을 해야지.”

    “으응, 알았어.”

    이원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투로 말했다. 너도 맹세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려던 순간, 이원이 시선을 멀리 올렸다. 도시로 날아갔던 새가 돌아오고 있었다.

    타이밍도 좋지.

    지호가 납치된 동안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아라베크는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당장은 때가 아니었다.

    이원의 손으로 올라간 새는 스르르 녹아 이원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갔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던 이원이 씩 웃었다.

    “찾았어.”

    “어때?”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아. 주변에 각성자가 좀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성벽으로 슬쩍 들어가는 게 낫겠어.”

    “응.”

    성벽 쪽에도 결계가 걸려 있지만, 이원이 있는 이상 마법으로 설치한 결계 따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목표와 최대한 가까운 성벽을 넘어 몰래 진입한 후, 최대한 조용히 여자를 빼낸다. 간단한 계획을 짠 후에 지호는 검을 쓸 수 있도록 허리에 찼다.

    “자기, 얼굴 잘 가려.”

    이원은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는 대신 지호에게 넓은 천을 건넸다. 지호는 이원을 따라 천을 얼굴에 감고 머리에 씌워 모습을 감췄다.

    “이게 더 눈에 띄는 거 아냐?”

    “안을 보니까 이러고 많이 다니더라고. 그럼 가자.”

    이원이 미리 봐둔 지점으로 가서 두 사람은 순식간에 단단한 성벽을 넘었다. 그렇게 지호는 이원과 함께 무법지대나 다름없다는 도시, 무치스 안으로 들어왔다.

    무치스는 어제 머물렀던 티항크보다 훨씬 더 번화했고 안정적이었다. 무너졌다고 보수한 건물이 많았고, 도시 내부의 사람들 또한 꽤 마음 편히 돌아다녔다. 물론, 편히 돌아다니는 건 일부에 불과했다.

    가슴 펴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이들은 모두 각성자다. 거리는 돌아다니지만 각성자가 아닌 이들은 죄다 몸을 숙인 채 각성자의 눈치를 봤다.

    “저게 각성자의 표식인가 본데.”

    각성자의 가슴팍에 달린 뱃지로 비각성자도 각성자를 알아볼 수 있게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각성자의 배지가 계급의 상징으로 느껴져서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저걸 뒤엎을 수는 없겠지만…….

    그때, 저 멀리서 요란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단단한 수갑과 족쇄를 찬 채 안으로 끌려들어오고 있었다. 거칠게 저항하자 각성자는 상대의 머리채를 잡고 배를 세게 가격했다. 움찔하는 지호를 이원이 붙들었다.

    “심정은 알겠지만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알아.”

    니어트의 말처럼 무턱대고 나서는 게 능사는 아니다. 우선해야 하는 건 이 세계의 관리자를 구하는 일. 알고는 있지만 모든 이를 구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언젠가는 꼭 구해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지호는 상대의 얼굴을 기억 속에 새겼다.

    “나도 저렇게 됐겠지.”

    “뭐가?”

    “여기 오자마자 납치당했거든. 정신 차리니까 납치범 마차 안이더라.”

    지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가,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지호에게 조금의 흠집 나는 것도 못 견디는 녀석인데… 역시나, 이원의 눈이 분노 가득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지호는 누가 보기 전에 잽싸게 이원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나가면 안 된다고 한 건 너야.”

    “괜히 그랬네.”

    “무사하니까 됐잖아.”

    “그 개새끼들, 죽여 버릴 거야.”

    “이미 내가 죽였어.”

    태연하게 말하려는데 목소리 끝이 떨렸다. 괜히 그 순간을 떠올려서 얼굴도 엉망일 것이다. 첫 살인은 지호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을 낙인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은 제 기분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어쩌면 더 죽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는데 이원이 지호를 붙잡아 몸을 돌렸다.

    “자기야, 괜찮아?”

    “괜찮아.”

    걱정이 담긴 이원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지호는 몸을 돌렸다. 지호를 아끼는 이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누군가를 죽인 것으로 위로 받고 싶진 않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위협했어도 목숨을 앗아가는 건 지호에게 옳지 못한 일이니까.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어서 가자.”

    “……그래.”

    이원은 더 이야기하는 대신 순순히 지호의 뒤를 따랐다. 지호는 이원과 함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 길을 지나 좁은 길로 들어갈수록 부서진 채 방치된 건물이 늘어났다. 몬스터의 눈을 피하기 위함인지 건물 위로 천막을 쳐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제대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활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피로한 눈을 한 노인이나, 배가 고픈지 늘어진 아이가 종종 눈에 띌 뿐.

    각성자들은 퍽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는데. 몬스터를 죽이는 대가로 비각성자의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을 상황이 뻔히 보였다.

    “최악이야…….”

    “균열이 발생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세계는 이럴 수밖에 없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멸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원이 퍽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지호도 조금은 이해했다. 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던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여기, 마력 흐름이 이상하지 않아? 뭔가 수상쩍어…….”

    지호는 도시의 중앙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는데 도시 전체의 마력이 중앙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스킬이라도 쓰나,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없이 계속 모이고만 했다. 미약한 흐름이기는 해도 부자연스럽다.

    “그건 나중에 살피고 일단 목표물부터 챙기자.”

    “응, 그렇지.”

    이원이 정신 팔린 지호를 말렸다.

    초기 임산부를 무사히 도시에서 빼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괜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길이 점점 좁아져 두 사람이 나란히 다니기 힘들 지경이 됐다. 원래는 조금 더 넓었겠지만 부서진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던 탓이다. 앞장서서 한참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간 끝에 이원이 멈춰 섰다.

    “여기야.”

    꿈에서 보긴 했지만 솔직히 문은 거기서 거기 같았는데, 이원은 정확히 짚어 냈다. 때맞춰 이원이 오지 않았다면 퍽 고생할 뻔했다.

    지호는 앞장서서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네. 들어오세요.”

    조금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지호는 이원과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꿈속에서 봤던 집이 맞았다. 의자에 앉은 여자 역시 꿈과 똑같았다. 비쩍 마른 몸과 초췌한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선명하게 빛났다.

    꿈에서와 달리 외출복을 입은 그녀의 발 아래에는 미리 싸 둔 짐이 놓여 있었다. 여자는 목발을 짚은 채 느릿하게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실리타 엘폰 쥬메르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신지호고, 이쪽은 주이원이에요. 그런데 저희가 올 걸 먼저 알고 계셨나 봐요?”

    “꿈에서 계시를 받았어요. 신지호 님도 같은 이유로 오신 것 아닌가요?”

    “맞아요.”

    혹시나 하였는데. 시스템은 지호와 나실리타, 양쪽에 미리 언질을 해 뒀다. 덕분에 설득할 필요가 없어서 일이 쉬워졌다. 나실리타가 배를 감싼 채 몸을 숙여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미리 알고 계시다니 잘됐네요. 일단 이 도시를 탈출하죠.”

    “어디로 가실 건가요?”

    “티항크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이미 준비를 마친 덕분에 곧장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지호는 나실리타의 짐을 들고, 이원은 나실리타를 안았다.

    필요해서 나실리타를 안아 든 건 아는데… 지호는 이원이 자신이 아닌 남을 안는 걸 보고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해졌다. 이원은 그런 지호를 보고 씩 웃었는데, 그게 참 얄미웠다.

    “그럼 갈까.”

    “……응.”

    빨리 성 밖으로 나가서 저 꼴을 눈에 안 담아야겠다. 지호는 왔을 때보다 훨씬 서두른 채 앞서서 무치스를 빠져나갔다.

    티항크로 돌아가는 길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길었다. 아무래도 임산부와 동행하다보니 극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침묵과 긴장 속에서 티항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오르가가 일행에게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신지호 님! 게다가 일행이…….”

    늘어난 일행을 살피던 오르가의 눈이 커졌다.

    “나, 나실리타 님?”

    “여기 있었군요, 오르가.”

    어째 둘이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가까운 사이. 지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사정을 설명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호는 뭔가 짐 따위가 무너졌으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쓰러진 건 짐 따위가 아니었다.

    바닥에 쓰러진 건 주이원이었다.

    “자, 장난치지 마.”

    이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휘청휘청 다가가 자리에 무릎 꿇고 이원을 살폈다. 조금 차가운 몸은 미동도 없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 * *

    이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힐러를 데려오라고 난리를 치다가 겨우 이원을 방 안으로 옮겼다. 일단 회복 스킬을 쓰고 포션을 있는 대로 먹여 봤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힐러 대신 찾아온 의사는 이원을 한참이나 살피더니 맥 빠지는 결론을 내놓았다.

    “잠들어 계십니다.”

    “……잔다고요?”

    “네. 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그냥, 잠?”

    “네. 확실합니다.”

    몇 번이고 확인했으나 의사의 대답은 같았다. 의사는 이원이 깨어나면 몸보신을 해 주라는 충고를 남긴 채 나갔다.

    지호는 맥이 빠진 채 이원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강했던 이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쓰러져 잠을 자야 할 만큼 기력이 떨어진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 때문인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며 지호는 이원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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