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세계(5)
이원은 지호를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은 채 앞으로 손을 뻗었다. 지호를 향한 손길은 그래도 다정했지만, 눈앞의 적을 보는 눈빛은 차디찬 살의로 번뜩였다.
강대한 마력이 불온한 기운을 담고 머리 위로 몰린다. 이원은 조금 전 각성자가 썼던 마법과 닮았지만 훨씬 거대한 얼음 기둥을 만들어 냈다. 원뿔 모양의 얼음의 뾰족한 곳이 각성자의 머리를 향한다.
이원이 지호의 손을 눈으로 가리기 전,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무자비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퍽.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그 소리만이 폐허 위의 정적을 찢었다.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한 죽음.
지호의 몸이 떨렸다. 어제 사람을 죽인 게 떠올라서 구역질이 밀려왔다.
“주이원, 너…….”
“끔찍하니까 눈 뜨지 마.”
“…….”
지호는 이원을 탓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이원이 하지 않았다면 지호가 해야 했을 일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설프게 넘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이원은 화내지 않는 지호가 의아한 듯 잠시 내려보다가, 지호가 시신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아 들었다. 주변 폐허 중 그나마 높은 벽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서야 이원은 지호를 내려 주었다.
가볍게 현기증이 나서 지호는 휘청거리며 간신히 섰다. 어느새 해가 높게 떠, 해를 등지고 선 이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 상한 곳은 없나, 자세히 보려는데 이원이 눈을 깔며 지호의 시선을 피했다. 늘 당당하게 똑바로 바라보던 이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주이원?”
괜히 불안해져서 지호는 이원의 양 뺨을 붙잡고 가까이 당겼다. 이원은 무척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미안해.”
“으, 응?”
뜬금없는 사과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호는 눈을 깜박였다. 이원은 잔뜩 주눅 든 채 연신 사과했다.
“내가 널 이플리스까지 데려다 놓고 위험에 빠지게 했잖아.”
“어, 아니, 난…….”
“괜찮다고 하지 마.”
“…….”
괜찮다고 하려던 게 아니라 나도 몸을 막 던져서 미안하다고 하려던 건데. 이렇게 주눅 든 이원의 모습은 드물다. 지호는 이원의 어깨를 응원하듯 툭툭 두드렸다.
“난 괜찮아.”
“그놈의 괜찮다 소리 좀 하지 마.”
“…….”
반사적으로 성질내는 걸 보니 기운이 아예 없지는 않은가 보다. 이원은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야, 어딘?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었어?”
“내가 할 말이야. 넌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자기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
“내가 자기 마력 찾아서 차원 넘었던 또라이잖아. 지금은 좀 더 확실한 이정표가 있으니 찾기 쉬웠지.”
이원은 지호의 왼손을 잡고 반지 위에 입 맞췄다. 이거 무슨, 위치추적기도 아니고…….
“아무 때나 이걸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조건이 필요해.”
“알았다, 그래.”
지호가 빼 달라고 난리를 칠까 봐 잽싸게 변명하는 이원의 말에 지호는 얌전히 수긍했다. 이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
“그보다 자기야. 나도 묻고 싶은데, 왜 이런 곳에 있어?”
“어, 그게, 여긴 완전히 다른 차원인데…….”
“그건 알지. 내 말은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서 있냐는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퍼부을 듯한 이원의 반응에 지호는 잽싸게 상황을 설명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세계였고, 도시로 갔더니 몬스터가 습격하고 있기에 도와줬다. 이후 시스템창과 연결되어 관리자 대리가 되었다.
왜 시스템창이 지호에게 패를 까 보이나 싶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지호에게 제안을 해 왔다. 관리자가 태어날 때까지 지켜 주면 그 대가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기로.
“그래서 지금 그 부탁을 지키러 온 거야.”
일단 검술에 관한 이야기는 아껴 두었다. 나중에 보여 주면서 이원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원이 지호의 손을 잡았다.
“자기야, 꿈속에서 본 그 여자 얼굴 기억해?”
“응? 응.”
“그대로 계속 생각해 볼래? 추적 마법을 써 보려고.”
“어, 알았어.”
추적 마법이라니, 다 밀어 버리고 찾아오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원치고는 온건한 반응이지만 되도록 희생 없이 해결하고 싶었던 지호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지호는 눈을 감고 지난 밤 꿨던 꿈에 관해 생각했다. 지쳐 보이는 얼굴과 달리 선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꿈에서 잠깐 봤을 뿐이지만 계시에 가까운 꿈이기 때문인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원이 손을 들어 마력을 모았다. 희미한 푸른빛을 띤 마력이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었다. 이내, 파랗고 작은 새가 저 멀리 도시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주변 정찰 좀 하자. 어디로 들어가는 게 좋을지 좀 보자고.”
“몰래 들어가게?”
이원의 성격이라면 당당하게 들어가서 행패를 부릴 줄 알았더니. 의아하게 쳐다보자 이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호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싫어하긴 하는데… 네가 나 싫다고 번거로운 수 쓸 놈이야?”
“자기를 생각하는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거야?”
지호는 능청을 부리는 이원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어째 수상하다. 이원은 이유 없이 제 방식을 바꿀 놈이 절대 아니었다.
지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이원이 다소곳하게 팔을 엑스자로 들어 제 몸을 가렸다. 그 웃기지도 않은 짓에 코웃음 치며, 지호는 다짜고짜 이원의 옷을 잡아당겼다.
“꺄악.”
“꺄악은 무슨.”
지호는 과장된 이원의 비명을 무시하고 마저 옷을 벗겼다. 벗겨진 옷 아래, 단단하게 근육 잡힌 몸이 보인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분명 아라베크는 지호를 몇 번이나 죽였다고 했으니 그 충격이 고스란히 이원에게 전해졌을 터.
지호는 이원의 몸을 꼼꼼히 확인했다. 이원의 가슴을 주무르며 구멍이라도 뚫린 게 아닌지 살피고, 어디 하나 날아간 건 아닌지 팔을 만지고, 안이 푹 꺼져 있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며 배도 더듬어 보았다.
어디 하나 이상한 곳은 없다. 여전히 의심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괜찮아?”
“자기가 만지는 바람에 안 괜찮아졌어.”
“뭐? 미안, 어, 어디가?”
이원이 지호의 손을 가져다가 제 몸에 문질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변화가 보이는 그곳을 만진 지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야!”
“음,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그러게 누가 남의 손으로 문지르래!?”
“궁금해했잖아.”
“말로 해, 말로! 손을 가져다 댈 필요는 없잖아!?”
“에이, 지금까지 계속 더듬어서 확인했으니 여기도 만져 줘야지.”
“시, 싫어.”
지호의 분명한 거절에도 이원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감촉에 지호는 진저리쳤다.
“자기야, 여기도 예뻐해 줘…….”
“아니. 아니 근데, 뭐, 뭘 했다고 이렇게 되는 건데?”
“뭘 했냐니, 자기가 날 여기저기 주무르면서 희롱해놓고 발뺌하는 거야?.”
“희롱 같은 거 안 했어! 으, 은근슬쩍 문지르지 마…….”
“음, 알았어.”
생각보다 순순히 이원은 지호의 손을 놔줬다.
“그래도 책임은 져야지?”
“책임은 무슨 책임…….”
“희롱만 하고 넘어가려고? 나빴다.”
“나쁜 건 너, 읍…….”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원의 입술이 지호의 입을 막았다. 사실 이럴 줄 예상했으니 진작 도망쳤으면 됐을 텐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 지호가 생각에 빠져 있으려니 이원이 집중하라는 듯 지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읏…….”
이원을 밀어내던 지호의 손길은 허공을 배회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원은 늘어진 지호의 손을 잡아 제 목에 감았다. 지호는 망설이다가 이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이원이 제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여 지호는 멋대로 파고드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여기 막 떨어졌을 때는 온갖 걱정을 다 했는데, 다시 만나게 된 게 너무 기뻐서…….
숨이 섞이고, 입술이 맞닿는다. 따뜻한 온기가 옮아붙을수록 머리에 점점 더 열이 올랐다.
“읏, 그, 그만…….”
“숨을 쉬어야지.”
웃으면서 이원은 순순히 물러났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지호는 여전한 의심의 눈초리로 이원을 감시했다.
겉보기에는 확실히 괜찮지만, 지호에게 뭐라고 할 게 못 될 만큼 이원 또한 몸을 막 쓰며 무리하는 녀석이니까.
“자기, 나 진짜 못 믿는다.”
“그럼 믿겠냐? 네 행실을 생각해.”
“억울해라…….”
“네 성격이면 당연히 다 밀어 버리고 쳐들어가겠지. 안 하던 짓을 하는데 그럼, 안 의심스러워?”
“나도 상황 봐 가면서 뒤집는다고.”
이원이 억울해했다. 그다지 설득력 없는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이원은 턱을 까딱여 황량한 광야를 가리켰다.
“시스템의 목적은 관리자를 살리면서 이 세계를 유지하는 거야. 인구 많은 곳에서처럼 다 죽일 수는 없어. 관리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구가 다 줄어들면 게임 오버라고. 그러니 최대한 안 죽이는 쪽으로 가야지.”
“……방금 죽였잖아.”
“되도록 죽이진 말자는 거지. 곧장 쳐들어가서 도시 단위를 적으로 돌렸다가 죄다 죽여야 하면 어떡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되, 목격자는 죽이는 게 깔끔해.”
“…….”
“나도 나름 노력할 거야. 굳이 세계 하나를 말아먹을 필요는 없잖아. 지호가 평생 신경 쓸 텐데.”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일단 납득했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며 시스템의 의뢰를 수행하고, 대가를 받아서 돌아가면 끝. 거슬리는 놈을 청소하는 건 지구에 가서 열심히 할게.”
“지구에서도 하지 마라…….”
“자, 그럼 시스템이 돌려보내 줄 때까지 힘내자. 제일 안전한 차원 이동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이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원이 픽 웃었다.
“이제 나한테 안 속고 바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아니, 안 했거든?”
“정말? 할 말 있는 얼굴이었는데.”
“그건 맞아…….”
조금 전 타이밍을 놓쳐 이원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지호는 조금 긴장한 채 이원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미안해.”
“네가 왜?”
이원은 지호가 사과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화내 놓고서. 지호는 고개를 숙였다.
“네게 내 죽음을 전가한 거.”
“…….”
“내가 내 몸을 신경 쓰지 않은 거.”
“.......”
“이젠 안 그럴게.”
지호는 다짐을 담아, 진심으로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