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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세계(2) (176/283)
  • 25. 이세계(2)

    도시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니어트의 말처럼 그곳은 안전하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시커먼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시 쪽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은 분명 이건 균열이었다. 지호는 마차를 끌다가 굳어 버린 니어트가 정신 차리도록 붙들었다.

    “정신 차리고 잠깐 여기 있어. 내가 가 볼 테니까.”

    “아니, 나도 같이 가.”

    “……그래.”

    잠깐 망설이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혼자 남아 있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지호는 마차를 몰 줄 모르니, 차라리 니어트와 함께 빨리 도시에 도착해 대응하는 편이 나았다.

    가까이 다가간 도시는 오기 전에 기대한 만큼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쓴 능력의 흔적인지 땅 자체가 솟아오른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지만 이미 제 기능을 다 못할 만큼 군데군데 허물어졌다. 도시 내부의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고, 대신 세워 둔 천막은 초라하게 불타고 있다.

    “니어트,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피해.”

    대답을 들을 여유도 없이, 지호는 급하게 도시 안쪽으로 달려갔다.

    오면서 잔뜩 긴장하며 예상한 것과 다르게, 도시 내부를 습격하는 몬스터 대부분은 고작 C급 정도였다. 가끔 B급 수준의 몬스터가 보이지만 대단한 건 아니다.

    몬스터의 등급에 비해 지나치게 밀린다고 생각했던 지호는 이내 그 원인을 깨달았다.

    이전에 본 시스템창에 따르면 생존 안정권에 들어선 세계는 10% 미만.

    균열이 발생한 지 채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궤멸에 이른 이 세상에 싸울 만한 각성자가 많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수많은 각성자가 죽어 버린 이 세계에서는 지구라면 손쉽게 대응할 수준의 균열에도 대응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지호는 균열 대응에 익숙한 헌터다. 관리자로 각성하기 전에 노네임의 길드장으로 활약하며 매일같이 하던 게 몬스터를 상대하던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지호가 오랫동안 봐 오며 익힌 이 검술은 함께 균열에 대응하던 임승주의 것이다. 1년간 다수의 몬스터를 죽이는 데 특화된 검술은 이 순간 더 빛을 발했다.

    문제는 수가 많다는 것. 하지만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이상, 그건 지호가 부지런히 움직이면 해결된다.

    거침없이 달려간 지호는 사람을 공격하던 몬스터의 목을 찔렀다. 단 일격에 C급 몬스터가 나가떨어진다. 지호는 몬스터의 마력이 급속도로 꺼져 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다른 몬스터를 공격했다. 다시 한번, 일격에 몬스터의 숨이 끊어진다.

    ‘내 몸이 이렇게 가벼웠나?’

    아무리 스테이터스가 이전에 비해 늘었다고는 해도 마력에 치중하여 오른 데다가… 검술 스킬은 F급인데 불과한데도 상대하기 너무도 쉽다.

    독에 당하고 휴식도 취하지 못한 몸은 무척 피곤한데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검은 더욱 거침없이 뻗어갔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지호의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확실히, 스킬의 존재가 편했다. 스킬이 없을 때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거침없이 지호가 베어 낸 몬스터가 쌓이고, 또 쌓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집중된 걸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베어낸다. 점점 더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변했고 대응하는 방식 또한 유연해졌다.

    그렇게 균열에서 쏟아진 몬스터를 상당수 정리했을 때…….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던 지호가 급히 물러났다. 조금 전 각성자에게서 빼앗아 휘두르던 검이 부러졌다. 지호의 얼굴에 짙은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무기가 있어야만 제대로 스킬을 쓸 수 있다. 제대로 된 검이 아니라도 좋으니, 뭔가 휘두를 만한 게 없는지 지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호의 눈에 들어온 건 무기가 아닌 수많은 죽음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지호가 모두를 살릴 수는 없었다. 알고 있는데도 잔혹한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동요했다.

    그래서였다. 막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는 몬스터를 보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곧장 달려가 몬스터에게 주먹을 내리찍은 게.

    “큭!”

    몬스터의 단단한 껍질과 부딪친 주먹이 으깨질 것처럼 아팠다. 다행히 몬스터도 피를 뿜으며 쓰러졌지만, 이대로 싸운다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도저히 무기를 찾을 만한 여유가 나지 않았다. 지호는 일단 뼈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무시한 채 맨몸으로 몬스터를 상대했다. 최대한 단단한 껍질 부분을 피해 공격했지만 검을 쓸 때와 다르게 조금씩 상처가 늘어났다.

    “후…….”

    조금씩 한계가 찾아온다. 점점 몸이 무거워졌지만 지호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힘겨운 몸을 이끌어가던 그때.

    “니어트!”

    분명 마차에 남아 있을 줄 알았던 니어트가 지호의 눈에 보였다. 니어트는 무너진 천막 아래에 깔린 저보다 작은 아이를 꺼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니어트의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비행형 몬스터가 니어트를 노리고 곧장 날아들고 있었다.

    너무 늦게 발견했다.

    불안정한 자세로 달려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힘들다. 어떻게든 니어트를 감싼다면 보호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대로 달려가려던 지호의 발이 무언가에 잡힌 듯 순간 멈춰 섰다. 아주 잠깐 망설인 결과는 곧장 참혹하게 나타났다.

    “아아아악!”

    몬스터가 니어트를 잡고 들어 올리려는 듯 얼굴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사납게 얼굴을 쥐어뜯는다. 지호는 곧장 달려가 몬스터의 날개를 잡은 채 발을 휘둘렀다.

    퍽!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몬스터의 머리가 날아간다. 니어트는 몬스터의 시체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쇼크로 기절한 니어트를 돌볼 새도 없이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가 지호에게 검을 던졌다.

    얼결에 검을 받아든 지호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에 절박한 기대가 서려 있다.

    지호는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새 검은 날이 잘 들었다. 지호는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베고, 또 베어 내고, 피투성이가 된 채 미끄러운 손으로 검을 잡고… 더 이상은 힘들다고 생각할 때까지 베어 냈다.

    무척 숨이 찼다. 지호는 문득 제 숨소리가 지나치게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

    더 이상은 죽일 적이 없다. 사방은 완전히 적막해진 채 숨을 죽이고 있다. 수많은 죽음 사이에서 지호는 살아남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했다.

    “와아아아아!”

    지호와 눈이 마주친 게 신호라도 되는 양,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이 생존에 기뻐하며, 지호를 구원자처럼 여기면서, 제 감정을 모조리 쏟아 내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롯이 제게 기대와 감사가 쏟아지는 감각.

    지호는 잠시 멍하니, 환호를 들으며 서 있었다.

    * * *

    지호가 아니었다면 오늘 멸망을 면치 못했을 도시였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도시의 영웅이 된 지호는 곧장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지호가 모든 사람을 구해 낸 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지호가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모두를 살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니어트는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눈을 잃었다. 얼굴 반쪽에도 꽤 흉한 상처가 남았다. 힐러는 목숨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잃은 니어트가 더 담담해 보였다. 지호는 정신을 차린 니어트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니어트, 미안해.”

    “뭐가?”

    “지켜 주지 못해서.”

    니어트는 황당하다는 듯 지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곳을 구한 영웅이지만 힐러가 부족해서 지호는 완벽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얼굴 이곳저곳에 붙여 둔 밴드, 몸을 감싼 붕대, 그 위로 스며든 희미한 붉은 빛을 보고 니어트는 기가 찼다.

    “무슨 소리야, 살려 줘 놓고.”

    “내가 어떻게든 널 감쌌더라면…….”

    “그런 말 하지 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니어트 때문에 지호가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조금 전까지 태연했던 니어트는 제 원수라도 마주한 것처럼 이를 악문 채 지호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전력이 되는 사람은 몸을 아껴야 해.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이 도시는 전멸이었어.”

    “…….”

    “누군가 위험해도 신경 쓰지 마. 사소한 건 죽든 말든 무시하란 말이야. 알았어?”

    곧장 대답하지 못하는 지호를 노려보던 니어트는 홱 몸을 돌려 누웠다.

    “잘래.”

    노골적인 축객령이었다.

    지호는 니어트의 말을 곱씹으며 무거운 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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