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균열(5) (174/283)
  • 24. 균열(5)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준다니. 듣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만… 저렇게 매혹적인 제안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죠?”

    “말이 빨라서 좋군요. 주이원 님을 죽여 주십시오.”

    말이 빨라서 좋기는… 지호는 제 귀를 의심했으나 상대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미쳤어요?”

    “미친 건 주이원입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최근 들어 익숙해진 목소리… 아라베크였다. 어떻게 자신을 빼돌렸나 했더니, 아라베크라면 가능했다. 지호가 갇혀 있을 때 생활 전반을 맡겼을 만큼… 이원은 아라베크를 나름 믿고 있었으니까.

    “아라베크. 당신이 이원이를 배신한 거예요?”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아라베크의 얼굴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배신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올바른 왕을 섬기는 자. 그리고 지금의 왕은 나사르 님입니다. 주이원이 아니라. 지호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확실히 주이원의 존재감은 너무도 강렬하다. 이 세계의 왕이 된 나사르를 압도할 만큼. 주이원이 이 세계에 있는 한 나사르는 제대로 된 관리자로 성장할 수 없었다.

    그릇된 판단으로 이플리스를 멸망시키려던 왕, 테네브에게서 등을 돌렸듯이. 아라베크는 이원 또한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지구로 돌아가면 되니까.”

    “계속 실패하고 있잖습니까. 앞으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

    “만약 지구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곳으로 오면, 그때마다 저희는 휘말려야 합니까?”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어요.”

    한 번 이플리스로 도망가는 길을 선택한 이상, 두 번은 더 쉽다. 자주 오는 게 아니라도 이원의 존재는 매번 이 세계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게요.”

    영영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관리자가 없는 지구는 분명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끔찍한 참상을 여러 번 생각해 봐도 이원을 죽인다는 선택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저울 위에 올려두고 보니 알겠다. 지호는 이원을 놓고 다른 이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한 순간, 화를 내던 이원이 떠올랐다. 아마 이원이 가장 싫어하는 선택지는 이쪽이겠지.

    지호 자신의 안위는 저울에 올라가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제 몸에 붙은 황금을 떼어 나눠 주는 동화 속의 왕자처럼, 지호 역시도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물론 이제는 희생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호가 몸을 던지다가 자칫 잘못된다면 이원이 그 대가를 받게 될 테니.

    “어차피 내가 이원이를 죽일 방법도 없잖아요?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할 텐데.”

    “당신의 영혼에 걸고 주이원을 죽이기로 맹세를 받을 생각입니다. 성공하면 지구로 돌려보내 드리지요. 영혼을 건 맹세를 어기면 당신이 파멸할 텐데, 그분께서 알아서 죽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라베크는 이원이 지호를 위해 죽어 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호조차… 차마 아라베크의 추측에 부정할 수 없었다.

    지호를 살리기 위해 이원이 죽어 버린다면, 지호는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기억이 거의 없을 때조차 가족처럼 여겼던 이원이다. 여전히 그때의 감정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이원이 소중해서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이 지호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원과는 달리, 지호는 다른 소중한 사람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과 이원은 다르다.

    아마 이원이 없어도 지호는 계속해서 세상을 지켜 나갈 것이다. 이전에 하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세상을 지키겠지. 어차피 이원이 사라지는 순간 지호의 세상은 빛을 잃을 테니.

    가족에게 지호는 늘 걱정과 염려의 대상이었다. 지호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늘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자주 학교를 빠지다 보니, 친구들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각성하고 나서는 더더욱 누군가에게 틈을 보일 수 없었다.

    편하게 대한 건, 편하게 대해 준 건, 오직 주이원뿐이었다. 진심을 나눈 유일한 상대였다.

    그러니 이원을 좋아한 것도 당연했다. 세상에 오직 하나,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했더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태평한 상황이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뛰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주이원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당장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 맞춰 줄 텐데.

    물론 상황은 그런 달콤한 상상이나 하게 둘 만큼 느긋하지 않았다.

    “못 고르시겠습니까?”

    “생각을, 좀…….”

    생각은 이미 끝났지만… 지호는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았다.

    아라베크는 단순한 시종장이 아니다. 이원 때문에 갇혀 있는 동안, 시간을 때울 겸 아라베크와 검술 수련을 몇 번이나 해 봐서 잘 알았다. 최소 A급. 스킬을 쓴 적이 없으니 최대 S급.

    강한 상대를 눈앞에 두고 지호가 쓸 만한 수단이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시간 끌기뿐이다. 그조차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괜히 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낮게 중얼거리는 아라베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큭…….”

    시뻘겋게 물든 아라베크의 손에서 새빨간 피가 떨어진다. 아라베크는 피범벅이 된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당신을 빼돌리자마자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무슨 수를 써도 죽지 않더군요. 주이원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아라베크의 말에 지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이름을 간신히 억누른 채 아라베크를 바라보자, 그는 가엾다는 듯 지호를 바라보았다.

    “주이원이 구하러 오리란 생각은 버리십시오. 당신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 뒀을 게 뻔해서 저희 나름대로 만반의 대비를 했으니까요. 뭐, 그것도 이제 거의 효력이 끝나 가고 있지만…….”

    아라베크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지호가 걱정하는 건 이원의 안위였다. 아라베크가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충격은 모두 이원에게 갔을 테니까.

    무언가를 살피듯 고개를 내밀어 벽 너머 먼 곳을 주시하던 아라베크가 혀를 찼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지호의 멱살을 잡았다.

    “뭐, 꼭 제 손을 써서 죽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줄곧 아라베크와 지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용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제 몸에 곧장 칼을 박아 넣었다.

    “무슨……!”

    콸콸 흐르는 검푸른 피는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작은 갈래로 뻗어나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와 마력, 생명력을 모두 쏟아부은 마법진이 완성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용인은 미라처럼 말라붙은 채 자리에 쓰러졌다.

    “어차피 당신을 납치한 순간부터 살아남을 생각은 버렸습니다.”

    “아라베크…….”

    “멸망 속에서 비참하게 죽도록 하세요.”

    차분하게 말하는 아라베크의 몸은 서서히 짓무르다가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몸이 엉망으로 무너지는 게 아프지 않을 리 없는데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분하게 웃는 얼굴이 소름 끼쳤다.

    아라베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지호의 발밑으로 거대한 어둠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곧장 지호의 몸은 그 아래로 추락했다. 끝을 모를 만큼 깊은 곳으로.

    * * *

    목이 말랐다. 지나치게 마르고 갈라져 찢어질 것처럼 따가웠다. 바닥이 흔들릴 때마다 배가 욱신거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머리에 오른 열 때문에 수분이 다 말라붙은 탓인지 그조차 나오지 않았다.

    “…….”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지만 지호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이곳이 어디인지 곧장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작은 빛만이 안을 희미하게 비출 뿐,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이동 수단을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마차가 아닐까 싶었다.

    아래에 깔린 더러운 천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오물과 피비린내가 함께 뒤섞인 냄새가.

    “흐윽…….”

    작은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지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마차 구석에 어린아이 하나가 타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채, 손에 쇠고랑을 채운 꼴이… 딱 봐도 불법적인 느낌이 났다.

    다쳐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인지 지호는 묶여 있지 않았다. 대신 벌어진 상처에는 붕대가 얼기설기 묶여 있었는데, 오히려 감염될 것처럼 지저분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지호는 최대한 숨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둘. 하나는 일반인 같고, 다른 하나는… 아마 최소 C급에서 최대 B급 정도의 각성자. 그리고 마차를 끌고 있는 생물 두 마리 역시 각성 등급 D 수준이었다.

    만약 저 각성자가 B급 전투계라면, 보조계인 지호가 이기기는 불가능한 상대였다. 이 마차가 어디로 향할 지가 중요한데…….

    주변이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마차가 멈췄다. 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넘기고 쉬러 가자고. 피곤해 죽겠으니까.”

    “어이, 너희 둘. 빨리 나와!”

    밖에서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아이가 마차 안으로 숨어들었고, 상대적으로 문 가까운 곳에 있던 지호는 얼결에 머리채가 잡혔다.

    “야, 그 녀석은 살살 다뤄. 비싸게 팔릴 것 같으니까.”

    “팔리기 전에 재미 좀 보면 안 되나?”

    “값 떨어져, 임마.”

    낄낄거리는 상대에게서는 지호를 향한 경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호는 비틀거리며 내려선 채 주변을 살폈다.

    “…….”

    말문을 막히게 하는 풍경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무척 황량한 땅 위에 오래전 풍화된 듯한 건물의 흔적이 보였다. 그들의 앞으로는 아직 형태라도 알아볼 법한 건물의 잔해가 얽혀 있었는데, 마차로 갈 만한 길이 아니라서 내리라고 한 모양이었다.

    ‘멸망 속에서 비참하게 죽도록 하세요.’

    아라베크가 저주처럼 던진 말이 어렴풋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아마, 균열에 침식당한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일 것이다.

    “야, 뭘 보고 있냐? 손 내밀어.”

    각성자가 지호의 뒷통수를 손으로 퍽 내리치며 말했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지호를 보고 두 사람이 웃었다.

    “야, 빨리.”

    “…….”

    지호는 겁먹은 척 몸을 웅크리며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그런 척을 하다가, 최대한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여자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을 뽑아 뒤로 물러났다.

    한 손에 검을 든 채 지호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 지호를 한 번 보고, 제 일행을 한 번 보더니 시원스레 웃었다.

    “야, 지금 웃을 때야?”

    “괜찮아, 괜찮아. 다치고 쓰러진 꼴을 보니 끽해야 바트급이야.”

    걱정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마 바트급은 지구 기준으로 F급 정도가 아닐까. 지호가 F급은 아니지만 확실히 우습게 여길 만하다. 뺏어 든 검을 쥔 손은 부상의 여파로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남자가 건네주는 단검을 쥐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곱게 다뤄 줄까 했더니, 알아서 매를 버네. 자, 예쁜 소리로 울어 보련?”

    “또 시작이다. 살살 해라.”

    약한 짐승을 사냥하듯 두 사람은 지호를 비웃었다. 지호는 잔뜩 떨리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