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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균열(4) (173/283)

24. 균열(4)

그간 어떻게든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균형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유지되던 평온함이 박살 났다. 서로 다 알면서도 애써 평온함이 깨지자, 그 안에 있던 날것의 감정이 샅샅이 드러났다.

애증, 분노, 불신, 어느 것 하나 순수하지 않아 상대를 쉽게 상처 입힐 만한 감정들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입을 연 순간,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둘 다 없던 일로 되돌리려고 시도하진 않았다. 균형은 옛적에 무너졌고, 언젠가 이런 결말이 나오리란 것을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

“넌 이제 왕도 뭣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폐하라고 부르지 말라면서. 내가 보고 싶어서 네가 다 내려놓고 온 거라고 했잖아.”

“맞아, 그랬지.”

지호는 입술만 끌어 올려 웃으며 이원을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네 꼴을 봐. 어린애를 네 권위로 찍어눌러서 쫓아내고… 만족해? 심지어 네가 쫓아낸 건 그냥 어린애도 아닌데. 이곳의 왕이잖아? 그런데 지금은 꼭 네가 왕처럼 보여.”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그 꼬맹이가 그렇게 좋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집요하게 애정의 향방을 따져 묻는 이원에게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뭔데.”

“이플리스에 다시 돌아와서 왕처럼 구니까 즐거운가 싶어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전혀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이원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지호가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 것처럼 침묵하던 이원의 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손에 힘을 얼마나 준 건지, 손톱이 살을 파고든 것이다. 지호는 차마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지호가 약해진 순간, 이원이 움직였다.

“그 이유가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순간 이원의 모습이 흔들렸고 곧장 등에 거센 충격이 왔다. 몸이 벽으로 몰아 붙여진 채,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호를 벽으로 떠민 이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원이 지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싼 채 입을 맞췄다. 뜨거운 체온이 안쪽에 맞닿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원이 지호의 다리 사이를 꾹 누르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저항하기에는 이제 너무도 익숙한 감각이 지호를 지배했다. 이원에게 계속 모든 걸 맡기고 싶을 정도로.

처음에 느꼈던 거부감은 이미 희미해졌다. 희미해진 만큼 몸도 마음도 금세 달아올랐다. 끝까지 하진 않았지만, 고작 손장난으로 불릴 수준은 옛적에 지났다는 걸 지호도 잘 알았다.

처음에 했을 때보다 많은 것이 변해 버렸기에 더욱더 속수무책이었다. 이대로 포기하면 이원이 제 생각을 멈춰 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단순히 쾌락에 취해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지호가 이원을 세게 밀어 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지호를 부드러운 손길로 만지고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눈의 이원이 보였다.

지호의 뺨에는 마치 낙인처럼 이원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지호에게 고개를 바싹 붙인 이원이 사납게 속삭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네가 그 빌어먹을 차원으로 되돌아가면 같은 짓을 할 게 뻔하잖아. 내가 그 꼴을 또 보자고 널 돌려보내겠어?”

“이제 무모한 짓 안 할 거야.”

지호의 대답에 이원이 픽 웃고 빈정거렸다.

“퍽이나. 전보다 더 하겠지. 어차피 내가 대신 죽어 준다는 걸 알았으니까. 얼마나 편해? 게임처럼 죽어도 안 끝나고 다시 멀쩡히 시작할 텐데.”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지호가 이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싸늘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원의 멱살을 잡은 채, 지호는 그를 밀어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원과 달리 지호는 머리끝까지 흥분한 상태였다. 그대로 이원의 멱살을 잡은 지호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그럴 것 같아? 널, 죽이면서까지, 몸을 막 쓸 것 같냐고.”

“응.”

“…….”

“그러고도 남지. 넌 언제나 내가 먼저가 아니잖아.”

단정 짓는 말에 손이 힘없이 탁 풀렸다. 그저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기운이 빠졌다.

항상 노력하고 또 시도했다. 이원에게 제 뜻을 전달하고 그가 이해해 주기를. 그러나 늘 실패했다.

왜 항상 자신의 말은 이원에게 제대로 닿지 않는 걸까? 충분히, 솔직하게, 힘껏 전하고 있는데.

이원이 상체를 일으켜 맥이 빠진 지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원이 저주라도 하듯 속삭였다.

“넌 주이원 같은 건, ‘내가 잘하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하잖아.”

“……아냐.”

“아니, 넌 그럴 거야.”

“안 그래…….”

“매번 말만 그러지.”

“…….”

아무리 이야기해 봐도 둘의 의견이 맞닿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건, 지호와 이원의 기준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지호는 수많은 인간 중에 한 명인 이원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고, 이원은 수많은… 가치 없는 것 중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인간인 지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니까.

가장 기본적인 전제부터 다른데 뜻이 맞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호도 어렴풋이 주이원의 이런 사고방식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조금 안일했을 뿐. 이원도 이원 나름의 도덕과 규범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을 조금 막 대하기는 해도, 최소한 타인의 가치를 생각해 주리라고…….

그게 얼마나 낙관적인 생각이었는지.

이원의 세계에 오고 나서야 절실히 깨닫는다. 신지호가 알던 주이원은 이미 변해 버렸다는 걸. 고작 24년간 살아온 신지호가 주이원의 기나긴 세월을 바꾸긴 어렵다는 걸.

자신을 낯선 것처럼 대하는 지호를 본 이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널 구하자마자 내 목숨이 끊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주이원…….”

“그편이 너한테도 좋았을 거야. 차라리 내가 너 때문에 뒈졌으면… 이런 꼴 안 보고, 네 안에서 영원히 각인됐을 테니까. 안 그래?”

“아냐!”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절대로.

아무리 이원과 길이 갈라져도, 주이원이 하는 짓을 믿을 수 없어도… 설령 이원이 저를 이곳에 평생 묶어둔다 해도, 지호가 이원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주이원은 신지호에게 있어서 가족이고, 친구고, 그리고 또…….

“…….”

정확히 뭐라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족보다도 가깝고, 친구보다는 깊은 관계. 어쩌면 이원이 말한 것처럼 연인에 가까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 그의 죽음을 바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이원이 사납게 윽박질렀지만, 지호는 그 말을 들어주고 싶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눈이란 게 대체 어떤 눈일까. 이원은 외면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코 지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사납게 중얼거렸다.

지호가 입을 떼기도 전에 이원이 자세를 뒤집었다. 지호의 목을 꽉 붙들었다. 말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숨 쉴 곳마저 콱 틀어막은 손 때문에 숨이 막힌다. 지호는 버티지 못한 채 이원의 손을 떼려내려 애썼으나…….

지호의 몸이… 서서히 말라붙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원에게 살해당한 마법사처럼.

이원과 맞닿은 곳부터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와 온몸을 지배한다. 두려움에 차게 식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숨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윽…….”

목이 졸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슬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걸 본 이원이 움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지호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 * *

기억나지 않지만 기나긴 악몽을 꿨던 것 같다. 의식이 든 순간에도 악몽에서 깨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의 현실 또한 충분이 악몽이었기에.

“…….”

차라리 눈을 뜨고 싶지 않았지만 지호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눈에 보이는 건 이전과 다른 천장이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지호는 낯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이상하리만치 황량한 방이었다. 어딜 가든 화려하던 궁에 이런 방이 있었나, 의심될 정도로.

주변을 살피던 지호는 순간 위화감을 느낀 채 발목을 확인했다. 이제 몇 달간 익숙해진 발찌가 없었다.

의아해하던 찰나 문이 열렸다. 잔뜩 긴장한 지호에게 보인 것은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아라베크의 곁에 있는 걸 몇 번이나 본 궁의 사용인. 아라베크의 곁에서 몇 가지 일을 수행하긴 했지만 오늘처럼 직접 지호에게 다가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경계하는 지호에게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벌써 사흘이나 주무셨습니다.”

“사흘이나 잤다고요?”

“네.”

지호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저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건지, 아니면… 이전에 이원이 몇 번인가 그랬듯이 죽었다가 깨어난 건지조차 모르겠고.

지호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매만졌다. 목이 졸렸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딱히 아프진 않았다.

“음, 전 괜찮아요. 그보다…….”

“지호 님.”

“네?”

“지호 님께서는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상대의 이름이나 물으려던 지호는 생각도 못한 질문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상대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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