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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균열(3) (172/283)
  • 24. 균열(3)

    꿈을 통해 만난 여자가 다시 연락하기 전까지 지호가 할 수 있는 건, 방 안에 갇혀 조용히 지내는 것뿐이었다.

    지호가 얌전히 포기하자, 이원은 수상쩍게 느끼면서도 무척이나 잘해 주었다.

    조용한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주이원, 아라베크 그리고 가끔 놀러 오는 나사르뿐이었다.

    혼자만 있는 시간은 지루했다. 지호는 책을 읽거나, 연습용 목검을 휘두르거나, 잠을 자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을 때, 마침내 두 번째 차원 이동의 준비가 끝났다.

    결과는 실패.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는 남아 있었던 건지, 표정이 조금 굳어 버리긴 했지만.

    “지호야, 미안해.”

    사과하며 끌어안는 이원의 손길을 지호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됐어. 그래서 다음 준비는 언제 할 거야?”

    “음… 바로 해야지?”

    “그때까지 난 방에 가둬 둘 거고?”

    지금까지 내내 순했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무리 크다고는 해도 같은 공간에 갇힌 지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어간다. 이원은 그제야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음, 어디 놀러라도 갈까? 당장은 안 되고… 내가 곧 일정 잡아 볼게.”

    “그럼 그때까지 또 갇혀 있고?”

    “아니… 음, 그래.”

    이원이 지호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바지 아래 감춰진 발찌에 손을 댔다. 거짓말처럼 풀어지는 걸 기대했으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아라베크랑 같이 돌아다녀. 궁 안… 아니, 수도 안까지는 돌아다녀도 괜찮아.”

    선심 쓰듯 말하지만 결국 감시의 눈길은 거두지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 지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이원은 괜히 예쁘게 웃으며 지호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낯짝만 반지르르할 뿐 곱게 보이진 않았다.

    몸을 일으킨 이원이 지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자기가 너무 예뻐서 누가 납치하면 어떡해.”

    “……미쳤냐?”

    “요즘 자기, 내가 예뻐해 줬더니 분위기가 어째 전보다 좀 위험해져서… 아야.”

    지호는 빨개진 얼굴로 이원의 등을 마구 내리치곤 씩씩거렸다. 그래, 어차피 즐길 건 다 즐겼다 이거지…….

    “그러면 구경이라도 조금 더 해 봐. 나는 실패의 원인 좀 연구하러 가 볼게.”

    실패를 입에 담는 사람치고는 퍽 즐거워 보이는 태도를 보니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지호는 그냥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지호는 아라베크와 함께 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넓은 정원의 곳곳을 산책하고, 거대한 도서관에 들러 기밀로 취급되는 책의 데이터를 전송받거나, 무기고에 들러 연습용 검을 바꾸고, 식당에 들러 음식을 먹는 등 한이 맺힌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온 지호는 소매를 걷어 보았다.

    돌아다니던 중간에 손 위에 벌레가 앉았었는데, 이내 몸에 녹아내리듯 사라졌었다. 그 벌레가 남긴 흔적이 손목 안쪽에 새겨져 있다.

    “언제 접촉했는지 모르겠네.”

    한 달 넘게 침묵하는 상대가 접근할 방법을 못 찾나 싶어서 일부러 돌아다닌 효과가 있었다. 마침내 소득을 얻은 지호는 손목 위의 문장을 주시했다.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인데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지호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문장은 물을 섞은 듯 천천히 지워지더니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찬찬히 제게 건네진 지식을 살핀 지호는 실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전수한 방법은 다음 차원 이동이 준비될 때, 속으로 주문을 외워 마법의 흐름을 바꾸는 방법이었다. 이대로 실행하면 마법의 대상이 지호에게 집중되어, 지호 한 명은 온전히 차원 이동이 가능하도록 바꾸는 주문이었다.

    “이건… 못 쓰겠는데.”

    꿈속에서는 이원을 두고서라도 혼자 지구로 떠나겠다고 했지만, 지호는 이원과 영영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물론 차원 이동이 처음 실패했던 순간의 그 여유로운 낯짝을 생각하면, 확 혼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이플리스는 평화롭고, 두 사람의 사이도 언뜻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 넘어온 이후에는 줄곧 어딘가 삐걱거린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주이원이니까… 하면서 이해하는 척 넘겼지만 이건 엄연히 납치였다.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되었어도 결국 이 세계 안에서의 감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지호는 상대가 이원이라 꾹꾹 참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이었다면, ‘살의가 없어서’ 발현되지 못한다던 지호의 그 스킬을 진작 습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웃기는 건 지호가 참는 만큼 이원도 참고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 넘어오기 직전 이원은 전에 없이 분노했고, 이플리스에서 머무는 것으로 화를 억눌렀다. 억눌렀을 뿐, 해소된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이원이 지구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 건 당연하다. 결국 지호의 귀환은 이원의 뜻을 꺾고 부딪치는 것이다.

    다만, 이런 방법은 아니다.

    오랜 세월 지호가 자신을 버린 줄 알고 살았던 이원이, 다시 한번 지호에게서 버려진 감정을 느끼게 하긴 싫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이원을 한순간이나마 버리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 쪽지 자체도 의심해 봐야 한다.

    견고한 결계가 설치된 방 안을 뚫고 들어온 쪽지. 아라베크가 곁에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지호의 몸에 새겨진 마법. 그 모든 게 지호를 떠보려는 이원의 시험이라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생각하긴 싫은데…….”

    지호는 이마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뱉었다.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는 주이원의 성질머리가 역시 가장 큰 장애물이다.

    어쨌든 당장 쓸 방법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전해 준 방법은 기억 속에 새겨 두긴 하겠지만, 잔뜩 기대했던 방법이 무용지물로 돌아가니 맥이 탁 풀렸다.

    “역시 한 번 더 설득해 봐야 하나.”

    이원이 마음을 고쳐먹는 게 지구로 돌아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지호라고 갇혀 있는 동안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문제는 지호가 조금만 차원 이동 실패에 의구심을 품어도 눈을 희번뜩 뜨는 주이원이었지.

    왜 자신을 못 믿냐니, 그럼 평소에 믿음을 주도록 행동하든가.

    누군가 방해했다 쳐도 그 주이원이 두 번이나 실패하도록 방치했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성공하고 싶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시켰겠지. 정말 이원이 본인 말대로 억울하다고 쳐도, 열의가 없는 건 확실했다.

    그런 주제에 대놓고 속이고, 곤란하면 대충 넘어가고, 요즘은 아예 몸으로 무마하려 들어서…….

    “…….”

    진지한 생각 사이로 갑자기 불쑥 끼어든 생각에 지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한참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원의 얼굴이나… 입술이나 귓가, 뺨에 입 맞추며 단단히 쥔 채 움직이는 손짓 따위가 생각나 버렸다.

    대낮에 회상하기에는 너무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물론 회상 속에서도 해가 떠 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장가 다 갔네…….”

    이원은 ‘이 정도는 준비 운동도 안 된다’라며 뻔뻔한 소리를 했지만, 지호가 보기엔 이 정도면 할 거 다 했다. 주이원과 이렇게 방탕하게 놀아 놓고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을 리 없다. 어차피 결혼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호, 결혼해!?”

    벌컥 문이 열리며 나사르가 뛰어 들어왔다. 지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드, 들렸어?”

    “난 청각이 아주 좋다!”

    좀만 덜 좋아도 괜찮았을걸. 아무래도 관리자라 그런지 신체 능력이 평균을 아득하게 상회했다. 지호는 나사르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결혼 안 해.”

    “왜 안 하지?”

    “응?”

    “결혼하기 싫은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왜 다짜고짜 결혼이 주제가 됐지? 그냥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지호를 향해 나사르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그럼 내 비가 되겠는가?”

    “……뭐?”

    말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고장 난 양철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지호를 앞에 두고 나사르가 신나서 결혼 계획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준비는 반년 안으로 끝내자느니, 혼례복은 뭘 입냐느니… 지나치게 앞서가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처음 봤을 때처럼 아예 어린 애였다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최근의 나사르는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성장의 수준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초등학생 정도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였는데. 지금은 적어도 열일곱, 열여덟 살로 보였다.

    나사르의 종족은 알에서 오래 있었던 만큼 계기만 있으면 빠르게 성장한다고 하던데.

    성장이 느리던 나사르는 지호가 이곳에 왔을 무렵부터 빠르게 자라났다. 오늘은 지호보다 조금 작지만, 내일이나 모레쯤 되면 지호보다 커질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여러모로 결혼 얘기가 농담으로 안 들리는 게 문제다. 곧 결혼을 할 만한 외형으로 성장할 테고, 성장의 이유도 지호일 확률이 높으니…….

    “하지만 선왕께서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지호가 뭐라 한 마디 하기도 전에 나사르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뜻 태연하게 들리는 목소리지만 희미하게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이원이가 왜 나와.”

    “상관없나?”

    “상관없지.”

    “그럼 나랑 혼인할 건가?”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화제에 지호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너랑 결혼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이원이 네게 뭐라 하든 상관없다는 거지.”

    이제 이 세계의 왕은 주이원이 아닌 나사르인데, 뭐하러 용서받지 못할 걸 걱정한단 말인가. 아무리 이원이 강하다지만 이건 주객전도였다. 아무래도 이원을 어서 데려가야 할 필요성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하. 그럼 나도 자기 반대는 신경 안 써도 되는 거네?”

    그때, 뒤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호는 익숙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훔쳐 들어?”

    이원은 지호의 말에 답하는 대신 매서운 시선으로 나사르를 쏘아보았다. 나사르의 어깨가 놀라서 움찔거렸다. 이원은 손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 나사르.”

    “이, 이원 님.”

    “꺼지라고.”

    폭력에 가까운 언사에 나사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저를 돌아보는 이원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넌 뭘했길래 애가 저렇게 겁을 먹는 거야?”

    “이제 애도 아닌데.”

    “그래, 애가 아니라 여기 왕이지.”

    후우, 지호가 한참 전부터 끓어오르던 답답한 숨을 내뱉으며 감정도 함께 토해 냈다.

    “그리고 이제 넌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고.”

    “…….”

    이원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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