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플리스에서(6)
나름 한가할 줄 알았던 주이원은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덕분에 느긋하게 같이 있으려나, 했던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관광이라도 가듯 온갖 던전과 균열에 지호를 끌고 다니더니, 얼마 전부터는 차원 이동의 마법진을 연구하고 여기저기 결계의 보수를 한다며 돌아다녔다.
결계의 보수 쪽은 지호에게 전혀 미지의 영역인 데다 이원이 집중하면 제대로 챙겨 줄 수 없었으므로, 결국 지호는 남은 시간 동안 다른 곳을 관광하기로 마음 먹었다.
덕분에 요즘 지호는 트라벨 궁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오랜 세월 증축된 궁은 아름답고 장엄했으며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서, 어딜 쏘다녀도 지호에게 끝없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종종 밤에는 이원이 지호를 안내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가 없는 낮 시간에는 대부분 나사르가 동행했다. 하지만 오늘은 일이 있다며 나사르가 끌려가는 바람에, 아라베크가 동행했다.
주이원과 돌아다닐 때는 낯간지럽지만 마치 데이트 같았고, 나사르와 돌아다닐 때는 어린아이의 장단에 맞춰 궁에서 술래잡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는데. 아라베크와의 동행은 가이드와 함께 하는 트라벨 궁 답사 같은 분위기였다.
“역대 왕을 모두 통틀어도 주이원 님처럼 강한 분은 드뭅니다. 아니, 없다고 볼 수 있겠죠.”
‘내가 왜 폐하냐’라는 이원의 협박에 주이원 님이라고 부르게 된 아라베크가 이원이 만들고 여전히 유지되는 궁의 결계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아라베크의 궁 답사 가이드는 이런 식으로, 이원에 대한 칭송이 자주 튀어나왔다.
“그, 그 정도예요?”
“네. 아무래도… 선선대 왕을 꺾고 1000년 넘게 왕위를 유지하셨으니만큼, 강력한 왕이시죠.”
“선선대 왕이라면…….”
선선대 왕이라면 분명 테네브의 이야기다. 지호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네브는 이플리스를 멸망시켜 던전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테네브는 미친 왕이었지만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 아시는군요.”
“네. 사실 전 테네브의 곁을 지키던 시종장이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다 바쳐 모시던 분이었으니 그분의 계획을 알고 나서는 도저히 찬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세테르 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첩자가 되었고, 덕분에 살아남아 다시 시종장이 되었습니다.”
아라베크는 과거 자신이 한 선택에 확신이 있지만, 테네브의 곁에 있던 걸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세계멸망이라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계획한 자인데도 저런 반응인 게 신기해서, 그저 미치광이로만 여겼던 테네브라는 존재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테네브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삿된 생각을 하기 전에는 완벽한 분이셨습니다.”
“주이원보다 더?”
아라베크가 지호를 물끄러미 돌아보았고, 별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던 지호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 주이원도 잘났으니까…….”
“물론 이원 님도 완벽한 왕이십니다. 암살 시도가 수도 없이 일어났으나 모두 막아 내고, 종국에는 모든 이들이 그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암살 시도…….”
SSS급의 균열조차 이곳 각성자들은 힘을 합쳐 이길 수 있다. 당장 관리자를 죽인다고 해도 다음 관리자가 나타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여력이 된다.
그 상황이 오히려 이원에게는 독이었을 것이다.
생사의 기로를 넘을 뻔한 수많은 날을 지탱해 준 것이 지구의, 지호의 기억이었을까.
“이계에서 오래 살아오셨다 보니 반발하는 자도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테네브는 완벽한 왕이었기에… 더더욱 안 좋게 보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들 왕을 죽이려 들다니.”
“그러게요. 다들 어리석었습니다.”
아라베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뭐가요?”
“테네브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이 근처에 역대 왕의 초상화를 걸어 둔 홀이 있습니다. 한번 구경하러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베크는 곧장 초상화가 있는 홀로 지호를 안내했다.
초상화… 라고 해서 지구의 미술관 같은 곳을 생각했는데, 이 세계가 마법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됐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문에서 가까운 곳에 주이원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실체가 있는 건가요?”
“아뇨, 외형을 재현하는 장치입니다. 이건…….”
아라베크의 설명이 조금 더 이어졌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끔 지구에 전혀 없는 개념을 설명할 때 번역의 오류가 발생했다.
지호는 아라베크의 설명을 반쯤 흘려들으며 이원을 바라보았다. 지구에서와 달리 정말 위엄 넘치고 차가운 얼굴을 보는데,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조금 더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며 지호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3m쯤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왕좌 위에 앉아 있었다.
“아, 그쪽이 테네브입니다.”
테네브의 얼굴은… 뭔가 예상과 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성군이었다는 말을 들어도,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미친놈이라는 말에 내심 차가운 인상의 뱀과 같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체는 모든 걸 끌어안을 듯 포용력 넘치고 자애로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인간과 닮은 외모에 머리 양옆의 뿔과 희미한 푸른빛을 띠는 피부만이 달랐다.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
“미치기 전까지는 저 또한 이분을 숭배할 정도로.”
지호가 보기에는 그저 얄미운 놈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려던 순간,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호!”
“나사르.”
지호는 제게 달려온 나사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나사르는 가볍게 이마를 맞대 인사하고는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나사르. 일은 다 하고 온 거야?”
“도망친 거 아니다.”
지호의 추궁에 나사르가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대답했다.
“빨리 끝내고 왔어.”
“대충 끝낸 건 아니지?”
“…….”
나사르는 필사적으로 지호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호는 아이의 투정을 보며 픽 웃고 나사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했으면 됐어.”
“그래, 물론이다.”
긍정해주니 금세 나사르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런 나사르를 보는 지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꼬맹이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나사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였다. 그야 물론 2살이니 순진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원은 이따금 들여다보며 친절하게 굴어 줬지만, 아이들이라고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다. 나사르는 이원이 제게 조금의 관심도 없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대신 지호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필 수많은 사람 중에 왜 자신을 따르나 했더니, 나사르는 ‘나를 왕으로 대하지 않잖아.’라는, 어린애가 할 법한 그러나 충분히 이해되는 말을 했다.
원래는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치대는 어린애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나중에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 주었고, 지금은 꽤 따르게 되었다.
“나도 여기 자주 와 봤다.”
나사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호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하나씩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갈수록 왕이 살아온 세월이 짧았다. 아마 격동의 시대에 몸을 던지다가 일찍 생을 마감한 거겠지.
다만 이 세계에 처음 생긴 관리자는 예외로 오래 버텼다.
“위대하신 분이다.”
“그런 것 같네.”
강인한 눈빛의 전사가 경계하듯 주변을 노려본다. 그녀의 앞에는 지구의 흑백사진과 비슷한 자료가 케이스 안에 놓여 있었다.
“어느 시대든 첫 번째 왕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기반을 제대로 쌓지 못하면 그대로 무너지니까. 각성자가 많아야 버틸 텐데, 초반에 다 죽으면 더더욱 버틸 수 없게 되고.”
“맞다. 잘 아는군. 나도 좋은 왕이 될 거다.”
“응, 나사르는 분명 좋은 왕이 될 거야.”
“그러니 안심해. 앞으로도 이플리스는 안전할 테니까.”
시스템창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나사르에게선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직 어린아이지만 주관도 뚜렷하고 선량하니 분명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호는 나사르가 훌륭한 왕이 된 걸 보지 못하겠지만. 차마 진실을 말해 주지 못한 채, 지호는 의젓하게 말하는 나사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긴 휴가와 같았던 이계 나들이를 마무리하며 지호가 제일 진땀을 뺀 건 나사르와의 작별이었다.
이원은 그런 꼬맹이 신경 쓰지 말고 몰래 가자고 매정하게 말했지만, 지호는 갑자기 사라져 나사르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지호의 생각보다 나사르가 때를 쓰는 파장은 컸다. 아직 어린 데다 이원보다 약하다길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싫다. 가지 마. 내가 좋은 왕이 될 테니까…….”
울면서 매달리던 아이는 지호가 거듭 거절하자 폭발했다. 고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흥분해 무의식적인 마력 폭주를 일으켰고, 자칫하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이래서 조용히 가자고 했는데.”
이원이 없었더라면 분명 인명피해가 났을 것이다. 혹시 몰라 데려온 게 다행이었다.
이원은 채 눈물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축 늘어진 나사르를 근처의 시종에게 맡겼다.
“여기서 더 좋은 마무리를 할 생각은 아니지?”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지호는 즐겁게 웃는 이원을 쏘아보았다. 이전부터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에게 질투하더라니, 떼어 놓는 게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나사르를 돌보고 싶어도 지금은 이원의 말대로 여기서 작별하는 게 최선이었다. 안쓰럽지만, 아직 어린 만큼 아픈 추억은 금세 잊고 다른 인연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
지호는 이원이 준비를 마무리한 마법진 위에 섰다.
올 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십수 명의 사람이 드문드문한 간격으로 둥그런 마법진을 에워싼 채 서서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스킬이 완성된 게 아닌데도 마력은 해일처럼 넘실거렸다.
“이제 이플리스도 작별이네.”
“……그러게.”
이원이 지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원의 손 위에 손을 겹치니, 이원이 깍지를 끼고 지호의 손을 세게 쥐었다.
“그래도 여기 와서 살 좀 오른 게 보기 좋네.”
“푹 쉬긴 했으니까…….”
“돌아가서도 쉬엄쉬엄해. 자꾸 무리하면 또 납치할 거야.”
“알았어.”
뻔뻔하게 납치했을 때는 정말 화났는데, 가볍게 말하니까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원은 지호의 손을 잡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심에 선 채 천천히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십수 명이 필사적으로 사용하는 마력보다 이원이 가볍게 끌어들이는 마력이 훨씬 컸다. 마력이 넘실거릴수록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푸른빛의 마력으로 덧그려졌다.
눈부신 빛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꼭 눈으로 보지 않아도 거대한 마법이 완성되어 가는 게 온몸의 감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선을 마력이 뒤덮은 순간, 마법이 발동되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캄캄해졌다. 지호는 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이원이 지호를 단단히 끌어안는 게 느껴진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올 때도 이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게 괴로운 감각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안일하게 안심하고 있던 지호의 정신을 번쩍 깨웠다. 지호는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하지만 사물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딱 그만큼만 어두워서, 지호는 주변을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마법진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던 각성자가 죄다 쓰러져 있었다. 몇은 피를 토했고, 몇은 갑자기 솟아오르며 뒤집힌 바닥 때문에 다쳐 신음하고 있었다.
지호는 이원을 돌아보았다. 어떤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
마법이 실패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데 실패했는데도 이원의 얼굴에서는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순간이지만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야.”
지호는 저를 붙드는 이원의 손을 세게 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