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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플리스에서(3) (166/283)
  • 23. 이플리스에서(3)

    수많은 사람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면서도 주이원은 태연했다. 태연함을 넘어서서 뻔뻔하기까지 했다.

    이원만큼이나 낯짝이 두껍지 않은 지호는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들 다 보는 데서 이런 파렴치한 애정행각이라니.

    ‘일방적인 건데 애정행각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어차피 남들 보기에는…….’

    그냥 닭살 돋는 연인의 연애질로 보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안 그래도 빨개진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야, 다 보고 있는데…….”

    “그러게. 왜 보고 있지?”

    이원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호가 듣기에는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이 가벼운 말투였다. 목소리 자체도 중얼거림에 가까울 만큼 작았다.

    그러나 중얼거림이 가져온 파장은 작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건 눈을 동그랗게 뜬 나사르뿐이었다. 물론 나사르 역시도 많이 놀란 듯 바짝 얼어붙어 버렸지만.

    단숨에 주변을 얼어붙게 만든 분위기의 기저에 깔린 건, 분명 두려움이었다.

    ‘이 자식, 대체 여기서 어떻게 지낸 거야?’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지적했다가는 일이 더 커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죽이기라도 해? 왜 그렇게 벌벌 떨어. 우리 자기 오해하게.”

    지호가 입을 다문다고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위협적인 불에 굳이 기름까지 끼얹는 게 주이원이란 놈이었으니까.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멀쩡한 척 미소 짓는 이들의 모습에서 지호는 선명한 공포를 읽어 냈다.

    지호는 한숨을 삼키며 이원을 붙들었다. 아무래도 여기 있어 봤자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방으로 돌아가자. 너도 피곤할 거고… 쉬고 싶어.”

    “그래? 나온 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트집 잡지 말고.”

    지호가 낮게 윽박지르자 이원은 괜한 화풀이에 당한 사람처럼 불쌍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지호가 원한다면야 돌아가지 뭐.”

    “아…….”

    이원의 말에 나사르가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의 앞에서는 거침없이 아바마마라고 부르던 호칭도, 이원에게 차갑게 거절당한 폐하라는 호칭도 부르지 못한 채.

    나사르의 존재는 잠깐 잊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얼굴이 단번에 시선을 잡아끈다. 노골적으로 주이원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는데, 이원은 나사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망설이는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사르가 애걸하듯 간절히 응시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새끼처럼 필사적인 태도가 지호의 발을 붙들었다.

    “잠깐, 주이원…….”

    “그럼 갈까.”

    이원은 지호를 끌어안았다. 나사르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은 바깥 정원에서 원래 있던 방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력을 언제 썼는지 인지하지 못할 만큼, 무척 자연스러운 순간이동이었다. 분명 이원은 순간이동을 쓸 수 없었을 텐데. 지호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아, 원래 순간이동은 그 별의 주민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거든. 그 외의 사람은 한정적이지.”

    “아, 그렇…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중요한 게 따로 있어?”

    이원이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했다. 지호는 그런 이원이 답답하다는 듯 쏘아보았다.

    “나사르 말이야!”

    “아.”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놀라는 이원을 보니 속이 꽝 막혔다. 안 그래도 답답한데 일부러 남의 속 타게 만들려고 이러는 건지.

    “널 따르는 어린애한테 굳이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나사르가 중요해?”

    “중요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별걸 다 신경 쓰는구나, 지호는.”

    이원이 조금 짜증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야 물론 나사르는 만난 지 몇 분 안 된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거창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관심을 원할 뿐인데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신기하네.”

    “뭐가 신기해?”

    “아니, 자기한테는 나사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당장 눈앞의 꼬맹이에게 홀려서 그것부터 물어볼 줄은 몰랐지.”

    “아!”

    이원의 말대로 지금 지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여기 있다는 상황, 그 자체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던 지호가 곧장 이원의 멱살을 잡았다.

    “주이원!”

    “음, 열렬하네.”

    “열렬은 무슨…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니?”

    “왜 날 여기 데려온 거야?”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여기로 오기 전 주이원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너를 병들게 해.’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이곳이 널 죽이고 말 테니까.’

    무리해서까지 안정화를 켠 건… 그래, 확실히 자신이 잘못했다. 그 때문에 이원이 심하게 다쳤던 것도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차피 지호가 결정해서 저지른 일인데 이원은 애꿎은 지구 탓을 했다. 그리고 남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플리스로 덜렁 데려왔다. 아니, 데려왔다기보다는 납치였다.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른 주제에 이원의 반응은 태연했다.

    “음, 요양하러?”

    “요양은 무슨! 너 이거 납치야. 알아?”

    “당연히 납치지. 그럼 모르고 데려왔겠어?”

    “장난으로 듣지 마!”

    “응, 진지하게 듣고 있어.”

    “진지하게 듣긴 무슨!”

    “난 계속 진지해, 지호야.”

    뻔뻔한 이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스멀스멀 불안이 밀려왔다. 이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지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주이원이 신지호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지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떻게든 힘을 키워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주이원조차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린 일이다. 그동안 관리자를 잃은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미지수였다.

    “자기야.”

    이원이 불안해하는 지호를 끌어안았다. 허탈한 기분에 지호는 맥없이 끌려갔다. 이원은 그런 지호를 부드럽게 도닥이며 뺨이며 귓가에 입을 맞췄다.

    “하지 마…….”

    “집에 돌아가는 거랑 내가 나사르를 불쌍하게 여겨 주는 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뭘 할래?”

    지호는 이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해야겠지만, 굳이 후자를 버리게 만드는 이원의 말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이원은 저를 노려보는 지호를 안아 들었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품에 안기자, 이원은 지호를 소파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지호의 손에 입을 맞췄다.

    “자기, 날 진짜 악당으로 보는구나.”

    “당연하지. 너 범죄자잖아……. 납치는 범죄니까.”

    “여기선 내가 법이라 이제 범죄 아닌데.”

    “…….”

    진짜 때릴까.

    절로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이원이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힘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넌 지구로 돌려보내 줄 거야.”

    정말로?

    지호는 의구심이 가득 섞인 눈으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이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에게는 나 하나뿐인 이플리스보다, 가족과 소중한 사람이 있는 지구가 더 좋잖아?”

    “아니. 그건…….”

    지호는 차마 말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했다. 당연히 이원도 소중한데, 곧장 이원의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소중한 가족도 있을 뿐더러, 지구에서 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지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원은 지호가 못 깨물게 막고, 울 것처럼 물기 찬 눈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난 너도 소중해…….”

    “알아. 심술부려서 미안.”

    “…….”

    “멋대로 일을 벌인 것도 미안해. 나는 잠깐 그곳에서 너를 완벽하게 격리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물론 그때는 발끈해서 저지른 감도 없잖아 있지만…….”

    “발끈할 일이 따로 있지…….”

    “그렇지? 미안.”

    순순히 말하는 이원을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이원을 만나기 전까지 생각보다 훨씬 긴장했던 것 같다.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실하게 몰라서.

    기운이 빠져 늘어진 지호의 허벅지 바깥쪽을 슬슬 문지르며 이원이 웃었다.

    “순순하게 구는 것도 귀엽네.”

    “……변태.”

    “이 정도로 변태라니 억울한데……. 뭘 해야 변태인지 보여 줘?”

    이원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온다. 지호는 화들짝 놀라 이원의 손을 뿌리치고 소파 끄트머리로 물러났다. 순순히 지호를 놓아준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이야기해 볼까?”

    지호가 탓하기 전에 이원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돌아가긴 돌아갈 건데, 차원 이동은 쉬운 게 아니야. 몇 달 간의 준비가 필요할 거야.”

    “뭐? 올 때는 바로 왔잖아.”

    “그거야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갈 때는 다른 세계로 뚫고 가는 거잖아. 특정 세계를 지정해서 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나도 몇 번이나 실패했으니까.”

    “그럼 돌아갈 때도 실패할 수 있어?”

    “이번에는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나랑 달리 지호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많으니, 확실한 좌표가 되어 줄 거야.”

    이원의 말에 불안함은 가셨으나 대신 마음이 안 좋아졌다. 새삼스럽게 이원이 차원 이동을 실패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가슴 아플 정도로 확실하게 느껴져서.

    “이제 너를 원하는 사람도 많아.”

    “수많은 대중의 적당한 관심보다는 소수의 간절함이 더 확실해.”

    일부러 대중에게 강렬하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주제에 이원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단언했다.

    지호는 이원의 이런 면이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바꿔 놓고 싶었다. 매번 실컷 잘난 척 하는 주제에 어떤 면에서는 늘 포기하고 실패를 단정 짓는 게.

    “아니야. 충분히 너도…….”

    “괜찮아. 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걸. 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좀 줘라…….”

    “하하.”

    지호는 이원의 관심이 자신만을 향한다는 그 말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었다. 간질간질한 말이 미묘하게 기분 좋으면서도… 조금 더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이원에게는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호야.”

    “응?”

    “여기 있는 동안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마. 잠깐 지구의 일은 잊고, 푹 쉬는 거야. 그래야 돌아가서도 더 힘을 내지. 알았지?”

    “…….”

    “네가 바라던 대로 나사르도 보살펴 줄게. 알았지?”

    “……알았어.”

    순순히 대답하는 지호를 보며 이원은 배가 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오히려 걱정이 됐지만… 지호는 괜히 밀려드는 걱정을 억누른 채 애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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