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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플리스에서(1) (164/283)
  • 23. 이플리스에서(1)

    “이곳은 이플리스의 수도, 트라벨루나의 트라벨 궁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장소에 당황한 지호의 혼란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아라베크가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지호는 뒷통수를 세게 맞은 듯 얼얼했다. 거대한 마력이 몸을 감쌀 때 불길함은 느꼈지만, 설마 이원이 자신을 이계로 데려올 줄이야.

    혹시 싶어서 상태창을 불러 봤지만 열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화를 내고 싶은데 눈앞에 있는 건 생김새부터 너무 달라서 대하기 어려운… 이계인이다. 더욱이 정중하게 명을 따르는 상대에게 분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주이원은 이걸 알고 이 사람, 아라베크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거겠지.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고, 지호는 애먼 화풀이하지 않기 위해 숨을 골랐다.

    “주… 아니, 폐하는 어디 계시나요?”

    아라베크가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반응하듯 아라베크의 광택 도는 피부가 마치 색을 비춘 은박지처럼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지호는 상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애를 썼다.

    “지호 님께서는 폐하를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주이원 그 개자식은 어디 있어요?”

    노골적으로 변한 호칭에 아라베크는 당황한 듯 잠시 다문 입꼬리가 흔들렸으나, 이내 전과 같은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 허리를 숙였다.

    “말씀 낮춰 주십시오. 그리고 폐하께서는 이플리스로 귀환하신 김에 급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

    “균열과 던전을 처리한다고 말씀드리면 지호 님께서 이해하실 거라 하시더군요.”

    “아.”

    이유를 듣자마자 주이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려던 분노가 한풀 꺾였다. 이걸 노리고 나간 걸까? 너무 지호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짜증이 나지만…….

    “그럼 어쩔 수 없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

    안 먹는다고 하기에는 저 말을 듣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니 아라베크가 뭔가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곧장 문이 열리고 식사가 들어왔다.

    카트는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침대 가까이 도착한 카트가 멋대로 벌어지고 분해되는가 싶더니, 침대 위 테이블로 변했다.

    “……이건 스킬인가요?”

    “과학입니다.”

    “…….”

    여기 판타지 세계 아니었냐고.

    생각해 보면 이미 오래전에 균열이 발생했던 세계였으니, 문명의 수준이 지구보다 훨씬 더 발달한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바깥의 풍경은 SF와 판타지가 반반 섞인 꼴이지만…….

    “과거, 이플리스가 궤멸 직전까지 갔을 때 문명이 이루었던 대부분이 사라졌고 건축물 또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할 때도 여유는 없었기에, 효율적으로 필요한 것만 짓는 건축 양식이 발달했습니다만……. 선선대 폐하께서 천도하실 때 일부러 옛 양식을 복원하여 건축했습니다.”

    “아하…….”

    마치 지호의 궁금증을 이미 알고 있던 듯한 답변이었다.

    “선대 폐하께서도 예전에 같은 것을 궁금해하셨습니다.”

    “그럼, 아라베크 님…….”

    “아라베크로 충분합니다. 부디 낮춰 주십시오.”

    “으음, 아라베크는 주이원을 아주 예전부터 봐 왔나 봐요?”

    “네. 즉위식부터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오…….”

    그러면 주이원이 어땠는지 조금 듣고 싶은데. 지호가 입을 열기 전에 아라베크가 손을 뻗어 식사를 가리켰다.

    “그 전에 먼저 식사부터 하십시오. 귀인의 몸이 상하십니다.”

    “아, 네.”

    주변에 온통 바다만 보이더라니, 식탁 위에 오른 것도 어패류가 많았다. 지구의 음식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기본적으로 비린내가 더 강했고, 지호의 입에는 간이 다소 셌다.

    “선왕 폐하께서 조절하라 하셨는데…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각성한 이후로 이원의 입맛이 변했었다. 지호와 마찬가지로 담백한 음식을 더 좋아했던 이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극적인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10년도 아니고 1000년이면 입맛이 완전히 바뀔 만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레 그 사실을 깨달으며 지호는 음식을 곱씹었다.

    식사가 끝나고, 할 게 없어지자 다시 뻘쭘해졌다. 아라베크는 방을 나갈 생각이 없는지 당연하다는 듯 지호의 옆에 서 있었다.

    “조금 더 쉬고 싶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러고 보면 여기 오기 전에 무리하게 [안정화]를 켰다가 속이 진탕되었었는데. 퍼뜩 생각난 게 있어 지호는 급히 아라베크를 돌아보았다.

    “이원이는? 괜찮아요?”

    “네? 네, 폐하께서는 물론 괜찮으십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하긴, 지호도 이렇게 말끔히 나았는데 멀쩡해 보이던 주이원 역시 괜찮아졌겠지. 물론 전에도 안 괜찮은 주제에 괜찮은 척했으니 걱정은 되지만…….

    “아, 아니……. 아니에요. 돌아오면 저한테 바로 와달라고 말 좀 전해 주세요.”

    “돌아오시자마자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셨으니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오실 겁니다.”

    “……네.”

    답은 들었지만 막막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요즘 들어 바쁘게 일만 해서 그런가,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이 시간이 더욱 어색했다. 지구라면 차라리 책이라도 읽을 텐데.

    “어… 그러고 보니 저 지금 여기 말로 하고 있죠?”

    “네. 귀에 번역기를 끼워 드렸습니다.”

    귓가를 만지작거리니 작은 이어 커프가 끼워져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만지지 않으면 귀에 느낌조차 나지 않는다.

    확실히 발전한 세계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니 이플리스 출신의 주하은이 시스템을 한참 개방해야 가능한 예측 시스템을 기계로 거의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겠지.

    생각해 보면 지구는 정말 운이 좋긴 했다. 주이원 덕분에.

    “지루하시다면 바깥이라도 한번 돌아보시겠습니까?”

    아라베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베크는 자신과 비슷한 화려한 흰 옷을 가져왔다. 입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아직 지호 님에 대해 사람들이 몰라서 무례라도 범한다면, 폐하께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으시면 사람들이 먼저 귀한 분임을 알아보겠지요.”

    ……라고 하는 통에 얌전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원의 벌도 벌이지만,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이계에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라베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원판 같은 것을 불러냈다.

    푸른색을 띤 원판은 가장자리에 화려한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고이 모셔야할 장식품처럼 보이는 그것의 위에 아라베크는 망설이지 않고 올라섰다.

    “이건 운타라고 하는 이동수단입니다. 궁은 넓으니 이걸 타고 움직이실 겁니다.”

    “이동… 수단이요.”

    “떨어지진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올라오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이런 원판에 몸을 의지하기에는 불안하다. 지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원판 위에 올라섰다.

    떨어질까 봐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몸은 운타 위에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슬쩍 힘을 빼도 몸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 가실까요.”

    아라베크의 운타가 이동했고, 지호의 운타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분명 제법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데도 위에 있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이런 걸 흔히들 타나요?”

    “운타는 꽤 대중적인 이동 수단입니다. 왕궁의 것이라고 해도 장식 외에는 크게 다를 것 없지요.”

    “아하…….”

    이원은 정말 다른 세계에서 오래 살다가 돌아온 거구나. 지구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지구를 잊지 않은 채…….

    ‘어떻게 잊지 않은 걸까.’

    이런 곳에서 1000년이나 살다 보면 고작 스무 해 있던 지구는 잊힐 법도 한데.

    ‘거긴 네가 없잖아.’

    평소 과장하던 때와 달리, 지나치게 담백해서 도리어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던 그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왕이라는 자리를 놓고 올 만큼 이원은 나를 좋아했구나.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천만다행히도, 마침 바깥으로 나온 덕에 짭짤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붉게 달아오른 뺨을 식혀 주었다.

    지호는 부끄러운 생각을 떨쳐낼 겸 괜히 더 몰입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신기한 풍경이었다. 드높은 첨탑, 건물을 장식한 섬세한 부조와 화려한 보석, 곳곳에 보이는 인간과 거리가 먼 이계인의 모습을 한 조각상, 던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혀 다른 모양의 식물들까지…….

    형태뿐만 아니라 그걸 이루는 재질 또한 독특했다. 지호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름다운 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소란이 들렸다. 아무 말 없이 앞장서던 아라베크가 곤란한 낯으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운타 아래로 내려갔다.

    “지호 님.”

    아라베크의 눈짓에 지호는 영문도 모른 채 아래로 내려섰다. 아라베크가 바라보고 있는 건 저 멀리서 요란하게 다가오는 한 무리였다.

    “지호 님은 예를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아라베크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니, 그럴 거면 최소한 이유라도 말해 주면 안 되나?

    아라베크에게 묻는 것보다 빨리 상대는 지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과연, 설명할 시간이 없을 법도 했다. 상대도 운타를 타고 있었으니까.

    지호에게 다가온 건 작은 어린애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무리였다.

    인간과 닮은 듯, 다른 면이 많이 보이는 아이였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인다.

    아이의 몸 전체에는 미끈한 검은 광택이 돌았다.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 같은 게 붙어 있었다.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신 홍채는 짙푸른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이는 지호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당당하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네가 아바마마와 혼인한 자냐?”

    “…….”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지호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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