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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오늘의 동호회(2) (158/283)
  • 외전2. 오늘의 동호회(2)

    신지호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 임승주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임승주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 너스레를 떨 줄 모른다. 보통의 사람들은 임승주가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다가가는 신지호라면 분명 최유호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 것이고, 그는 그 옆에 슬쩍 끼면 된다.

    안타깝게도 임승주가 고대하는 순간은 빨리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최유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고, 신지호는 예상했던 대로 모르는 사람과 하하호호 즐겁게 떠들고 있으니까.

    임승주는 신지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1년간 신지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임승주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임승주 자신이 그 고생에 한몫했지만.

    전 국민이 욕하는 상황에서도 항상 실없이 헤헤 웃길래 속없는 놈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말랑말랑해 보이는 신지호는 상당히 굳은 심지를 갖고 있다.

    남을 돕고 싶다는 신지호의 의지는 무척 확고하다. 가능하다면 신지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하길 원한다. 설령 악인이라도 그들에게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여기며.

    아마 그런 성격이니까 온갖 스킬이 다 발현되는 와중에 공격 스킬은 하나도 생기지 않는 거겠지.

    가끔 신지호를 볼 때면 맑은 물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고고한 생명체가 생각난다. 버티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흙탕물로 미련 없이 뛰어 들어가, 멸종위기를 겪는 생물처럼.

    임승주가 보기에 신지호는 단명하기 딱 좋은 상이었다.

    그나마 신지호가 좋은 걸 타고나서 다행이지. 청람이라는 거대한 뒷배가 없었다면 아무리 저 신지호라도 진즉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까. 저 심지 자체가 꺾일 것 같진 않지만 훨씬 더 피폐해졌겠지.

    게다가 주이원이라는 방패야말로 신지호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주이원은 성격이 참 개 같았지만… 덕분에 신지호는 자신의 정의를 관철시키기 쉬워졌다.

    신지호의 스킬, [별의 축언]은 사용자 외의 존재에게 축복을 내려 준다. 하지만 가끔, 가장 축복받은 존재는 다름 아닌 신지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임승주는 신지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

    신지호가 갑자기 고개를 빼꼼 들었다. 뭔가 싶어서 보니,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최유호였다.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이 단번에 깡그리 잊힌다. 오랜 우상의 등장에 임승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최유호는 주변 사람의 안내를 받아 신지호 쪽으로 다가왔다. 초면이지만 살갑게 인사하는 신지호의 붙임성이 너무도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지호 길드장님. 절 기다리셨다던데, 무슨 용건이에요?”

    “안녕하세요. 초면에 죄송한데, 사인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제 조카가 최유호 선수의 굉장한 팬이었거든요. 물론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하하. 거절은요, 아직 기억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기쁘네요.”

    당연히 기억하지! 임승주는 속으로 소리쳤다. 거지 같은 팀이 연패를 할 때마다 최유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선수 시절, 최유호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 좋기로도 유명했다. 자만하지 않고 겸양의 미덕을 갖췄고 잘생긴 데다 팬 서비스도 철저한 선수.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덕분에 헌터가 된 지금도 인기가 넘쳤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 생각들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긴장되어서 한 마디도 못 하고 입꼬리만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사이 신지호는 순조롭게 최유호의 사인을 유니폼 위에 받아 내고 있었다.

    “조카가 몇 살이에요? 제 경기를 봤을 때라면 좀 어렸을 텐데.”

    “고등학생이에요. 제가 형이랑 누나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요.”

    “아, 맞아. 그렇게 들었던 것 같네요. 하하, 지금도 저희 옛 팀 응원해 주고 계신가요?”

    “……네, 그럼요.”

    아주 잠깐의 침묵을 볼 때, 신지호의 조카도 임승주처럼 욕을 하는 게 분명하다. 최유호도 그걸 아는지 씩 웃었다.

    “계속 좋아해 주신다니 감사한 일이네요.”

    “네. 아, 사인 한 장 더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임승주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부럽다. 부러워 죽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도 화기애애해서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신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임승주가 있는 곳으로.

    “임승주 헌터.”

    “네?”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사인받으세요. 최유호 선수 팬이잖아요.”

    “…….”

    어떻게 알았지?

    당황해서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너무도 끌리는 제안이었다. 임승주는 태연한 척 최유호에게 다가갔다.

    “그, 아, 안녕하십니까. 최유호 헌터님. 어, 활약하시는 거, 자, 잘 보고 있습니다.”

    “하하. 네, 반가워요.”

    말을 더듬으며 임승주는 멍청하게 구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최유호는 딱딱한 표정의 임승주에게도 구김살 없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임승주가 뻣뻣하게 손을 맞잡으니, 최유호는 시원스레 웃었다.

    “아, 내가 또 임승주 헌터 팬인데. 길드장님이 빈 말 하신 거라고 기쁘네요.”

    “아뇨! 정말로 패, 팬입니다. 정말로… 팬입니다. 그, 선수 시절부터, 지금도 응원하고 있고요. 팀도 계속, 물론 선수님은 안 계시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사실 각성하기 전부터 임승주 헌터는 알고 있었거든요.”

    “저, 정말이십니까?”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최유호가 또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성격은 아니라서. 하지만 진실이라기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임승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김주민 선수 알아요?”

    “아. 김주민… 네, 알고 있습니다.”

    아직 야구 선수를 꿈꾸던 시절, 임승주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한 팀이었던 녀석이다. 야구의 꿈이 좌절된 후, 당시의 친구들과는 죄다 연락을 끊었지만… 대충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전부터 임승주 씨 이야기를 가끔 했거든요. 자기 친구가 정말 아깝게 선수가 못 됐다고……. 그래서 한 번 찾아봤는데, 잠깐이라도 한 팀에서 같이 뛰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았는데 헌터로 각성까지 했다고 해서. 응원하고 있었죠.”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 누가 칭찬해 줄 때보다 기분이 짜릿했다.

    당연히 헌터 임승주의 존재만 알 줄 알았는데. 비록 포기한 꿈이지만 야구선수를 꿈꾸던 임승주까지 알고 있었다니…….

    사인을 끝낸 최유호가 명함을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넸다. 지호와 승주 역시 얼결에 받은 후 최유호에게 명함을 건네줬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드려도 됩니까?”

    “물론이죠. 노네임과 저희 길드라면, 저희 쪽이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너스레를 떨며 최유호는 인사하고 이따 경기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하며 물러났다.

    임승주는 선 채로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이게 현실이라니. 오늘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아니지. 최유호와 연락이라도 해 보고 죽어야지.

    감회에 젖어 있던 임승주는 한참이나 뒤늦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신지호의 시선을 눈치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신지호가 짓궂게 씩 웃었다.

    “임승주 헌터도 이런 면도 있네요.”

    “뭐, 뭘 말입니까.”

    “그냥, 좋아하는 모습 보기 좋다고요.”

    아무래도 놀리는 것 같은데. 뭐, 임승주 본인이 보기에도 놀릴 만한 꼴이긴 했다. 덕분에 사인을 받았으니 오늘은 신지호가 놀리는 게 아니라 쌍욕을 해도 괜찮았다.

    “하아……. 그런데 제가 야구 좋아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지호는 별 신기한 말을 다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말기 잠금 화면은 팀 로고, 배경화면은 팀 사진, 벨소리는 팀 응원송…….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

    “최유호 선수 팬일 줄은 몰랐지만요, 보자마자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길래.”

    완전히 들켰다. 몹시 부끄러워져서 임승주는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미 다들 알걸요?”

    “…….”

    “다 아는 이야기는 포기해요. 그보다 이거 끝나면 회식도 한다는데, 같이 갈 거죠? 최유호 선수도 갈 텐데.”

    “물론입니다.”

    “제가 친분 좀 쌓게 해 드려요?”

    “…….”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여기까지 보여 줬으니 더 뺄 것도 없었다. 임승주가 갈등 끝에 고개를 끄덕이자 신지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마구 웃었다.

    결과적으로 최유호와 함께 뛴 경기는 훌륭했다.

    스테이터스를 일정량 하락시키는 장비를 착용한 채, 각성자가 되기 이전에 가까운 체력으로 계속 뛰다 보니… 정말 예전처럼 온 힘을 다해 야구하는 기분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 뒀던 것을… 잠시나마 꺼내 다시 반짝이도록 닦을 수 있었다.

    정말로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충동적인 선택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온.

    다만 한 가지, 회식에서 최유호와 임승주 사이에 친분을 만들어 주겠다던 신지호의 호언장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기야.”

    지긋지긋한 청람의 길드장놈이 왔기 때문이다.

    저걸 예전에는 존경했다니. 저 변태성욕자, 신지호 집착남이 지구에서 유일한 SS급이라니. 정말로 말세지…….

    오직 신지호의 앞에서만 친절한 주이원은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신지호에게 달려와 허리를 잡고 안아 올렸다. 자주 겪는 일인데도 신지호는 화들짝 놀라며 귀 끝까지 빨개졌다.

    “야, 내려놔!”

    “이겼으니까 축하해 줘야지.”

    “그냥 동호회 경기에 무슨… 내려 두라니까!?”

    “야구복도 귀엽다, 자기.”

    둘의 성별이 달랐으면 진작 공식 커플이 됐을 텐데. 동성연애에 대한민국 평균 정도의 이해도만 있던 임승주도 둘이 썸을 타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저걸 곧 죽어도 우정으로 포장하는 몇몇 보수파가 참 신기할 뿐이다.

    “하아, 지호 땀 냄새도 좋다…….”

    진짜 저 미친 새끼. 남들 보는 거 안 보이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돌아본 주변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주이원은 아주 꼴값을 떠는 중이고.

    꼴 보기 싫다. 인상을 확 구기며 고개를 돌리는데, 자신과 똑같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는 주예림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는 서로 A급 헌터로 인사 정도만 한 사이지만…….

    “…….”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임승주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주이원의 본성을 알고, 그놈의 가식적인 꼴을 보기 싫어하는.

    “…….”

    아무래도 최유호 선수 말고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동지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정말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동호회, 나쁘지 않을지도…….’

    신지호가 빠진 술자리에서 최유호 그리고 주예림과 의기투합한 임승주는 다음 날, 동호회에 가입 신청을 했다.

    바쁜 일상 사이, 잠깐 숨을 돌리는 한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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