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Intermission(3)
“뭔가 발견했어요?”
“그래, 양호진이 뭔가 발견했지. 따라와 봐.”
분명 둘이 같이 가긴 했다만… 다짜고짜 따라오라니, 사탕으로 꾀는 못된 어른 같다. 지호가 태주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소리가 다가왔다. “뭐예요?” 묻는 소리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소리가 경계심어린 눈빛으로 태주를 노려보며 지호를 홱 끌어당겼다.
“그런 거면 제가 같이 갈게요. 그쪽은 여기서 뒤처리나 하고 있어요.”
“아, 나 못 믿어?”
“믿겠어요?”
“흑흑…….”
강태주가 가증스럽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소리를 냈다. 물론 지나치게 인위적인 소리라서 사람을 놀리나 싶을 뿐이었지만.
우는 척을 하면서도 강태주는 순순히 소리와 역할을 바꿨다. 어차피 적들의 기세를 모두 꺾어 둔 터라 남은 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일만 남았으니까.
“가요.”
소리가 새침한 얼굴로 지호를 잡아 이끌었다. 태주가 일러 준 방향을 따라가자 금세 호진의 마력을 포착할 수 있었다. 태주가 있던 곳에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길드장님, 저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안 믿는데요.”
뭐하러 강태주를 신뢰하겠는가? 하지만 당연하단 듯이 대답하는 지호의 등짝을 소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리쳤다.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 다 져 주잖아요! 임승주 헌터 때도 그렇고…….”
임승주야 부길드장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임승주 헌터는 부길드장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
어떻게 알았지. 언제부터 허소리가 독심술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호를 보며 소리가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나중엔 또 그러겠죠. ‘강태주는 우리 길드원이니 믿어 줘야겠다.’ 뻔해, 뻔해.”
“…….”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게, 만약 강태주가 노네임에 소속되기 전이라면 지호는 조금 더 신중하게 그를 따라나섰을 테니까. 길드원에게 무르다는 건 사실이었다. 소리가 늘 모질지 못한 지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장님은 자기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너그러워지는 게 탈이라니까요. 예전에 길드를 가득 채우던 그 씹… 아니, 그 인간들도, 일단은 길드원이라고 품었잖아요.”
“내쫓았는데요…….”
“저라면 그렇게 곱게 안 내쳤죠. 하여간 너무 남 생각만 한다니까요.”
“제가요?”
“네. 뭐하러 남의 사정 다 봐줘요? 길드장님은 좀 남 생각 덜 하고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어요.”
“…….”
허소리의 말에 지호는 잠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적한 건 다른 부분이지만, 마지막 말만은 지호에게 자신이 처한 다른 상황과 대입되어 들렸다.
[안정화] 스킬을 발동시키려고 하는 이유에 자기 자신을 위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 [안정화]를 켠다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안정화를 한 번이라도 끈 지금은 균열이 지나치게 범람했다. 그걸 막는 건 이미 넘쳐 버린 강에 새로 둑을 쌓는 것처럼 어려울 테니까.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안정화를 켜야겠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의 감이 소리쳤다.
이걸 켜는 건 위험하다고.
이게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는 걸 지호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이건 원래대로 지호가 정상적인 각성을 했다면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지식이다.
무엇보다 균열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서리가 지호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서리는 세상이 위험하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침묵한다. 그저 지호의 손에 온기를 전할 뿐.
그건 이걸 켰을 때 어지간한 일을 뛰어넘는 상황이 온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덜 하고 이기적으로 사는 건 지호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의 책임이 제 어깨에 얹혀 있으니까.
건물은 꽤 넓었지만 헤맬 만큼은 아니었고, 덕분에 생각을 마무리할 즈음 호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왔니.”
어둑어둑한 사무실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악의 소굴이라고 해서 꼭 이런 분위기일 필요는 없을 텐데.
그 안에서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고 있던 호진은 지호를 보자마자 손 아래 내려둔 서류를 톡톡 치며 한숨을 쉬었다.
“이 공장은 게네시스 짓이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지만 호진이 내어준 자료에 적힌 건 게네시스와 전혀 다른 기업이나 길드의 이름이었다. 호진은 곧장 덧붙여 설명했다.
“그치들은 절대 꼬투리 잡힐 일은 안 한단다. 아마 이쪽도 추적해 보면 관련자들이 싹 다 죽거나 사라졌을 테지. 그렇게 악랄한 게 놈들의 수법이란다. 몇 개를 내가 알고 있어서 알아봤지만… 아니면 몰랐을 테고.”
“하지만 여기, 전에 본 그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던데요.”
“시스템?”
잠깐 의아해하던 호진은 이내 이해하고 미간을 문질렀다.
“아, 그 고양이 말고 다른 시스템을 말하는 거니?”
“네. 공장 쪽 시스템창에 정보가 가려져 있었거든요. 그, 인조인간은 이지영이란 사람이 만든 건데… 그 피처럼 생긴, [인조 양분]의 제작자 이름이 보이지 않았어요.”
지호의 말에 호진이 흐음, 신음하며 턱을 매만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지영은 누군지 알아. 완전히 돌아 버린 인간이지. 음, 이지영이 끼었다면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누군데요?”
“700년쯤 살아온 연금술사란다. 연구자란 족속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니지.”
1000년을 살아오며 별의별 인간을 다 봤을 호진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단언할 정도면 대체 어떤 인간인 건지……. 그다지 생각하기 싫은 최악을 생각하는데 호진이 지호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가져갔다.
“시스템은 이 녀석인 듯하구나.”
지호는 호진이 짚어 주는 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녹스’가 ‘제작자’에게 완제품의 설계도를 전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녹스…….”
“딱 잘라 말해서 저번에 본 수준의 가짜 몸을 만들어낼 기술이 우리에겐 부족하단다. 게네시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하지만… 시스템, 그 ‘녹스’라는 녀석이 정보를 제공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그러게요. 그러면 시스템창이 일부 가려진 게 이해도 되고…….”
“뭔가 스케일이 커지긴 하는데… 확실한 거예요, 그 가설?”
듣고 있던 소리가 끼어들었다.
“녹스인지 뭔지 하는 놈은 우리 고양이랑 비슷한…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그놈이 우리 길드장님을… 해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래서 우리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지. 하지만…….”
호진이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게네시스도 관리자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을 거란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적당한 멸망이지 완전한 멸망이 아니거든. 그리고 녹스가 ‘이 세계의 관리자를 다른 세계의 관리자에게서 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어지간히 꼬인 녀석들이 꼬인 채 손을 잡았다는 거네요.”
“그렇게 말하니 명쾌하구나.”
여전히 해결된 문제는 없었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는 소리의 태도가 퍽 귀엽다는 듯 호진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어쩔 수 없이 씁쓸함이 스며 있었다.
“게네시스가 진작 녹스와 협력하고 있었다고 하면… 우리가 늦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당장 눈에 띄는 세력이 없어서 우리가 밀리지는 않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게네시스 쪽이 우리의 눈을 속인 걸 수도 있겠어. 아무리 청람의 길드장이라 해도 이 세계의 시스템과 대항하는 건 한계가 있을 테니까.”
서리는 녹스보다 자신이 약하다고 했으니… 결국 대항해야 하는 건 신지호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게 그대의 탓은 아니란다.”
지호가 하는 생각은 다 안다는 듯이 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몇 시간 뒤, 헌터 협회에서 파견한 인력이 산 속의 공장을 찾아냈다.
인간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육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불법적인 행위를 적발한 협회 측에서는 곧, 자세한 사실은 비밀에 부칠 것이라고 지호에게 전달해 왔다.
물론 이런 규모의 일을 완전히 비밀로 둘 수는 없다. 정확한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적당히 불법 아이템 공장을 발견했다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곧이곧대로 밝히기엔 너무 파장이 큰 일이긴 하다. 균열이 늘어나는 지금,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인간을 본뜬 아이템이 제작된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당장 진실을 묻더라도 앞으로 진상을 파헤치는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지호는 일단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머지는 미르나 노네임의 다른 일원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다만 마지막까지 한 가지 걸리는 건…….
“강태주 헌터.”
지호는 제각각 움직이는 호진이나 소리와 달리, 혼자 구석에 앉아 시간을 떼우는 강태주에게 다가갔다.
“왜?”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잖냐, 남자의 은밀한 비밀이라고.”
어처구니없는 소리 같지만, 지호는 그의 말을 비웃는 대신 경청했다. 진지한 태도를 본 태주가 피식 웃었다.
“선물이야. 선물 싫어해?”
“출처가 불분명한 선물은 미심쩍잖아요.”
“꼬치꼬치 캐묻지 마. 매력적인 남자는 그만큼 말할 수 없는 비밀도 많은 법이거든.”
“알았어요.”
“뭘 알아. 내 매력?”
“그건 모르겠네요.”
“아, 매정하네. 나처럼 매력적인 남자를.”
지호는 헛소리하는 강태주를 버려두고 돌아섰다.
강태주에 대해 조사한 바로, 그는 암암리에 여러 가지 의뢰를 도맡아 했다. 그는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비밀을 지킨다. 강태주가 의뢰를 수행했단 사실을 바깥에 흘린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그나마 밝혀진 경우는 의뢰인 쪽에서 입을 가볍게 놀린 경우가 전부였다.
‘내가 가짜의 의식에 흡수됐던 건 강태주의 짓일 확률이 높겠지.’
증거가 없어서 확신하지 못할 뿐, 어렴풋이 추측하는 게 지호 혼자만은 아닐 터였다.
갑작스러운 도발과 부자연스럽게 이어진 전투는 평소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 행적조차 불분명한 강태주의 성향과 완전히 정반대였으니까. 아마 그 전투에서 무언가 수를 썼겠지.
노네임에 들어온 게 자신의 의지인지, 무언가의 의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찌됐든 이 공장을 발견한 일은 과거 강태주의 의뢰주가 바란 일은 절대 아닐 터였다. 아마 수많은 의뢰를 진행해온 강태주가 어렴풋이 짐작하던 진실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강태주가 이곳으로 지호를 인도한 건 그 나름의… 선물인 것 같았다. 아마 지호를 위험에 빠트린 데 대한 대가가 아닐까.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건 아마 전 의뢰주에 대해 발설해야 하는 상황이 꼬인 것일 테고.
그렇게 매번 좋은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허소리의 꾸지람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지호는 제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 * *
집으로 들어서니 얼굴 보기 힘든 녀석이 거실에 날백수처럼 늘어진 채 지호를 반겼다. 급하게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를 켜 놓고 보던 이원이 손을 까딱였다. 지호가 순순히 다가가니 이원이 웃으며 지호를 끌어당겨 안았다.
“자기, 한 건 했네?”
“응.”
뉴스에서는 불법 공장에 대한 언급이 한창이었다. 소식이 알려진 건 한두 시간 전이지만, 문제가 문제이니만큼 순식간에 소식이 번져나갔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큰 건을 발견한 덕에 노네임의 주가는 오늘도 상승 중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대로 안정화를 켜서 지호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잘 돌아갈 만큼.
하지만 이 세계가 얼마나 잘 돌아가든, 지호가 멀쩡하지 않다면 이원은 분명 화내겠지.
조용한 지호의 시선을 즐기던 이원이 약간의 불온함을 느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잘못할 게 뭐 있어? 네가 잘못한 게 많지.”
“그건 그런데…….”
제 잘못을 곧이곧대로 수긍하는 것도 웃겨서 지호가 피식 웃었다.
“야, 주이원.”
“왜, 자기야?”
“이번 일만 정리하고 놀러 갈래? 날도 딱 좋은데.”
급하다고 해도 하루 정도 시간을 못낼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까지 고생한 이원을 위해서라면.
지호의 말에 이원이 밝게 웃었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