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타인과 우리(2)
꿈에서 신지호는 ‘제대로 된’ 관리자가 된 자신을 보았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EX급의 헌터.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만인이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절대적인 관리자.
지구는 풍요로운 행성이었고, 신지호 또한 그런 지구가 빚어 낸 특별한 관리자였다. 관리자가 되기 이전부터 숭고하고 완벽했던 영혼은 거대한 힘을 무리 없이 품어 냈다.
그곳에 주이원의 존재는 없었지만, 인류가 멸망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지호는 수많은 군대에게 제 힘을 나눠 줄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결국에는 쓰러졌다. 인간은 힘을 합쳐 노력했고 갑자기 날아든 대재앙에 대항했다. 모든 것은 성공적이었고…….
결국 지구는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우뚝 서는 데 성공했다.
꿈이 바뀐다.
꿈에서 신지호는 엉망이 된 세상을 보았다. 이계에서 찾아온 이가 지구를 제멋대로 들쑤시고 다녔다. 그곳에서 신지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호가 저 이계인에게 힘을 주고 자신의 그릇을 깨트렸기 때문에.
완벽한 아군은 없다. 결국 저것의 본질은 침략자일 뿐이었다. 지금은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척하지만, 언제든 낯을 바꿔 적이 될 수 있는 존재.
신지호는 어리석게도 그런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고, 결과는 배신이었다.
이계인은 본디 폭군이었다. 제게 은혜를 베푼 이의 힘을 도둑질할 만큼 양심도 도덕도 없는 자. 그런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 지호로서는 대항할 힘이 없는 게 당연했다.
모든 것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정복당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신지호는 끝끝내 좌절하며 후회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건 이 거지 같은 꿈이 계속 이어지는 건데.”
지호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말한 건가? 묘하게 현실성이 없는 가운데, 지호는 손가락에 간신히 힘을 주고 까딱거렸다. 아주 슬쩍 들리는 손가락을 시작으로 지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곳은 바닥이 없는 허상의 세계였다.
시커먼 오수와 같은 것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꾸물거렸다. 그 기분 나쁜 것들은 지호를 집어삼키고 싶은 것처럼 계속해서 몸 안에 침범하려 들었다.
하지만 지호의 주변에서 반짝이는 미약한 빛이 지호를 지켜 주고 있었다. 곧 꺼져 버릴 듯이 연약한 빛이었지만.
“그냥 포기하고 편해지는 게 어때. 크게 달라지는 일도 없을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지만 누군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과 현실 사이에 견고한 벽이 쳐진 것처럼, 분명 알고 있는데도 확실하게 대조할 수가 없다.
“달라지는 건 뭔데?”
“그냥… 네 몸이 바뀌는 거지.”
대체 뭐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거냐.
지호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 의식이 끌려 들어오기 전, 가짜를 마주하고 자신의 유일성이 훼손당한 듯 불쾌했던 기분이 생생했다.
“설마… 그건 애초에 내 몸으로 쓰려던 거였어?”
“맞아. 똑똑해서 좋네.”
상대는 지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뿌듯한 목소리였다. 물론 지호의 입장에서는 저를 정신적으로 납치한 존재에게 칭찬을 받아 봤자 불쾌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즉, 블랙마켓의 가짜 신지호는 애초에 잡힐 것을 상정하고 만든 미끼라는 거다. 신지호가 그 몸을 손에 넣도록 부추겨서 의식을 가짜의 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왜 이런 짓을 하지?”
“왜냐고?”
상대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됐다.
“네가 이상한 놈에게 빠져서 마력을 죄다 퍼 주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네가 누릴 힘과 영광을 그놈이 독점하고 있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대의 생생한 분노가 느껴진다. 분노는 지호를 향한 게 아니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그는 자신이 지호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호는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어떻게든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는데…….
“오지 마.”
서늘한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 이후 발이 멈췄다. 하지만 목소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지호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대와 달리 상대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무언가가 주변의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어, 간신히 인간의 실루엣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분명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낯선 존재인데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서리?”
“아니야.”
상대가 곧장 받아쳤다. 자존심이 상한 듯 조금 불쾌한 목소리지만… 역시, 지호에게서는 상대가 서리처럼 느껴졌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감에 불과했지만, 확실했다.
물론 서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서리에게 분노와 증오를 끼얹으면 저런 게 나오지 않을까 싶은, 그야말로 이 어둠과 같이 비틀린 존재였다.
“너, 서리와 같은 시스템이지?”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지호의 그릇이 깨질 때, 서리의 원형 역시 산산이 조각나 여러 곳으로 흩뿌려졌다고 말했다. 서리는 자신이 그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하는 짓을 보면 눈앞의 존재는 서리보다 훨씬 큰 파편으로 이루어진, 더 강력한 존재 같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런 짓 그만두고, 차라리 나를 도와주면…….”
“이게 너를 돕는 길이야!”
상대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상대의 분노에 반응하듯 주변의 어둠이 요동쳤다.
“그런 이계의 존재 따위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안 돼.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니며 그딴 놈 아래에 있을 셈이야?”
“아니, 난…….”
“네가 그릇을 회복하면 그런 놈 따위 얼마든지 지구에서 쫓아낼 수 있어.”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놈에게도 좋지 않을까?”
상대는 지호를 유혹하듯 속삭였다. 어쩌면 상대의 말대로 그게 쌍방에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주이원은 따르는 이가 많은 왕이고, 지구에서보다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멋대로 이원의 소망을 판단할 생각은 없다.
이원이 1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호만을 그리며 지구로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그가 사실 귀환을 바라고 있다고 해도 일단 믿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억지로 쫓아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지호의 생각을 다 아는 것처럼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지호의 팔목을 붙들었다.
상대와의 접촉이 몹시 불쾌하리라 생각했는데… 기묘하리만치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제 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리와 마찬가지로 관리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당장 그놈을 쫓아내라고는 안 할게. 대신 저항하지 마.”
상대의 말에 반응하듯 주변의 어둠이 꿈틀거렸다. 어서 빨리 신지호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듯이. 지호는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저항하지 않으면?”
“네게 그릇이 깨지지 않은 새 몸이 생기는 거야.”
그게 정말로 옳은 선택이라 믿는 잔뜩 도취된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 몸이 불완전한 건 영혼이 없기 때문이야. 네가 원래의 몸을 버리고 그 몸에 들어간다면, 너는 완벽한 몸을 갖게 되는 거야…….”
“…….”
“가장 중요한 건 영혼이니까, 아무것도 훼손되지 않을 거야. 괜찮아. 겁내지 않아도 돼.”
겁내지 말라니… 그렇게 말해도 조금도 믿기지 않았다. 상대가 그 말을 할 때부터 지호의 감이 비상사태를 감지한 듯 요란하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게 다가 아니잖아.”
“왜 못 믿는 거야?”
“네가 다루던 몸이지……. 거기 들어간 내가 정말 온전히 나로 남을 수 있어?”
애초에 가짜 신지호는 영혼이 들어가 있지 않은 존재였으니 골렘처럼 일시적인 의지를 부여하거나 조종하는 식으로 움직였을 터다.
그렇게 상대가 조종할 수 있는 몸에 지호의 영혼이 들어간다면, 지호는 정말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하지만 상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을 하네. 물론 어디에 들어가든 너는 너야.”
“안 믿어.”
사탕발림에 불과한 저 말을 믿는다면 정말로 바보겠지. 지호가 차갑게 말하자 상대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저항하지 마, 신지호.”
“나는 계속 헛소리를 듣고 있을 생각이 없어.”
지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지호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새겨졌다.
[별의 축언].
이곳에 별이 내리는 축언을 받을 상대는 신지호 하나뿐이다. 비록 그 스킬은 다른 사람에게 하듯 지호를 강화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마치 기적처럼 머리 위에서 빛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한줄기 빛을 시작으로 서서히 사방이 밝아졌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듯, 어둠이 물러나고 상대 또한 쫓겨나듯 뒤로 물러난다.
무언가 더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그르친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호를 집요하게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번지던 빛이 상대의 발 아래에 닿은 순간…….
지호의 의식은 어두운 의식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헉…….”
“저, 정신 들어?”
“괜찮으세요!?”
악몽에서 깨어나듯 갑자기 몸을 일으킨 지호를 보고 사방에서 요란하게 걱정했다. 깊은 물속에 빠져 있던 것처럼 귀가 먹먹해서 소리가 조금 먼 곳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지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꾸물거리던 어둠은 어디에도 없고… 돌아본 곳은 익숙한 병원의 풍경이었다. 창문 밖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로워 아무 이상도 없다.
지호는 그제야 제 옆을 돌아보았다. 깨어날 때까지 지키고 있던 건지 경현과 소리가 걱정하는 얼굴로 지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지호는 자신이 현실로 완전히 돌아왔음을 인식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지호야?”
“응, 괜찮아…….”
지호는 멍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의료진을 불러야겠다는 소리의 요란을 손짓으로 저지하며 지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사흘이요.”
아주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다. 잠시 날짜를 셈해 보던 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이원은?”
오늘은 분명 쉬는 날일 텐데, 그러면 이원이 곁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삐졌다지만 지호가 쓰러졌는데 무시할 녀석은 절대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가볍게 던진 질문에 경현과 소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지호가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지호는 아무런 일 없었던 척 하는 두 사람의 변화가 더욱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지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일어나면 안 된다는 만류가 들려왔지만 계속해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무슨 일인데.”
“길드장님, 조금 진정하시고…….”
“똑바로 말해요, 허소리 헌터.”
드물게도 지호가 명령했지만 소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경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리모컨을 가져와 TV를 틀었다.
그곳에는… 무척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모를 수가 없는 풍경은 바로, 지호가 20년간 살아 온 저택의 모습이었다.
뉴스의 상단에는 갑작스러운 균열 발생으로 두 명이 사망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