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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란波瀾(8) (144/283)
  • 18. 파란波瀾(8)

    아주 미세한 차이로 강태주의 검이 신지호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결코 치명상이라고 할 만한 부위는 아니었다. 원래 노리던 얼굴이 아닌 어깨에 얕은 상처를 냈을 뿐.

    규칙대로라면 강태주는 급소를 공격해야 승리인 데다, 공격 자체도 신지호가 앞섰으니…….

    어느 모로 보나 신지호의 완벽한 승리였다.

    승리한 신지호는 발목이 아플 텐데도, 벌벌 떠는 척하던 이전과 달리 조금의 통증도 느끼지 않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어때. S급 보조계 따위에게 진 소감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상대에게 진 강태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물끄러미 지호가 쥔 단검에게 닿았다.

    날부터 손잡이까지, 전체가 기이하리만치 새하얀 검이다. 겉보기에는 장식용으로 보일 만큼 섬세하게 생긴 검은 솔직히, 신지호의 외모만큼이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습게 본 저 단검이 결정타였다. 분명 한 뼘 길이의 날이었는데 강태주가 거리를 가늠하고 안심한 순간, 날이 길어져 그대로 옆구리를 찔렀다. 진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강태주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네가 아니라 네 무기에게 진 거 아닌가?”

    “미안한데 이건 내 스킬이야.”

    지호는 피식 웃으며 마력을 검에 불어넣었다. 신지호가 불어넣은 마력만큼 검이 길어졌다. 그리고 검은 마치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움직여… 다시 한번 강태주의 목에 닿았다. 강태주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을 만큼 위협적으로 빠르게.

    “이 검이 늘어난 것도 내 마력이고, 움직인 것은 내 스킬 덕이지. 이래도 인정하지 않을 셈이야?”

    강태주의 목에 닿은 검이 차마 피부를 찌르지는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둔 채 물러났다.

    강태주나, 이놈의 뒤만 쫓아다니는 주이원이라면 남의 목을 겨눈 상황에서 진작 피를 봤을 텐데.

    강태주는 퍽 흥미로운 얼굴로 신지호를 살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신지호는 더없이 집중하며 강태주를 노렸다. 보통 그런 날이 선 검으로 상대를 공격할 때면 자연스레 약간의 살기를 품을 만도 한데… 신지호에게는 그런 공격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 발목을 분지르고 피를 낸 상대에게 조금의 살의도 보이지 않는다니. 이건 다른 의미로 미친놈이다.

    “하하. 짜릿하네.”

    “…….”

    “패배를 인정하지. 넌 최고였어, 신지호.”

    강태주는 웃으며 떨떠름한 얼굴로 저를 보는 신지호를 바라보았다. 져놓고 왜 웃는지 의아하단 얼굴이지만… 던전도 슬슬 별 자극으로 느껴지지 않는 요즘, 신지호와의 싸움은 정말로 짜릿했다. 계속 지켜보고 싶을 만큼.

    * * *

    “자기야!”

    이원이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던전에서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1분 만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이 정도 시간이면 컵라면도 안 익을 텐데.

    문 밖에서 공간이동 셔틀로 부려 먹힌 황혜림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이원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징징거리면서 지호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물론…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지만.

    “자기가 다쳤다는 말 듣고 너무 놀라서… 강태주 그 새끼, 목을 부러트려 버려야…….”

    “하지 마.”

    “그치만 자기야…….”

    “내가 이미 때려 줬는데 왜 네가 복수해?”

    뭐라 말하려던 이원은 입을 다물었다. 지호의 눈빛에 뿌듯한 빛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지는 건 자존심 강한 지호를 긁는 결과밖에 안 나올 터.

    결국 이원은 꾹꾹 눌러둔 살의를 속으로 완전히 감춘 채 웃어 보였다.

    “으응, 그러게. 우리 자기가 때려 줘서 잘됐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달려왔더니 자세한 사정까지 듣지 못한 듯 이원이 물었다. 지호가 대답대신 하하 웃기만 하니, 이원은 멋대로 침대로 올라와 지호를 뒤에서 꽉 부둥켜안았다.

    “야…….”

    바로 앞에 혜림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떼어내려 하자, 이원은 오히려 팔에 힘을 꽉 줘서 지호를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호가 난처해하자 혜림이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편히 계세요.”

    “그,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신지호 씨가 이겨서 속 시원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러고 보니, 황혜림도 따지고 보면 보조계였다. 강태주가 직접 혜림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녀 또한 불쾌했을 터였다.

    “사실 이길 거라고 기대 안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하네요, 신지호 씨.”

    “그냥 좀, 운이 좋았어요.”

    강태주가 방심할 거라고 생각했고, 정말로 방심한 게 다행이었다.

    지호가 준비한 마지막 아이템은 고속이동이 가능한 스크롤이었다. 강태주가 처음에 돌을 던져 공격했던 것처럼, 원거리에서 끝내려고 하면 지호에게는 반격할 수단이 없으니까.

    지호의 검이 마력을 부여했을 때 늘어나긴 해도 어디까지나 장검 수준으로 늘어나는 수준이다. 그러니 강태주가 접근하지 않으면 지호가 다가가서 공격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갑자기 달려들면 강태주의 방심을 끌어내기 힘드니, 스크롤을 쓰게 된다면 이길 확률은 30% 이하로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 발목을 다친 건 좀 아프지만 결과적으로 강태주가 직접 가까이 다가와 공격해 줘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지호가 그와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강태주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다친 게 낫다는 생각을 이원에게는 숨기겠지만.

    안 그래도 전투가 끝난 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다가 결과가 나자마자 경기장으로 난입한 허소리와 임승주가 강태주를 향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이겼으니 된 거 아니냐며, 이 정도 상처는 힐러의 도움만 있으면 금방 나으니까 별거 아니고, 오히려 다친 덕에 손쉽게 승리했으니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다가…….

    ‘미쳤어요!? 몸이 무슨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인 줄 알아요?’

    ‘아니, 고쳐서 쓸 거니까 일회용품은 아니지…….’

    ‘허소리 헌터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래 쓸 몸을 마구 다루면 아무리 힐러가 있어도 결국에는 망가지는 법입니다.’

    ‘맞아, 맞아! 저 미친놈이 때린 걸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고요!’

    ‘길드장님은… 자기 몸을 아끼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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