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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란波瀾(5) (141/283)
  • 18. 파란波瀾(5)

    잠깐 아찔한 기분이 들더니 순식간의 주변의 공간이 바뀌었다. 화려한 방 안의 풍경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오래 관찰할 틈은 없었다. 문이 닫히는 격렬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지호를 아플 만큼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끌어안은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이원이었다.

    “주이원.”

    “…….”

    “이원아.”

    납치에 가까운 행위지만 화를 내려던 지호의 목소리는 갈수록 누그러졌다. 이원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위험한 짓을 하냐며 버럭 소리치고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뜻밖에 이원은 지호를 꽉 끌어안고 있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주이원, 얼굴 좀 봐.”

    주이원은 지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호는 손을 뻗어 이원의 등을 토닥였다.

    오래 살았다면서 왜 갈수록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 한참을 시위하듯 침묵하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응?”

    “막 이플리스에 갔을 때…….”

    “응.”

    “그때는 내가 약해서 아무것도 못 했거든. 나 혼자서는 다른 사람의 공격을 피하는 것조차 어려워서… 처음에 떠돌아다닐 때는 크사냑과 딱 붙어서 자기도 하고.”

    “붙어서 잤다고?”

    사실 이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호는 저도 모르게 뾰족한 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건 지호뿐만이 아니었다. 황급히 고개 든 이원이 변명했다.

    “아니, 전에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고 말했잖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

    대체 남의 위에 올라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지호는 델타의 길드장 에이드리언에 대해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중년의 나이지만, 나이가 흠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숙한 매력으로 보여질 만한 외모였다. 그런 남자와, 아직 정신연령도 지호와 비슷한 나이대였을 이원이 붙어 있었다니…….

    불신에 가득 찬 지호의 반응에 이원은 더욱 더 당황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게 아니라…….”

    “이상한 게 뭔데?”

    “진짜 그런 거 아니야. 크사냑의 본체는 거대한… 고래를 닮은 생명체야. 우리처럼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말 그대로 얹어 두거나 방패로 쓴 거라고.”

    “…….”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해보고 기분이 나빠진 건 맞지만, 정말로 이원이 남과 붙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지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조금 저조해졌던 기분도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이원의 얼굴을 보니 완전히 풀렸다.

    “정말, 딴 건 몰라도 그런 오해는 억울하다고……. 내가 몇 년을 참았는데.”

    들으란 듯 크게 한숨 쉰 이원이 지호를 다시 끌어안았다. 조금 전보단 느슨한 힘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야, 잠깐…….”

    “걱정스러워서 그래. 그놈 정체를 전혀 모르잖아. 싸운다고 해 놓고 수작 부릴지 누가 알겠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나도 모두 감안해서 대답한 거야.”

    “그랬으면 거기서 넙죽 싸움을 받아들이질 말았어야지. 그냥 그만둬, 자기야.”

    이원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귓가에 불어넣는 숨이 간지럽고 묘했다. 지호의 다리 사이로 들어온 이원의 다리가 밀착하자 절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지호의 다리에 힘이 빠지자 이원이 웃으며 허리를 안아 올렸다. 그러면서 목에 입술을 묻는다. 간지러울 것 같은 접촉인데 간지럽기는커녕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은 감촉에 홀리듯 넘어갈 뻔한 지호는 간신히 정신 차리고 이원을 세게 떠밀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마.”

    “그냥 자기 기분 안 좋아 보여서 기분 좋게 해 주려던 건데…….”

    이원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이원을 노려보았다.

    “너 거기서 정말 아무도 안 사귄 거 맞아?”

    “억울하네, 진짜.  따지고 보면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참은 거라고.”

    “……그렇게 말하니 좀 무서운데.”

    그쯤이면 그냥, 좀 잊고 해도 되지 않나? 지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원은 입술을 비죽였다.

    묘한 분위기가 깨진 사이 지호는 이원을 밀치고 후다닥 도망쳤다.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쓴 지호는 이원을 노려보며 방 구석 쪽을 손가락질했다.

    “다가오지 마. 넌 거기에 있어.”

    “섭섭하네, 자기. 좋아했으면서.”

    지호는 대답 대신 눈을 크게 뜨고 이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별 위협이 되진 않은 것 같지만, 덕분에 이원은 얌전히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우스운 꼴이긴 하지만… 지호는 진지하게 이원을 응시했다.

    “주이원.”

    “응.”

    “너는 날 그렇게 못 믿는 거야?”

    “…….”

    “너는 내가 그렇게 약하고 하찮아 보여? 네가 지켜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 할 만큼?”

    “지호야, 나는.”

    “날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지켜 주기만 하면 나는 평생 제자리일 텐데, 난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생각 없거든?”

    “하지만 내가 안 말리면 무리할 거잖아.”

    이원 또한 쌓인 말이 많은 듯 지호를 노려보았다. 이원은 자신의 얼굴을 보란 듯이 툭툭 쳤다.

    “오늘도 별거 아닌 싸움에 피까지 흘리고. 너 여기 핏자국 하나도 안 지워졌거든?”

    “피 좀 흘린 정도로 뭐…….”

    지호가 대충 손으로 문지르자 이원이 도끼눈을 뜨며 스킬을 썼다.

    시원한 물이 지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간다. 이원은 보란 듯 자신이 닦아 낸 지호의 피 섞인 물을 허공에 부유시켰다. 생각보다… 좀 많이 흘리긴 했다.

    “이것 봐. 별거 아니라고 무리하는 거 맞잖아? 게다가 양호진은 별것도 아닌데 나한테 잘난 척이나 하고.”

    “그건 그냥, 아군이라는 믿음에…….”

    “그 새끼 눈빛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

    안 봤으니 말은 못 하겠지만, 곱지 않았으리란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이 순간에 이원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원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나도 길드 노네임으로 옮길까 봐.”

    “뭐?”

    “노네임 가면 지호가 자기 품 안의 길드원이라고 소중히 대해 줄 거 아냐. 그냥 옮겨 버릴까.”

    “미쳤어?”

    “왜? 좋은 생각 같은데.”

    “…….”

    청람은 단순히 다른 길드가 아니라고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지금 저 소리가 단순히 꼬장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보통은 전자겠지만… 이원이라면 후자일 수도 있어서.

    지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이 고집 센 녀석을 설득하는 것은 단순히 고집을 부리기만 해서는 불가능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난 진심인데.”

    “진심이어도 그만하고. 일단 내 계획을 들어나 봐.”

    지호 역시 이원이 왜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이원 이상으로 지호가 더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똑같은 S급이라지만 전투계와 보조계의 싸움은 결과가 불 보듯 뻔하니까. 하지만 당연히 지호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강태주에게 싸움을 건 것은 아니었다.

    보조계인 지호가 꼼수를 써서 승리했다고 하지 못할 정도의 환경을 만들고, 강태주에게서 승기를 가져올 방법을 궁리했다.

    짧은 시간에 짜낸 수지만 나름의 묘수라고 생각한다. 이 계획을 조금 더 보완하면 질 확률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을 마친 지호는 퍽 의기양양한 얼굴로 으스댔다.

    “어때, 즉석에서 생각한 것 치곤 괜찮지?”

    “응. 영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긴 한데…….”

    이원도 꽤 그럴싸하다고 여겼는지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역시 지호를 위험에 노출하는 건 싫은지 조금은 못마땅한 눈치이긴 했지만. 다른 좋은 수가 없는지 궁리하던 이원은 이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가 관리자인데 이 벌레 같은 새끼들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떠드는 걸 방치하느니……. 이 기회에 자기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게 낫겠지.”

    이원이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입단속을 좀 못한 것 같은데……. 지호는 못 들은 척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이원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준 것만으로도 자신이 생겼으니까.

    “응. 나도 미쳤다고 강태주에게 질 게 뻔한 싸움을 걸겠어? 그 인간이 날 이기면 언론에 뭐라 말하고 다닐지 뻔한데. 또 예전처럼 돌아갈지도 모르고…….”

    지호는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이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다 죽여 줄게.”

    “죽이진 말고…….”

    “어쨌든 원흉은 잡아서 죽여야지.”

    “악플러를 하나하나 다 잡아 죽이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가볍게 웃는데, 이원의 기세가 생각보다 흉흉했다.

    “왜 그런 반응이야?”

    “말해도 될지 고민했는데, 이쯤에서는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헌터 스페이스 말이야.”

    이원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이름에 지호가 움찔했다.

    헌터 스페이스. 처음 지호가 각성했던 무렵부터 계속,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호를 적대시하며 깎아내리던 인터넷 커뮤니티다.

    “사실 거기 관리자를 잡으려고 했었거든.”

    “……잡아서 뭘 하려고?”

    “그냥 좀, 타이르는 거지…….”

    그런 험악한 짓 좀 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듯한 지호의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던 이원이 이내 급하게 항변했다.

    “아니, 그런데 못 잡았어. 그냥 못 잡은 게 아니라 흔적이 전혀 없었어.”

    “흔적도 없었다고?”

    “응. 알아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어.”

    신빙성 없는 목표는 둘째 치고, 흔적조차 없다는 건 이상했다. 아마 이원의 성격상 헌터 스페이스가 활개 친 이후부터 잡으려고 했을 텐데,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추격하면서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니.

    “평범한 인간이 열어 둔 건 아니야. 게다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널 저격하고 있고.”

    “…….”

    처음에만 조금 찾아보고 나중에는 아예 인터넷 자체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날선 적의가 누군가의 의도에서 시작된 거라고?

    지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물론 누군가의 수작이라고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악의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더 우울해진다. 그 당시의 일은 지호에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았으니까.

    “이럴까 봐 말 안 한 건데.”

    이원이 후회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알아만 두라는 거야. 생각보다 널 노리는 무리는 많고… 너는 지금보다 훨씬 경계해야 한다는 걸.”

    지호는 갑자기 터진 폭탄 같은 사실에 고심하느라 멀리 떨어진 상대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원이 지호의 어깨를 누르고 침대로 밀어트리고 나서야, 지호는 뒤늦게 이원이 제 앞까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지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원이 불쑥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뭐야, 아직 안 죽었네.”

    “야! 아, 윽…….”

    당황한 지호가 이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단단한 어깨는 도통 밀려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원은 씩 웃으며 지호의 귓가에 입 맞췄다.

    “이상한 짓 안 하니까 너무 겁먹지 마.”

    “충분히 이상하거든!?”

    “그냥 자기 스트레스 많이 받으니까… 조금 풀어 주려는 거지. 손으로 하는 마사지 같은 거야.”

    자꾸만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이원이 낮은 웃음을 흘릴 때마다 숨 닿는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리 귀여운 지호.”

    “시, 시끄러워…….”

    이원은 꼭 감은 지호의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지쳤다……. 크게 지칠 일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지쳤다. 저번처럼 입이 아니라 손으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휴…….”

    얼굴 보기 민망해서 이원을 쫓아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원이 그 상태로 나가도 되는 건지 걱정되기도 하고…….

    “…….”

    고민하던 지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애초에 그 녀석이 제멋대로 군 건데 뭐하러 신경을 써 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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