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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란波瀾(4) (140/283)

18. 파란波瀾(4)

“좋아요. 하죠.”

당연히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거절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신지호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은 기색으로 시원스럽게 답했다.

본인이 제안해 놓고 의외란 듯이 쳐다보는 강태주보다 격렬하게 반응한 건 주이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원이 험악하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강태주의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강태주는 눈썹을 까딱였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 강태주의 주변에서 격렬한 마력의 흐름이 요동치는 걸 보아하니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주이원의 힘이 너무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고 있으니 옴짝달싹 못 할 뿐.

목이 졸려 얼굴이 새하얘지는 와중에도 강태주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씩 웃었다.

그 꼴을 보니 계속 목이 졸리든 말든 가만히 놔두고 싶었지만, 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원을 잡아당겼다.

“야, 그만해.”

“왜?”

하지만 지호를 홱 돌아보는 이원의 눈빛은 흉흉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이 모든 것을 불태울 태양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미쳤어? 누굴 상대한다는 거야, 지금.”

“그러는 너야말로 미쳤어? 내가 한다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 죽여 없애서 없던 일로 만들기라도 하려고?”

지호가 사납게 받아치자 이원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말 지호의 말대로 실행하려고 했다는 듯이.

이원은 강태주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지호에게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잘못되면 다 끝장나는 거야. 알아?”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너는 내가 아무 대책 없이 지르는 놈으로 보여?”

“응.”

당연하다는 돌아오는 답이 지호의 신경을 거슬렸다. 물론 지호도 자신이 맡은 자리의 무게는 알고 있다. 자신이 아직 이원에 비하면 턱도 없이 약한 데다 잘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놈처럼 무시당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지호는 입술을 깨물고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흡인의 천구].

바람이 분다는 착각이 들 만큼 많은 마력이 지호를 향해 휘몰아쳤다. 너무 많은 마력을 받아들이면 몸에 부담이 가기 때문에 항상 조절해서 쓰던 스킬이지만 이번에는 마음껏 마력을 빨아들였다. 이전보다 지호가 가진 마력이 훨씬 늘어난 덕에 시스템창에 보이는 마력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신지호!”

주이원이 창백해진 얼굴로 버럭 소리치고 나서야 지호는 제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원이 다가오려던 순간, 지호가 더 많은 마력을 흡수했다.

“다가오면 계속할 거야.”

이제는 귀에서까지 피가 흐르자, 이원은 멈춰 서는 수밖에 없었다.

한계치의 마력을 모은 후, 지호는 작게 읊조렸다.

[별의 축언].

지호의 마력이 고스란히 양호진에게 전달됐다. 양호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난 딱히 전투계는 아닌데 말이지……. 하물며 상대가 주이원이라니.”

하지만 엄살을 부리는 것 치고 양호진의 눈빛도 퍽 날카로웠다.

[여우불].

새파란 불이 타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부터 타오른 불길이 마치 보이지 않은 줄을 타고 가듯 사방에서 이원을 덮쳤다.

쾅!

평범한 불이라면 낼 수 없는 폭음이 울렸다. 호진은 추가로 공격하는 대신 [축지법]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진이 나타난 건 레스토랑의 가장 끝자리였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거대한 활을 들고 있었는데, 화살이 이미 이원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호진에게는 목표에 명중시키는 스킬, [산사법]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아는 건지 이원은 평소처럼 피하는 대신 손을 뻗었다. 은은하게 금빛이 도는 방패가 호진의 화살을 막아내는 순간, 아직 남아 있던 [여우불]이 이원의 발치를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여우불은 이원의 무릎까지 올라갔을 때 맥없이 꺼졌다. 이원의 옷조차 그을리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호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봉긋이 솟아오른 아홉 개의 꼬리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원의 발치 아래에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기다란 마력의 끈이 이원의 발치를 구속한다. 이원은 스킬을 내버려 둔 채 호진을 쏘아보았다.

“아무리 해도 넌 내 상대가 안 돼.”

“하지만 내가 아무리 쳐도 넌 날 공격 못 하지 않겠니? 미움받긴 싫을 테니까.”

정말 얄밉게 구는 호진의 말에 이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호진을 죽이고 싶다는 듯 맹렬한 살의가 들끓었지만… 그는 호진을 공격하지 못했다.

잠깐 돌아본 지호의 얼굴이 여전히 사납게 굳어 있었으므로.

후, 길게 한숨을 쉬며 이원은 거의 질식하기 전인 강태주를 놓아주었다. 바닥에 쓰러진 강태주는 죽을 뻔한 것도 개의치 않고 다 쉰 목소리로 웃었다.

“재밌네……. 여러모로 재밌어.”

양호진을 제법 흥미롭단 듯 힐끔거린 강태주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애초에 단정한 차림도 아니라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 그럼… 마저 이야기해 볼까?”

“신지호, 나랑 얘기 좀 해.”

지호는 이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강태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원이 화가 부글부글 끓는 걸 간신히 참는 얼굴로 옆자리로 돌아왔고, 이어서 꼬리를 집어넣은 호진도 잔뜩 기운 빠진 걸음걸이로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원래의 구도로 돌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지호였다.

“일대일로 싸우는 건 좋아. 하지만 당신은 공격계 헌터고 나는 보조계 헌터인데, 그냥 전투로 맞붙겠다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돼?”

도발하듯 묻는 강태주에게 지호는 어처구니없단 듯 픽 웃었다.

“그러면 남 강화시키는 걸로 일대일 해 보든가. 애초에 괜한 당신 시비에 응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게는 리스크가 큰데?”

사납게 받아치는 지호의 말을 듣던 강태주가 이죽거렸다.

“야, 그런데 말이 짧다?”

“다짜고짜 인터뷰로 욕부터 하더니 이젠 싸우자는 사람을 내가 존중해 줘야 해?”

“우리 나이 차이가 몇인 줄 아냐?”

“나잇값을 하고 말하든가. 유치하게 기사로 깔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난리야?”

“그래, 뭐 좋아. 반말하니까 더 귀엽네.”

씩 웃으며 하는 말은 누가 들어도 주이원을 향한 도발이었다. 실제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 주이원의 발 아래 바닥이 조금 깨져 있었으니까.

속으로 한숨이 나왔으나 일단 강태주와의 마무리가 먼저였다.

“당신이랑 내가 일대일로 맞붙어서 싸운다? 그건 말도 안 되지. 당신도 알 거 아냐? 대신 내가 다른 방식을 제시할 테니 거기에 맞춰서 싸워.”

“뭘로 싸울 생각인데. 시험이라도 보자고?”

“그럴 리가 있나. 헌터에 어울리는 싸움 방식으로 싸워야지.”

“생각해 둔 게 있냐?”

“지금 생각난 게 있어. 구체적으로 가능할지는… 좀 알아봐야겠지만.”

그냥 붙으면 강태주의 일격에 지호가 패배한다. 그건 뻔한 일이니, 지호는 강태주의 허점을 찌를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지호의 말에 잠시 궁리하는 듯 강태주가 느릿하게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그 동안 레스토랑 안에는 숨이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강태주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면 좋을 대로 해. 구체적인 방식이 결정되면 연락하고. 시기도 마음대로 해. 한 10년 정도로 잡고 도망쳐도 상관은 없어. 대신 계속 언론에 이빨 깔 거지만.”

“당신이나 도망치지 마. 한 달 안에 연락 주지.”

“좋아.”

지호의 약속을 받은 강태주는 정말로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있는 요리를 마저 집어먹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싸우다가 엉망이 된 요리가 많았는데도 요령껏 괜찮은 부분을 골라 먹는다.

정말 뻔뻔한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서는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뜨겁다. 지호와 등 뒤의 이원을 번갈아 보던 호진이 씩 웃었다.

“음, 그럼 나는 가 볼게? 둘이 잘 놀렴.”

도망가지 마!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가 딱 제때 오는 바람에 호진은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지금까지 이원을 극도로 경계하던 호진이었는데……. 이원의 존재가 지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게 된 것 같아 안심… 이라고 하기엔 지금 당장 처한 상황이 난처하다.

뭐, 아무리 화나 봤자 이원이 저를 죽이기야 하겠냐마는.

남의 앞에서 대놓고 이원의 의견을 무시하고 면박 줬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물론 이원도 멋대로 끼어들었으니 잘한 건 없지만, 주이원은 남도 아니고 가족 같은 친구… 에 예전에는 애인이었다고 하니, 사과로 좋게 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호가 사과하는 것보다 더 먼저.

쾅!

비상구의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이원은 자리에 없었다. 지호는 급히 비상구의 문을 열고 이원을 따라갔다.

“주이원!”

한 층 아래에서 다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주이원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튀어나온 팔이 지호를 잡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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