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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란波瀾(3) (139/283)
  • 18. 파란波瀾(3)

    “미친 소리는 그만해.”

    지호가 한마디 하기 전에 먼저 양호진이 나섰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주이원이 튀어나올 상황을 걱정하는 듯 보였다.

    “우리가 뭘 믿고 우리 길드장을 당신 같은 놈에게 A급과 함께 보내라는 건지 모르겠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호진의 날 선 질문에도 강태주는 여전히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씩 웃었다.

    “호텔로 올라가자는 게 다른 뜻이 있어? 아,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

    어리다기에는 이미 천 년 묵은 구미호인 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보며 강태주가 낄낄거렸다.

    “길드장님도 좋지만 난 그쪽이 더 취향인데. 같이 올라갈래?”

    “헛소리만 하겠다면 이만 돌아가겠어. 우리 길드장님은 그쪽이랑 달라서 바쁘니까.”

    노골적인 도발에도 호진은 침착함을 되찾고 대답했다. 그러자 재미없다는 듯 강태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유머를 모르네. 하여간 비리의 온상다운 길드야.”

    “유머와 비리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저희는 비리라고 불릴 만한 짓을 저지른 기억은 없습니다.”

    “아니면 뭔가 각성자를 승급시키는 비법이라도 있어? 당당하게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는 거.”

    “…….”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강태주가 저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었다. 시스템창이니 보주니 인외종족이니 하는 이야기를 강태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수상한 점이 많은 남자다. 이쪽의 정보를 유출해 이득이 될 건 없다.

    하지만 지호의 침묵을 회피라고 여긴 듯, 강태주는 더욱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거봐, 역시 처음부터 비리로 올라간 분은 다르다니까?”

    거기까지 말을 마친 강태주는 눈동자만을 굴려 시선을 내렸다. 대체 언제 접근한 건지 모를 만큼 한순간에 강태주의 목에 날이 새파랗게 선 검이 닿아 있었다.

    검의 주인은… 당연히 양호진의 노력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주이원이었다. 검을 겨눈 채 이원은 살벌하게 협박했다.

    “저번에 깨진 걸로는 부족했나? 다음번에는 시체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텐데.”

    “아, 그랬던가? 하지만 무서운 말은 남들 안 보는 데서 해야 하지 않겠어? 더러운 성질 누르고 이미지 관리하셔야지, 청람 길드장님. 아, 노네임 길드장에게 살해 누명 씌우고 싶으면 죽여도 좋고.”

    강태주의 태도는 여유롭고 뻔뻔했다. 이원이 잔뜩 짜증이 나서 검을 바싹 들이대자,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강태주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그제야 강태주도 긴장한 듯 근육이 뻣뻣하게 일어섰다.

    S급 헌터의 신체는 강하다. 어지간한 날붙이에는 상처도 입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원은 스킬도 쓰지 않고 검 하나로 강태주에게서 피를 내고 있었다. 힘의 격차가 여실히 드러나는데도 강태주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씩 웃었다.

    “그래서, 계속 이 새끼 세워 두고 대화는 마저 안 할 거야?”

    “대화할 생각이 없었던 건 그쪽이잖아요? 이제 제대로 말할 생각이 있다면 치워드리죠.”

    “치워 달라고 하면 이 미친놈이 곱게 치워 줘? 이야, 아주 말 잘 듣는 애인을 두셨어.”

    지호의 제안에 강태주가 이죽거렸다. 이원과는 애인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저 인간이라면 또 꼬투리를 잡으며 깐죽댈 게 뻔해서 지호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이원에게 눈짓했다.

    “그래, 나도 목이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치워주면 제대로 대화해 보지.”

    지호가 이원을 힐끔 쳐다보자 이원은 순순히 검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당하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목에서 흐른 피를 대충 닦아 낸 강태주는 호진과 이원을 가리켰다.

    “내 요구랑 많이 떨어진 놈들이지만… 저것들이 굳이 여기 앉아 있겠다면 좋아, 거기까진 용납하지. 단 노네임 길드장과 대화하는 중에 쓸데없이 끼어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좋아요.”

    지호가 냉큼 대답하자 이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더 말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앉았다. 이원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몹시 흉흉해서 다시 끼어들까 봐 조금 조마조마했다. 지호가 이원을 흘겨보자 그제야 조금 기세를 누그러트린다.

    ‘애초에 끼어들지 말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굳이 강태주의 앞에서 이원과의 불화를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원 님께서는 오랜 세월 왕으로 군림해 오셨습니다. 남에게 명령하면 상대가 그것을 따르는 게 당연한 삶이었지요. 때문에 지호 님을 아끼는 마음으로 하는 행동이 조금 강압적으로 느껴지실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원 님께서도 바뀌려고 노력 중이시니…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이원의 심복들이 묘사하는 주이원은 썩 너그러운 왕도 아니었으니까, 본래 이원의 성질대로라면 진작 강태주를 한 방 먹여도 이상할 게 없다. 제 나름대로 참고 있으니 너무 탓하지는 말자.

    지호는 이원에 대한 생각을 접고 강태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하늘의 천희림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둘 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성격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공통점까지 있었다.

    하지만 천희림이 길드라는 규격에 자신을 욱여넣고 산다면, 강태주는 최소한의 규칙도 없이 살아가는 망나니였다.

    지호는 강태주의 시스템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통 시스템창은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강렬한 경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천희림의 시스템창에는 가족에 대한 미련이 철철 넘치는 스킬이 많았다. 하지만 강태주의 시스템창에서는 죽은 가족에 관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이니, 정에 의해 움직일 만한 인간은 아니다. 뭘 위해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 인간.

    그런 인간이 과연 무슨 제안을 할지…….

    다들 주목하는 가운데 강태주는 나이프를 들어 테이블 위에 꽂았다. 두부 자르듯 손쉽게 들어가는 나이프를 보며 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재물손괴죄입니다.”

    “물어주지 뭐. 테이블 하나 값을 못 물어주겠어?”

    “물어주겠다면 상관없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시다면 빌려드릴 수도 있고요.”

    “하하. 걱정해 줘서 고맙네. 듣던 대로 참 호구야.”

    “…….”

    호구라니, 그런 건 절대 아닌데. 강태주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걸까.

    “누구한테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별로요. 오래 앉아 있을 생각 없으니 빨리 본론이나 말해 주세요.”

    “성질 급하긴. 예쁘게 생겨서.”

    역시 한 대 때릴까? 지호는 테이블 아래에 내려놓은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굴었기에, 강태주는 이내 재미없단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응. 까고 말해서 너 같은 보조계가 S급이라는 게 좀 이상하거든?”

    “…….”

    무슨 말이 나오든 덤덤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강태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로 짜증 났다. 등급에 관한 논란으로 1년 넘게 시달린 지호에게는 치명적인 부분이었으니까.

    “이상하다고 해도 협회의 결론이니 강태주 헌터가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

    “아니, 참견할 만한 일이지. 한국에 S급이 너무 많이 몰려 있다고 불평인 사람들이 있어. 네 등급을 한 단계쯤 주저앉히고 싶어 하더라고.”

    “그건 어디의 사주를 받은 겁니까?”

    “사주라니, 그런 무서운 말을.”

    강태주가 과장되게 부정했지만 이미 동의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느 나라가 S급 헌터를 많이 보유했는지는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다. 주이원이 워낙 압도적이라 유일한 SS급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틈만 나면 자국의 헌터를 SS급으로 승급시키려는 노력도 여러 나라에서 꾸준했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어차피 한국을 등지고 해외 이곳저곳을 떠도는 인간이다. 굳이 돈 되는 일에 국적을 따지진 않을 것이다.

    지호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강태주가 의기양양하게 이죽댔다.

    “그렇잖아?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게 S급이라니. SS급은 더더욱 말도 안 되고. 안 그래?”

    “…….”

    여러 나라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사실 지호를 SS급으로 승급시키자는 의견은 이미 여기저기서 나왔었다. 비록 조건이 있다 해도 C급 헌터를 S급으로 바꾸는 능력은 전무후무했으니까.

    한국의 헌터 협회가 꽤 의욕적으로 추진했다고 들었지만… 한국에만 SS급 헌터가 둘이나 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 타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무산되긴 했지만 한국에 SS급이 추가될 뻔했다는 사실을 경계하는 나라가 많은 모양이다. 강태주는 그들 중 하나에게 의뢰를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지호를 의심하고 깎아내리는 여론전을 시도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그들에게 기름을 끼얹는 꼴이니…….

    무슨 얘기가 나오든 물러서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며 지호는 강태주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시죠.”

    “대단한 건 아냐. S급 헌터라면 적어도 같은 S급과 맞붙어 이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아무리 보조계라도 말이야.”

    “…….”

    “싸우자. 나랑 일대일로.”

    뭐가 대단하지 않다는 건지. 지호가 보조계 스킬만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주제에, 강태주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지호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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