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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블랙마켓(2) (134/283)
  • 17. 블랙마켓(2)

    “그럼 준비할까.”

    이원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질적인 마력이 지호의 몸을 휘감았다. 살짝 불쾌한 느낌에 지호가 눈을 찌푸렸다 떴다. 그러자 눈앞에 낯선 남자가 이원 대신 서 있었다.

    저게 변장한 이원이란 걸 알면서도 도저히 동일 인물이란 걸 납득하기 힘들 만큼 다르다.

    신뢰감 넘치는 인상의 말끔한 미남이 사라지고, 대신 눈빛이 죽어 있어 어딘지 음험해 보이는 데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표정도 알아보기 힘든 중년남성으로 변했다.

    지호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자 이원이 피식 웃으며 제 몸을 툭 쳤다. 그러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기 눈에만 원래대로 보이도록 해 뒀어. 우리 자기, 내 얼굴 좋아하잖아.”

    “안 좋아하거든? 조금 전보다는 이게 낫지만.”

    이원이 이상한 모습으로 다시 변할까 봐 급히 덧붙였더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소리 높여 웃는다. 그런 이원을 보며 지호는 조금 불안해졌다.

    “지금 난 어떤 모습이야?”

    “음, 비열한 사기꾼처럼 생겼어. 전과도 있고, 남의 돈도 떼어먹고, 이젠 가족들도 다 외면하는…….”

    “이제 됐어. 구체적인 묘사 고맙다.”

    이상하게 만들어놓고 좋아하다니, 사실 이원은 지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원한이라도 품은 게 아닐까. 하지만 이원은 지호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몹시 뿌듯해 보였다.

    “자기는 평소에 너무 눈에 띄니까 파격적으로 바꿔봤어.”

    “아, 그래…….”

    “어차피 가면 쓰니까 자세히는 안 보일 거야.”

    이원은 미리 준비해 둔 가면을 꺼냈다. 입술 부근만 뚫린 정교한 모양새라 정체를 들키진 않을 것 같다. 뭐, 이 정도의 환각이면 가면을 벗어도 정체를 알아보긴 힘들겠지만.

    가면을 쓰기 전, 지호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원래 얼굴의 위에 마력의 막이 덧씌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경험하니 훨씬 신기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음.”

    딱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원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딴청했다.

    원래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지만 저 반응을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어서, 지호는 이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원이 한 손을 들어 지호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줄래?”

    “너도 원래대로 보이도록 바꿔.”

    “나는 진작 원래대로 보이지……. 원래대로 보이는 게 문제라고.”

    한숨을 쉬며 이원은 말을 돌리고 싶은 듯 시선을 다른 쪽으로 던졌다. 딴짓하고 있을 때는 아니기 때문에 지호도 더 말하지 않았다.

    블랙마켓으로 가는 길은 언뜻 보기엔 평범한 야산의 입구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블랙마켓의 입구가 나온다.

    “이제 가자.”

    “자기, 힘들 텐데 내가 안아 들고 갈까?”

    “좋은 말로 할 때 입 다물고 출발해라.”

    지호의 서늘한 경고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이원은 한참 웃었다. 그러다가 지호의 눈초리가 곧 이원을 걷어찰 만큼 험악해질 때 즈음에야 발걸음을 떼 블랙마켓을 향해 출발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한 사람도 없었지만 블랙마켓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둘씩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몰래 찾아가는 사람들답게 서로를 피해서 금세 사라졌다.

    그 은밀한 분위기가 낯설었다. 정말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야산의 중턱 즈음까지 올랐을 때, 마침내 블랙마켓의 입구가 드러났다.

    블랙마켓의 입구는 바로 개방형 던전의 게이트였다.

    게이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사람이 둘을 막아섰다.

    “이 앞은 게이트라 위험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게이트이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이원이 변조된 걸걸한 목소리로 암호를 말하고 동전을 내밀었다. 지호의 몫까지 두 개의 동전을 받아든 상대가 진위를 검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몬스터 나오면 요령껏 잡고 못 잡으면 알아서 튀고. 단속 뜨면 이쪽에선 책임 안 지니까 알아서 튀쇼.”

    처음에 막아서던 때와는 달리 건들거린 태도로 충고한 남자가 비켜섰다. 지호는 이원의 뒤를 따라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블랙마켓.

    다른 나라에서는 건물을 빌린다지만 주이원이 불법적인 요소를 쥐잡듯 때려잡는 한국에선 불가능했다. 때문에 한국의 블랙마켓은 개방형 던전을 이용해 이틀에서 사흘, 짧게 열리고 자리를 파했다. 던전이 리셋되며 증거도 사라지니 꽤 좋은 아이디어이긴 했다.

    매번 급조로 열리는 비밀스러운 마켓은 지호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크고 깔끔했다.

    좌판을 설치할 시간이 분명 촉박했을 텐데도 다들 요령 좋게 건물에 가까운 구색을 만들어 두었다.

    규모가 작은 게 이 정도라니. 그러면 해외에서는 얼마나 활발하게 열린단 말인가?

    이걸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법적인 행위에 열을 올리는 무리를 보며 지호는 한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응. 하지만 진짜 불법적인 건 좀 더 숨겨져 있을걸. 이런 데서 열리지도 않고.”

    “흠.”

    이곳에 찾아오는 것도 충분히 비밀스러웠는데 더 숨겨진 게 있다니. 분명 보통 위법적인 행위가 아닐 것이다. 나중에 한 번쯤 급습해서 털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나중에 털러 갈래?”

    이원의 말에 지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는 이래서 좋다.

    “당장 들어와서는 뭔가 알 수 있는 게 없네. 일단 좀 돌아다녀 보자.”

    “응.”

    가볍게 답한 지호는 자신을 따라오는 이원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건 나눠서 찾아야지.”

    “하지만 자기야.”

    “넌 내가 위험해져도 금방 옆으로 와 줄 수 있잖아. 그렇지?”

    “……자기, 너무 날 다루는 방법을 잘 익힌 거 아냐?”

    지호는 픽 웃으며 이원의 등을 내리쳤다. 이원은 멀리 가진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 지호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지호 역시 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지호는 이원이 있는 쪽을 두어 번 힐끔거리다가 너무 멀어지지 않게끔 그의 마력을 주시하며 천천히 돌아다녔다.

    지호는 상품을 보는 척 주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간간히 나오는 정보는 가짜 신지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꽤 유용했다. 뜬소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쯤 귀담아 들을 만했다.

    예전에 도심에서 날뛴 조승택을 봤다는 이야기는 한 번쯤 검토해 볼 가치가 있었고, 도시 전설처럼 여겨지던 균열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소문이 헌터 사이에서 제법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몇몇 헌터는 미르 길드의 실체를 어느 정도 눈치챈 듯 보였다. 특히 조승택과 김태용이 싸운 이후, 김태용의 부상이며 행적 때문에 제법 신빙성 있게 용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마냥 유용한 소문이라기엔 불온한 내용이 뒤따랐다.

    균열에서 나온 인간형 생물체를 잡으면 어차피 인권도 없는 몬스터니 실험체로 팔아치울 수 있다는 이야기나, 인외 종족을 발견해 비싼 값에 팔아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았지만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지호는 들은 소문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지호는 블랙마켓의 물건을 실컷 구경했다.

    인가를 받지 않고 판매하는 아이템답게 수상쩍은 물건이 많았다.

    복용자를 단번에 강화해 준다는 포션이나(설명하진 않았지만 시스템창으로 확인한 결과 중독 부작용이 있었다), 상대를 단번에 마비시키는 약이나(잘못 사용하면 사용자 또한 중독됐다), 엄청난 강도를 가진 검(대신 마력 소모가 엄청났다) 따위가 마구잡이로 팔렸다.

    대부분이 그런 쓸모없는 아이템이지만 가끔은 꽤 괜찮은 것도 존재했다.

    단번에 스테이터스를 늘려 주는 대신 소소한 부작용이 있는 포션은 꽤 좋은 것 같다. 조금이라도 강해진다면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으니까.

    지갑을 열어 사는 건 쉽겠지만… 역시 이런 불법적인 마켓에서 거래하고 싶진 않았다. 눈이 가지 않도록 지호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다.

    강렬한 충동 때문에 지호는 이미 결정했는데도 완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꾸만 번뇌했다.

    블랙마켓에도 전반적으로 요즘 사태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 안전하지 않다고 여기니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모으고 제 안위를 확보하려 드는 것이다.

    지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관리자로서 제대로 역할을 해냈더라면 다들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심각하게 서 있는 지호에게 이원이 다가왔다. 그리고 은밀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 이런 게 취향이야?”

    “이런 거라니?”

    이원은 대답 대신 가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흥분제 비슷한 포션이 놓여 있었다. 지호가 정색하며 자리를 피하자 이원이 웃으며 뒤따라왔다.

    “수확은 좀 있었어?”

    “그냥 좀 이것저것……. 가짜는 자정 무렵에 나타난다던데.”

    “음, 나도 그렇게 들었어. 확실하겠지.”

    두 사람이 가짜 신지호에 관해 얻은 정보는 간단했다.

    가짜 신지호는 보통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에 블랙마켓의 입구 쪽에서 나타난다는 것.

    블랙마켓에 드나드는 사람도 가짜 신지호의 정확한 정체나 목적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직접 확인해야 알 수 있겠지.

    두 사람은 얌전히 입구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소문이 제법 퍼졌는지 가짜 신지호를 기다리는 건 제법 사람이 모여들었다.

    지호는 긴장한 채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로 자정이 되자 한 사람이 블랙마켓의 안으로 들어왔다.

    호리호리하게 늘씬한 체형과 후드 아래로 보이는 섬세한 턱선.

    언뜻 보면 확실히 지호를 닮긴 했다. 하지만 눈으로 자세히 뜯어보기 전에, 상대를 보는 순간 지호는 알 수 있었다.

    저게 그 가짜라는 것을.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저건 단순히 모습만을 흉내를 낸 가짜가 아니다.

    본인의 고유성을 훼손당한 본질적인 불쾌함이 치밀었다.

    지호가 가짜를 보며 불쾌해하던 순간, 가짜 역시 무언가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가짜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단번에 신지호를 찾아냈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가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무척 분노하며 가짜는 신지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짜가 지호에게 닿기 전…….

    쾅!

    이원이 가볍게 발을 굴렸다. 하지만 그 가벼운 동작에 비해 너무도 거창한 폭발음이 터졌다. 결과 역시 대수롭지 않은 행동과 달리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바닥에서 아름드리나무만큼 거대한 돌이 뾰족하게 솟아 나와 지호와 가짜의 사이를 갈랐다. 가짜의 몸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가짜는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제 공격을 피한 가짜를 보는 주이원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휘청거리는 가짜를 향해 주이원은 곧장 움직였다. 당연히 이원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망칠 새도 없이 가짜는 이원에게 붙잡혔다.

    “감히 누굴 사칭해?”

    고저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이원의 차디찬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원은 가짜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퍼억.

    가짜 신지호의 이마가 깨지고, 피가 줄줄 흘렀다. 지켜보던 지호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서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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