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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수호자(2) (132/283)

16. 수호자(2)

지호는 다소 꼴 보기 싫은 광경을 마주하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지호의 앞에서 얼쩡거리는 임승주의 입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허소리가 [수호자의 보주]를 사용하기로 수락한 이후, 지호는 지금 처한 상황을 길드원들에게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평범한 던전은 지호가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세테르라든가 지구의 기존 이능력자들을 수월히 상대하려면 길드의 힘을 더 키워야 하니까.

당연히 다음에 설명할 사람은 부길드장인 임승주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라는 사족을 붙여 시작된 설명을 임승주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안 좋아졌다.

사실,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임승주가 아닌 허소리에게 보주를 넘겼으니까.

하지만 임승주가 지적한 포인트는 달랐다.

“왜 부길드장인 제가 아니라 허소리 헌터한테 먼저 설명해 주신 겁니까? 아니, 애초에 미르 길드와 움직이기 전에 설명해 주셨어야지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이지만, 다행히도 그리 긴장되지는 않는 까닭은…….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삐졌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화가 난 건 아니다. 그냥 삐진 거다. 물론 삐졌다고 해서 아무 문제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시위하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돌아다닐 뿐. 게다가 다음번 던전에는 허소리와 둘만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삐졌다.

그건 정말이지, 쪼잔하고 하찮은 꼴이었다. 화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성가시기는 했다.

결국 지호는 노골적인 당근을 흔들기로 마음먹었다. 임승주를 앉혀 놓고 직접 차를 타 주면서, 최대한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임승주 헌터는 제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동안 길드를 지켜 줘야 하니까, 그래서 늦게 말한 거예요. 그동안 제가 다른 일에 맘 놓고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도 임승주 헌터가 자리를 지켜 줬기 때문이고요.”

“…….”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예 말도 안 했는걸요. 딱 두 사람에게만 말한 건데요. 임승주 헌터는 이제 제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임승주는 단순하다. 싫어할 때도 단순했고, 좋아할 때도 단순했다.

보통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지호가 웃어 주기만 해도 간단한 문제는 곧장 해결됐다. 예전에 무시당하던 때도 지호가 눈앞에서 웃으면 싫어하지 않는 척이라도 했으니까. 역시 웃는 밝은 인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양호진의 정체에 관해서는… 웃어 주는 정도로는 풀리지 않을 만큼, 조금 더 진심으로 분개했다.

“결국 이 자식, 스파이가 맞았잖습니까!”

임승주는 소파 건너편에 앉은 양호진을 손가락질했다. 혼자 설명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어서 양호진을 앉혔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 험악한 분위기의 임승주를 보며 양호진은 느긋한 태도로 샐쭉 웃었다. 그간 덜덜 떨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에 임승주도 순간 놀랐는지 움찔했다.

“그래서 이제 말하잖니? 알았으면 됐지.”

“그나저나 말투는 왜 그런 식이지? 소름 끼치는군.”

정말로 싫은지 임승주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자 호진은 손에 턱을 괸 채 승주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아, 평소에 그대가 좀 귀엽다고 생각했거든. 밝히면 펄쩍 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러니까 꽤 귀엽구나.”

낮게 속삭이는 말에는 이상하게 속이 간질간질하는 묘한 어감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승주는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후다닥 호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더니 지호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거 사기꾼 아닙니까. 확실한 겁니까? 그… 구미호인지 뭔지인 거.”

“확실하지, 그럼.”

대답은 지호가 아닌 호진에게서 돌아왔다. 이전의 양호진이라면 제대로 듣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양호진은 S급이니 당연히 들릴 수밖에 없었다.

“볼래?”

“뭘…….”

보냐고 말하기도 전에 양호진의 귀에서 여우를 꼭 닮은 귀가 툭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양호진의 머리가 길게 자라나고, 풍성한 아홉 가닥의 꼬리가 나왔다.

임승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커졌다.

“무, 뭐…….”

“봐, 진짜 구미호잖니. 가짜 아니야.”

“화, 환각…….”

“만져 볼래?”

풍성하고 결이 좋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임승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지호는 사양 하지 않고 다가갔다.

귀는 그렇다 치고 꼬리는 대체 어떤 구조로 옷 위쪽으로 나온 건가, 싶어서 슬쩍 뒤를 보니 양호진이 씩 웃으며 보여 준다. 바지에 원래 구멍 따위는 없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뚫린 게… 뭔가 스킬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지호는 천천히 호진의 꼬리에 손을 올렸다. 몹시 보드라운 털결에 홀려 결대로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이 꼬리,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전에 들고 있던 인형 이 털로 만든 거예요?”

“맞아. 그대, 눈썰미가 좋구나? 원래 긴장되면 꼬리를 만지는 버릇이 있거든. 대용으로 인형을 쓰다듬는 거지.”

“애도 아니고…….”

옆에서 임승주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양호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럼 이제 인형 대신 우리 부길드장님을 쓰다듬어도 될까?”

“꺼져!”

임승주가 소름끼친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아옹다옹하는 꼴이 참… 길드 꼴 잘 돌아간다. 지호는 호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놀리다니, 친목 도모란다.”

누가 봐도 놀리고 있는데……. 어쨌든 임승주도 질색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싫은 건 아닌 듯하니 다행이다.

원래 공통된 비밀을 품고 있으면 사이가 좋아지는 법.

지호는 만족스럽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며칠 후, 헌터 전용의 청람 병원의 한 병실 안.

보주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허소리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잔뜩 긴장해 있었다.

혹시 모르니 병실에 데려다 둔 게 소리의 긴장을 키운 것 같지만 허소리를 위함이었다.

듣자 하니 보주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며, 적어도 이틀에서 길면 나흘까지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진다고 하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몸이 찢어지고 으깨지듯 아프다던데, 그래도 죽진 않으니까.”

보주의 정보 제공자로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다며 찾아온 주이원은 전혀 도움 안 되는 소리만 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지호가 이원의 팔을 찰싹 때리자, 이원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부작용은 없어. 그냥 눈 뜨고 일어나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는 거야. 남들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힘을 한 번에 얻는 거지.”

“그런가요…….”

“그러니 고통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지. 안 그래?”

너무 심술궂게 말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허소리는 생각보다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긴장되는지 침을 꿀꺽 삼킨다. 주이원을 바라보는 소리의 시선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외모만이라면 꽤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경계하는 느낌?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세테르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결국 그녀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원이 이플리스라는 세계의 관리자이며, 이곳을 고향처럼 여겨서 돌아왔다고.

듣자마자 허소리는 ‘그냥 길드장님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고요?’라며 거짓말한 보람도 없이 진실을 찌르긴 했지만.

어쨌든 주이원이 워낙 강한 이유가 설명되니, 허소리는 주이원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하는 말의 신빙성을 높게 쳐 주고 있었다.

지호는 보주를 쥔 허소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무서우면 안 써도 돼요. 절대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쓸 거예요.”

지호가 뺏기라도 할 것처럼 소리는 보주를 품에 고이 품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나 쓰자니 무섭고 남 주자니 아까워요.”

“그럴 수도 있죠.”

공감하는 척 말했지만 사실 지호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흔히들 하는 생각 아니겠는가. 그녀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된다.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 같으니 역시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안 쓰고 있으면 남 갖다 줄 거야.”

“쓸게요. 쓴다고요.”

지호와 달리 자비 없는 이원의 재촉에 소리는 보주를 꽉 쥐고 곧장 사용했다. 반쯤 울컥해서 써 버린 것 같지만,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보주는 고체에서 액체처럼 변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통의 액체와는 달리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허소리의 몸을 타고 흐르며 서서히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소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신음했다.

“으…….”

“괜찮아요?”

“조금 아픈데, 버틸 만해요.”

“이제 곧 진짜로 시작될걸.”

옆에서 주이원이 얄밉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흘겨보는 순간, 소리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허소리 헌터.”

“헉, 으윽, 큭…….”

지나치게 고통스러워서 지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소리는 애꿎은 이불만 쥐어뜯었다. 강한 악력에 헌터용으로 만들어 둔 이불조차 반으로 찢겨 나간다. 또한 허소리의 이마에서부터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고통스러운 허소리를 본 지호의 몸이 얼어붙었다.

“문제없어, 괜찮아.”

“…….”

“잠깐 나가 있을래?”

지레 겁을 먹은 지호를 이원이 달랬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고통받는 건 싫다. 게다가 병상 위에서 아픈 사람을 보는 것은 예전의 자신이 생각나서 더더욱.

하지만 무섭다고 허소리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에게 보주를 권한 건 자신이니까.

긴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긴장된 분위기의 방 안에는 허소리의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들릴 뿐. 지호는 소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이원은 그런 지호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이원의 시선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잔뜩 집중한 지호를 보며, 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라 이원을 제 몸 깎아 도와준 것이었지만, 걱정하는 저 시선을 자신만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욕심인 걸까.

셋 다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착실히 시간이 흘러갔다. 허소리의 핏발 선 눈을 보며 지호는 의료진을 불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기 전에, 드디어 허소리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강한 마력이 허소리의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희미한 바람마저 불어오는 병실 안에서 허소리의 신체가 변이하기 시작했다.

뼈와 근육이 소리를 내며 조금씩 가다듬어진다. 최적의 공격이 가능하도록, 더 완벽한 균형을 맞춰 가며.

또한 머리는 끝부터 새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백발로 변했던 머리칼은 바람이 천천히 잦아들며 희미하게 붉은 빛을 띤다. 그러다가 바람이 완전히 멎었을 때는 옅은 분홍빛으로 변해 버렸다.

“헉…….”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은 소리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툭 쓰러졌다. 지호가 소리를 부축하려는데 그보다 앞서 이원이 소리의 몸을 받았다.

“괜찮아. 그냥 잠든 거야.”

놀란 지호를 이원이 안심시켰다. 지호는 직접 소리의 맥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지호는 창백하게 질린 허소리의 땀을 닦아 주려다 이원에게 제지당하고는, 대신 땀을 닦아 주는 이원을 무시한 채 소리의 시스템창을 살폈다.

status

이름허소리
직업노네임의 길드원
등급S
칭호수호자, 로또 맞은 헌터
체력1068
마력843
근력1026
민첩1074
스킬수호자의 자질(SS), 첫 번째 수호자(S), 자긍심(A), 백곡왕의 긍지(A), 짙푸른 일격(A), 더 빠르게, 더 날렵하게(A)

모든 스킬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경험치에 쌓임에 따라 새로운 스킬이 오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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