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억(5)
지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지호가 모르는 이원의 1300년 세월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미 벌어진 일, 괜히 이원의 탓을 하기보단 대신 지호는 다른 쪽을 따져 보기로 했다.
“그런데 넌 여기로 차원 이동할 때 엄청 어렵게 왔다며. 다른 사람들은 쉽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야?”
“음, 그게 말이지…….”
이원의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걸렸다. 저 얼굴을 하고 나오는 말이 죄다 폭탄이라 몹시 불길했다. 가느스름해진 지호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원이 괜히 하하, 웃고는 설명했다.
“내가 연구한 건 특정 대상을 좌표로 지정해 이동하는 마법이었거든? 아무래도 연구 기록이 그쪽에 남아 있는 데다, 이플리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든 잘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좌표가 되어서……. 하하.”
그러니까 즉, 이플리스에서 차원 이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이원이 반짝이는 등대가 되어 주고 있다는 뜻 아닌가.
“너 때문이었냐!?”
“미안해, 자기야.”
이원이 잘못한 건 아는지 냅다 달라붙어 지호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지금 이렇게 가까이 붙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게다가 아래에서 위로 보는 이 각도, 지금은 심하게 낯부끄러워서…….
게다가 이건 대놓고 무마하려는 행동 아닌가. 지호는 질색하며 이원의 뺨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귀여운 척하지 마.”
“귀여워 보인다니 잘됐네.”
이원이 더없이 당당하게 말하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주이원의 귀에는 이상한 스킬이 걸려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말이든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해 주는 스킬 같은 거.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도 말을 꽤 능수능란하게 하긴 했지만, 이렇게 번번이 휘말린 적은 없는데. 생각해 보면 헌터가 된 이후로는 말싸움에서 제대로 이겨 본 기억이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 1300년 동안 능구렁이로 진화한 모양이다.
자꾸 이런 식으로 어필해 대는 이원에게 휘말려서는 곤란하다. 조금 전… 같은 일이 또 있다면 정말 낯부끄러워서 이원에게서 도망다녀야 할 테니까.
“아니……. 안 귀여우니까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지호가 강경하게 말하자 이원은 대놓고 시무룩하게 실망한 티를 냈다.
“자기, 예전에 이원이 많이 귀여워해 줬는데.”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가 소름 끼친다. 지호는 정말로 소름이 돋아난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아무리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지만 자신의 성격을 돌아볼 때, 저런 짓을 다 받아 주며 귀여워했을 리가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정말인데.”
“전 재산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물론. 맹세할게.”
확고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주이원을 보니 조금 흔들린다.
정말… 자신이 그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했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주이원의 눈빛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를 두 가지가 격하게 충돌하는 가운데, 혼란스럽던 지호의 입이 열리며 아무 말이나 툭 뱉어냈다.
“나 걸고도?”
말을 내뱉자마자 지호는 빠르게 후회했다. 저를 귀여워해 달라는 이원만큼이나 당당하고 뻔뻔하지 않은가.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잠시 눈이 동그랗게 커졌던 이원이 이내 눈을 접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아, 그건 못 걸지……. 미안, 자기는 안 그랬었어. 그때도 자기는 넘 도도해서 내가 계속 귀여워해 달라고 조르긴 했지.”
하는 말이 여전히 소름 끼치긴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차마 신지호는 걸지 못하겠다는 단순한 말이 이전의 절절한 고백만큼이나 다정해서 마음에 박혔다. 지호는 이원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있는 힘껏 딴청을 했다.
“됐고, 아까 걸었던 전 재산 내놔라.”
“음, 알았어. 재산이 좀 많아서… 절차가 까다롭겠지만…….”
“됐거든?”
“숨겨 둔 재산은 몰래 줘도 되겠지? 그쪽부터 줄게.”
“너 그런 것도 있냐?”
“궁금하면 받아서 확인해 봐.”
“아니, 됐다니까!?”
“하하.”
이원은 정색하는 지호를 보며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이원은 지호를 제품에 넣고 꽉 끌어안았다. 조금 숨이 막혔지만, 위에서 들려오는 안도와 비슷한 한숨에 지호는 얌전히 이원에게 몸을 기댔다.
“지호야, 정말 보고 싶었어.”
정말, 정말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안타까워서 지호는 손을 뻗어 이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제 봤으니 됐잖아. 더 헤어질 일도 없을 거고.”
“응. 그렇지…….”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이원은 지호를 언제 놓칠지 모르겠다는 듯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원만큼이나 다정하고 절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는 지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원에게 얌전히 몸을 맡긴 채 그를 아이처럼 도닥여주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던 이원이 지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자기야, 있잖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을 듣던 지호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 * *
몇 시간 뒤.
지호는 이원과 함께 있던 호텔이 아닌 길드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의 회동을 아는 양호진은 쓸 만한 정보를 들으러 왔다가, 얼결에 지호에게 사정과 함께 분풀이를 들어 주는 신세가 됐다.
“아니, 그 새끼가요!”
욕으로 시작되는 지호의 분풀이를 처음에는 다소 어처구니없단 듯 들어 주던 양호진도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절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지호의 분에 찬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호진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화날 만하구나.”
“그렇죠?”
“그대가 이 길드를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데……. 그걸 버리고 청람 산하로 들어오라니, 화나는 게 당연하지.”
“진짜!”
지호는 씩씩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이원의 제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정 알았으니까 이제 노네임은 정리하고 우리 길드로 들어오자. 내 영역 안에 있어야 더 완벽하게 지켜 줄 수 있으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제안하는 이원을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제 제안이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듯 씩 미소 짓는 그 얼굴이라니. 다시 떠올리자 지호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진짜 짜증 나는 건, 그 새끼 악의 없이 말했단 거예요!”
개소리하지 말라고 한 대 걷어차 버리고 그대로 뛰쳐나왔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 몇 대는 더 때려 줬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주이원 저 새끼는 아직 지호가 B급 헌터이던 시절, 헌터는 그만두라며 강압적으로 명령하던 시절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시선으로 지호를 바라보고 있다는 소리다.
“아니, 자기 입장에서 내가 아직 약해 보이는 건 이해하는데… 저도 열심히 노력했잖아요? 그걸 다 지켜봐 놓고, 자기 산하로 들어오라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원과의 사이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음은 이미 인정했고, 그가 이플리스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왔음을 알고 나서는 따라갈 수 없겠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소리까지 들은 이상 순순히 이원을 제 머리 위에 둘 생각은 없었다. 특히, 이원이 원하는 대로 청람 산하로 들어가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편하게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개인으로 보면 지호가 이원의 무력을 뛰어넘기란 요원할지도 모르지만, 관리자이자 하나의 헌터로서, 또한 길드장으로서는 가능할 테니까.
‘지가 다른 세계의 관리자면, 뭐 어쩌라고? 여긴 내 구역이다 이거야.’
관리자라는 게 확 와닿지 않았는데 이원도 똑같이 관리자라고 하니 제 자리처럼 느껴진다.
원래도 의무감은 있었지만 남의 감투를 쓴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제대로 제 것처럼 휘두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지호가 분개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호진이 빙그레 웃었다.
“흐음… 주이원은 그쪽 세계에서 왕이었다고 했지?”
“네.”
“하는 짓이 꽤 건방진 꼴을 많이 봤는데 왕이었다고 하니까 이해가 되는구나. 천 년 넘게 남을 부리는 게 익숙해졌으면 그럴 만도 하지. 그 성격 절대 안 고쳐질걸. 똑같이 천 년쯤 살아 본 내가 보증할게.”
“…….”
분명 호진은 지금 지호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주이원은 까도 내가 까지, 남이 까면 안 된다는 느낌.
불쾌한 기색을 눈치챈 호진이 웃었다. 그에게는 이 상황이 퍽 즐거워 보인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호진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지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딘지 묘한 눈빛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희, 이제 사귀기로 한 거니?”
“아뇨?”
예상 범위 내의 질문이라 지호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물론 사귀지 않는다… 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짓을 많이 해 버렸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이원도 ‘확실히 나를 좋아하는 순간이 오면 말해 줘. 어중간한 상태에서 네가 어쩔 줄 모르는 것보단 확실한 게 좋으니까.’라고 했기에 부담 없이 미뤄둘 수 있었다.
제법 태연하게 받아치는 지호를 보는 호진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지호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을 무시한 채 괜히 찬물을 들이켰다.
“흐음……. 뭔가 느낌이 달라지긴 달라졌는데. 그럼 배라도 맞춰 본 건가?”
켁, 그대로 지호는 물을 뿜어냈다. 호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티슈를 뽑아 지호에게 건넸다. 지호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호진에게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응, 그래 보이네. 거기까진 아니라도 뭘 하긴 했어?”
“…….”
잔기침을 하며 지호는 새빨개진 얼굴을 마저 닦고 호진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서, 성희롱이에요.”
“그렇지. 하지만 몸정이란 걸 무시하지 못하니까 물어봤어.”
몸정이라니, 너무 노골적인 단어 아닌가.
하긴, 이 인간, [방중술]인지 뭔지 하는 스킬이 있었지……. 그건 좀,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스킬 아닌가? 게다가 스킬 등급도 높지만 레벨도 높았던 것 같은데, 그건…….
지호는 괜히 쓸데없이 떠오르는 망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양호진은 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말렴, 아무 때나 몸을 들이대지는 않아.”
“네, 그러시겠죠…….”
“네가 주이원과 엮여 있지 않았다면 분명 몸으로 꼬셨겠지만.”
“…….”
“그대는 꽤 내 취향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물을 안 마셔서 다행이다. 있는 걸 모두 뿜는 걸로도 모자라 컵도 떨어트렸을지도 모르겠으니까.
오싹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양호진의 얼굴과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으로 느껴져서 더 무서웠다.
이래서 여우에게 홀린다고 하는 거구나……. 지호는 깨달음을 얻으며 호진에게서 슬쩍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