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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억(4) (129/283)
  • 15. 기억(4)

    지호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원과의 접촉은 흔한 일이었고, 거기서 조금 더 닿는 면적이 생소하게 넓어졌을 뿐인데… 느껴지는 건 완전히 달랐다.

    밀어내야 한다, 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왜? 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기분, 좋은데.

    하지만 이런 건 아무하고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물론 이원은 ‘아무나’가 아니었다. 이원은… 지호의 기억 속에서 일단 그의 연인이었으니. 비록 지호는 상대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란 것도 미묘했다. 지호도 자신이 평범한 친구보다 이원을 훨씬 더 좋아한단 건 깨닫고 있었다. 과한 질투라거나 독점욕 따위도 친구 사이라기엔 과하다.

    하지만 사랑하느냐, 물으면 뭔가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생각이 어려워져서…….

    이건 정말 지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뭔가 제동을 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다른 차원의 관리자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도와줬다고 해도 경계하라고.

    하지만 수많은 방해에도 역시… 이원이 이러는 게 마냥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몸 안쪽부터 간질간질한 기분 좋은 감각과 함께 불안과 혼란이 뒤따랐다.

    지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원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한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잔뜩 긴장했으나 이원이 쓰다듬는 곳은 허리였다.

    고작 허리. 그런데도 순간 이상한 기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달리는 바람에 지호는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지호의 반응을 본 이원은 낮게 웃으며 몸을 숙인 채 지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긴 여전히 예민하네…….”

    “읏…….”

    결국 참지 못하고 이상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달라진 게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원은 지호의 귓바퀴 안쪽을 슬쩍 핥았다. 지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마저 멈추고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자기야.”

    “주, 이원…….”

    “아, 이름 불러 주는 거 기분 좋은데. 계속 불러 줄래?”

    “…….”

    하지만 지호는 차마 이원의 이름을 불러줄 수가 없었다.

    이원의 얼굴은 평소 보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얼굴색이며 표정은 그리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 눈빛이… 이상하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빛이 지호의 내면까지 샅샅이 훑고 있는 것 같아서.

    게다가… 조금 전부터 허리 아래로 닿아오는 이원의 신체가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지호가 제 말을 들어주긴커녕 고개만 홱 돌리는데도 이원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었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뱃속이 저릿저릿했다.

    “아, 자기 귀여워…….”

    “누, 누가 귀여워?”

    “이걸 발라먹고 싶은데 못 발라먹고 1300년을 기다렸다니.”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지는 이원의 목소리에 지호는 덜컥 불안해졌다. 이원은 뻣뻣하게 굳은 지호의 목덜미를 느릿하고 길게 핥아 올렸다. 움찔거리는 지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우리 자기… 가뜩이나 기억도 다 없는데, 그동안 내 취향이 좀 과격해진 것 같아서…….”

    “뭐, 뭘 하고 산 거야?”

    지호가 반사적으로 의혹의 눈길을 보내자 이원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거든? 그래, 아무것도 안 하고 사니까… 사람이 미치는 거지. 한 번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내가 몇 번을 발라 먹었는데……. 그걸 한 번도 못 하게 되다니, 세테르 개새끼.”

    그 새끼는 곱게 죽이지 않을 거라며 이원이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원은 지호에게 찰싹 밀착되어 있던 몸을 떼어냈다.

    “안 그래도 처음 할 때는 엄청나게 긴장하고 겁먹었는데…….”

    “겁 안 먹었어…….”

    자존심이 상해 부정은 했지만, 이원이 말하는 일 따위 지호의 기억에는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다 돌아온 건 아니니까. 지호의 표정을 읽은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결국 또 첫 경험인데, 이 상태에서 몰아붙였다가… 지호한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안 되잖아.”

    “아니, 근데 내가 언제 한댔어?”

    “그러니까 이번엔 참을게.”

    이원은 남의 말을 무시한 채 멋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기가 막힌 지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불쑥 아래로 내려갔다.

    “대신 자기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아, 아니.”

    뭔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무조건 반대하고 봤지만, 이원은 씩 웃으며 지호가 경악할 만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자기 몸은 좋아할 것 같은데. 믿어 봐, 내가 경력은 짧지만 망상은 1000년 넘게 했거든? 이미지 트레이닝 하나는 확실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필요 없어!”

    하지만 이원은 지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지호는 결국 이원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지호는 완전히 지친 채 소파 위에 늘어졌다.

    일부만 흐트러졌던 옷차림이야 살짝 정돈하는 것만으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새빨개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호가 에어컨 바람에 의지한 채 열을 식히는 사이, 지호가 떠밀어서 양치질한 이원이 돌아왔다.

    이원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키 차이 때문에 평소 올려다보는 일이 잦았던 상대가 지호를 올려다볼 때가 생각나서, 지호의 얼굴은 다시 화끈거렸다.

    다행히도 이원은 지호를 더 놀리는 대신 생수를 가져다주며 배고프진 않냐며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호는 안도하며 고개를 저었다.

    “배는 안 고파.”

    “잘 먹어야지. 룸서비스라도 시킬까?”

    “진짜 안 고파.”

    “그럼 조금 이야기나 하다가 밥 먹으러 가자.”

    아무렇지 않은 이원의 태도에 지호는 조금 싱숭생숭해졌지만, 이내 익숙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보나, 마주할 때마다 고민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으니까.

    일할 때의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온 이원이 소파 맞은편에 앉아 말을 골랐다.

    “크사냑의 말대로 네게 진작 털어 놨어야 했나…….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그간 좀 수상쩍어 보였으리란 건 잘 알거든.”

    “아는 놈이 그랬어?”

    “미안.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 무서워서 그랬어.”

    “…….”

    저렇게 솔직하게 사과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지호는 과거의 섭섭한 일을 털어놓는 대신 이원을 재촉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걸 말해 봐.”

    “음, 내가 대던전을 공략했잖아.”

    “그렇지.”

    시스템창으로 봐서 실감은 안 나지만, 비율로 볼 때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업적임은 알 수 있었던 대던전 공략.

    이원은 난감하다는 듯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것 때문에 이 세계를 주목하는 신이 꽤 많아.”

    “……신이라는 건 시스템을 열면 계약할 수 있는 그거 말하는 거지?”

    “응, 맞아.”

    “왜 관심을 두는 건데?”

    신이라는 존재라고 하면 막연히 먼 존재로 느껴지는데. 시스템을 레벨 3까지 개방하면 그들이 직접 계약해 각성자에게 힘을 나눠준다는 것부터 지호에게는 상당히 의문이었다.

    대체 뭐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지간히 한가한 신들의 유희? 하지만 고작 누군가의 유희를 위해, 균열에서 인류를 생존시키는 게 목적인 듯한 시스템이 대량의 포인트를 소모해 가며 지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지호의 오랜 의문에 이원은 명쾌한 답을 내려주었다.

    “신은 원래 균열이 열린 세계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그 신이란 존재는… 원래 한 세계의 관리자였던 자들이니까.”

    “관리자, 라고?”

    지호는 믿기지 않는 말에 눈만 깜박였다.

    “맞아. 어떤 식으로든 수명이 다한 관리자는 신이 되거나, 또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되는 거지.”

    “그럼, 그렇다는 건…….”

    “아마 나도 죽으면 신이 되겠지? 너도 마찬가지고. 특히 너는 첫 번째 관리자인데다가 이 세계는 불가능한 업적까지 여럿 달성했으니, 아주 강한 신이 될 수 있을걸.”

    “…….”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 조금도 실감이 가질 않는다. 이원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은 각성자와 계약해 힘을 빌려줄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의 각성자는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까 최대한 여러 세계의 각성자를 도와주는 거야. 자신이 도와준 각성자가 활약해서 그 세계의 관리자가 신이 되면, 자신의 세계의 각성자와 계약을 맺어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품앗이… 같은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이 세계는 주목받고 있는데…….”

    “그럼 좋은 거 아냐?”

    “문제는 신이라고 다 좋은 놈들은 아니라는 거지. 좋은 놈이었어도 맛이 가는 경우도 있고.”

    심각한 이원의 얼굴을 보며 지호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러운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자기 세계가 멸망한 신이라든가?”

    “맞아.”

    이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관리자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몹시 아끼는 존재거든. 물론 자신의 세계가 멸망한 후에도 다른 세계를 돌보는 경우가 있지만, 일부는 원래 세계에서의 애정을… 다른 세계를 향한 증오로 돌리기도 하지.”

    “그런 신들이 써먹을 각성자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맞아.”

    단순히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다면 공공의 이득 따위 어찌 되어도 좋다는 듯 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세상에 좋은 헌터만 있으면 좋을 텐데.

    물론 지호는 그런 나쁜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럴 때면 가끔,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음, 이플리스의 각성자와 계약해서 종종 이쪽으로 보내는 것 같더라고. 전에 노네임 길드 이전하기 전에 길드 건물에서 널 습격했던 그놈처럼 말이야.”

    “……그게 이플리스에서 온, 사람, 이었어?”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지호는 예전에 노네임 길드에서 자신을 노렸던 정체불명의 몬스터에 대해 떠올렸다. 그자가 자신을 정확히 노렸던 게 신의 꿍꿍이였다니.

    “아니, 그럼 이플리스의 그 사람은 왜 여기까지 와서 나를 노린 건데?”

    “그게 말이지… 음, 내가 원한을 좀 사서 그런가? 하하.”

    “…….”

    진짜 왕으로 지내면서 뭘 하고 산 거지,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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