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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억(2) (127/283)
  • 15. 기억(2)

    크사냑이 주이원을 처음 만난 건 왕을 피해 도망자의 생활을 하던 때였다.

    원래 크사냑은 부유하고 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이 미친 짓을 시작했을 때, 반대하던 크사냑의 부모가 가장 먼저 살해당하며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왕은 크사냑까지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목을 노릴 수 있다는 듯이 감시하던 왕의 아래에서 견딜 수 없었기에, 크사냑은 도망쳤다.

    당시의 크사냑은 500살이 갓 넘은, 렘 족으로서는 막 성년이 된 나이였다. 간신히 제 앞가림하고 살던 크사냑의 앞에 세테르가 나타났다.

    “부모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왕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자. 이플리스에서 가장 강한 종인 드래곤을 통솔하는 드래곤 로드, 한때 대규모의 반란을 진압해 아카르의 학살자로 불리던 세테르 오튜르벨.

    크사냑은 그가 뻗은 손을 홀린 듯이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험한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의욕에 불타는 크사냑에게 세테르가 떠넘긴 건…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였다.

    “저래 봬도 차기 왕이다. 억지로 데려왔으니 의욕이 없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쓸 만하게 만들어.”

    세테르는 당장 왕을 쓰러트릴 힘이 없는 어린애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크사냑으로서는 이원의 처지가 그저 불쌍하게 느껴졌다.

    주이원은 아주 희미하게나마 렘 족의 핏줄을 타고난 듯 했다. 순혈 렘 족은 거대한 바다 생물의 형태로 현현할 수 있으며, 이플리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강하게 타고난다.

    주이원은 모습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물을 다루는 힘이 뛰어났다. 그 때문에 불법적으로 능력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결과적으로 왕에게 끌려가 다른 세상으로 내쳐졌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세상에서 손상된 그릇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다 죽었겠지만, 주이원에게는 기연이 찾아왔다. 그는 그 세계에서 아직 각성하지 않은 관리자의 힘을 흡수해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플리스로 돌아온 이원에게 다른 세계의 관리자의 힘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주이원은 다른 세계의 마력을 아주 많이 지니고 있다. 덕분에 이원에게서는 이계의 몬스터들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 특유의 이질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쟤 싫어.”

    “나도 싫어.”

    “기분 나빠.”

    바다에 가득한 정령들은 본능적이고 솔직했기에 이원을 보면 노골적으로 쑥덕거리기 바빴다.

    어느 정도 지성이 있는 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피하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기분 나쁘다 여기며 이원을 꺼렸다.

    물론 이원도 이플리스의 주민이기에 함께 지내다 보면 위화감은 점점 옅어졌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들의 거부는 막 이 세계에 떨어져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던 이원이 마음의 벽을 쌓기엔 충분했다.

    “지호가 보고 싶어.”

    크사냑에게 마음을 연 후, 이원은 종종 그에게 신지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굳이 청자가 크사냑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지만 다른 이들은 들어주지 않았기에, 신지호에 관한 이야기는 오직 크사냑과 대화할 때만 등장했다.

    아니, 그것을 대화라고 부르기엔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이원은 자신이 기억하는 신지호를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복기하듯 기억을 늘어놓을 뿐이었으니까.

    한동안 기운 없던 이원은 어느 순간부터 수업에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이플리스를 위함이 아니라 신지호를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인 듯싶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원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시스템이 왕을 무찌르기 위하여, 첫 번째 관리자만큼이나 공을 들여 만들어 낸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원은 마법을 배운 지 고작 10년 만에 이원은 간단한 마법을 보면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만큼의 정교한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그조차 이원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왕이자 관리자인 이원에게 주어진 능력은 이플리스의 바다를 조종하는 것. 물을 조종하는 건 렘 족으로서 갖춘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고차원적인 능력이었다.

    이플리스의 바다는 마치 이원이 부모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그의 의지를 따랐다. 이플리스는 바다로 이루어진 별이기 때문에 이원의 능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플리스에 도착한 지 20년이 지났을 때, 주이원은 왕의 목을 자르고 새로운 왕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것으로 이원의 고난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진정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제는 선대 왕이 된 테네브는 미치기 직전까지 무척 완벽하고 동시에 교활한 자였다.

    테네브가 이 세계를 멸망시켜 던전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플리스의 주민들에게 테네브는 그저 오랜 세월 동안 완벽하게 별을 다스려온 성군이었다.

    그런 테네브의 목을 자르고 새로운 왕이 된 이원은 처음 마주친 순간 불길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존재일 뿐.

    다들 이원의 왕의 자질에 대해 반발했고, 이원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동안 애썼다.

    그리고…….

    “잠깐, 잠깐만요.”

    지호는 한창 이어지던 크사냑의 이야기를 끊었다. 꼭 물어봐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아무래도 영 궁금했다.

    “그, 반발하는 사람한테 증명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 한 건데요……?”

    “음, 예리하시군요.”

    일부러 그 부분은 생략했던 건지 크사냑이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근데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크사냑은 이플리스에서 주이원을 보살핀… 말하자면 부모 격의 존재였던 것 같은데. 실제로 크사냑이 이원을 설명할 때의 얼굴은 부모님이 형이나 누나, 자신에 대해 자랑할 때의 얼굴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크사냑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플리스에 계셨다면 비전하가 되셨을지도 모르는 분께 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크사냑은 입에서 물을 뿜는 지호를 보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마쳤다. 지호는 지저분해진 입가를 훔치며 새빨개진 얼굴로 부정했다.

    “아니, 뭐, 뭐가 비전하예요!? 누가 그런 걸 한다고…….”

    “어차피 이원 님께선 상대의 의사가 중요한 분은 아니신데…….”

    “…….”

    설마 주이원, 말을 안 들으면 목을 쳐 버리는 폭군? 뭐 그런 거였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가다 잔인하다 싶을 만큼 가차 없는 손속을 보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반란의 진압에는 피가 따릅니다. 불가피한 일입니다. 피 흘리지 않고 모두 진압하려는 이상론을 펼치다가는 이원 님의 목이 떨어졌을 겁니다.”

    혼란스러워하는 지호에게 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끊어졌던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루는 몽마였다. 몽마는 타인의 감정을 원료로 살아가는데, 몽마에게 감정을 섭취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꿈이었다.

    상대에게 꿈을 보여 주고 그에 반응하는 감정을 섭취한다.

    꿈속에서 공포와 같은 감정도 섭취할 수 있었지만, 악몽은 상대의 저항이 높기에 쉬운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흔히 몽마는 상대가 좋아할 만한 꿈의 자락을 보여주며 유혹한다. 먹잇감이 무의식중에 몽마의 꿈자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정신에 파고들어 꿈을 자아내면서 감정을 뽑아낸다.

    루는 꿈을 보여 주는 재능이 끔찍하게 없었고, 즐겁지도 않았다.

    그래서 루는 자신의 타고난 힘을 단련하지 않았다. 대신 헌터가 되어 검을 들고 사냥하며 몬스터들의 공포를 주식으로 삼았다.

    어느 날 그런 그녀를 주이원이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왕은 다른 세계에서 20여 년을 살다 온 존재다. 그 때문에 이플리스의 주민이라면 그 누구나 왕을 본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루 역시 왕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거부감은 오히려 루에게 황홀하게 느껴졌다.

    몽마로 태어나 검을 잡는 이단아인 그녀에게 왕은 존재 자체가 온몸으로 제 운명을 저항하는 이처럼 느껴졌으므로.

    루가 호기심을 가진 만큼 왕도 루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왕은 루를 기사단에 넣고 어디 한번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와 보라고 말했다. 성공한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면서.

    왕에게는 별생각 없는 제안이었겠지만 루는 왕의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루가 일반 기사단원에서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30년이 걸렸다. 왕은 루의 존재를 잊고 있던 듯 보였지만, 이내 기억해 냈다.

    소원을 묻는 왕에게 루는 평생 그를 섬기고 싶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루는 왕의 스승으로서 항상 곁을 지키는 크사냑과 나란히, 왕의 측근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녀와 왕의 사이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왕은 몇백 년이 지나도록 그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이 세계의 왕은 세습제가 아니기에 아이를 낳을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왕은 강한 각성자를 만들어 낼 겸 스스로의 유희를 위해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거나 누군가와 결혼했다.

    루가 왕의 첫 번째 연인이 되는 게 아니냐고 술렁거릴 무렵, 비슷한 이야기를 수천 번쯤 듣던 왕이 폭발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꼴 보기 싫어서라도 돌아가야겠어.”

    “……네?”

    “지구로 돌아갈 거야.”

    루로서는 모실 왕이 생기자마자 잃게 될 판국이었지만, 사실 왕의 귀환 결심이 크게 위험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차원을 넘는 마법은 지나치게 고난이도의 마법이다. 물론 그녀의 왕이라면 차원이동까지야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좌표의 지정이었다.

    세계는 수도 없이 많다. 한때 세계였다가 던전으로 변질된 세계도 차원이동의 대상이 된다.

    왕이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은 별 전체가 바다로 이루어진 이플리스에서 마른 땅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왕은 성실하고 집요했다. 이플리스의 공무를 처리하면서도 남는 시간은 모조리 연구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수백 년만에 왕은 드디어 지구로 향할 수 있는 마법식을 완성시켰다.

    “지호를 좌표로 잡는 거야.”

    왕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호’를 말할 때의 왕은 어릴 적처럼 생기가 넘쳐흘렀다.

    “지호는 분명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걸 신호로 해서 지구에 도착하는 거지.”

    왕은 이플리스 내에서 몇 번의 실험을 성공시켰고, 차원간의 이동에도 충분히 적용되리란 확신을 얻었다.

    머나먼 차원을 뛰어넘는 일은 왕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 몇 년이라는, 그동안의 기다림에 비하면 짧지만 하루하루 새다 보면 긴 시간을 보낸 끝에야 마법이 준비됐다.

    그리고 드디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왕의 꿈은 좌절됐다.

    주이원의 믿음과 달리, 신지호는 길 잃은 그를 인도해 줄 반짝이는 별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 년 넘게 신지호를 그리워하던 주이원과 달리, 신지호는 주이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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