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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플리스의(5) (125/283)

14. 이플리스의(5)

이원이 지호에게서 고개를 떼고 나서,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다지 부끄러워 보이지 않는 이원 쪽이었다.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은 거지?”

“음, 기억은 돌아온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뭘?”

“내가 널… 너를, 그러니까…….”

“좋아했던 거?”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을 이원은 너무도 쉽게 꺼냈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아 지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낯 뜨거운 이야기였다.

“넌 한 번 기억이 봉인당하기도 했고… 어쩌면 너와 연계된 시스템이 본능적인 방어기제를 세우고 있을 수도 있어. 나 때문에 마력을 뜯긴 것도 모자라서, 균열로 한창 경계해야 하는 시기에 다른 세계의 관리자가 접근하고 있잖아? 못 믿을 만하지.”

“난 널 믿는데…….”

“하지만 관리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야. 뭐, 어느 정도 힘을 키우면 암시에서 저항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내가 지호와 야한 짓을 할 정도로 애정이 돌아오는 건 힘들지.”

“무, 무슨 미친 소리야!?”

“자기야. 우리 첫날밤 기억나?”

“말 이상하게 하지 마…….”

“자기가 그날 헛소리 해서 내가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기억 안 나?”

“…….”

헛소리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니 이원이 말하는 게 언제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한국대 붙고 여행 갔던 일 말이지.”

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어렴풋이 돌아온 기억으로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 * *

스무 살이 되던 해의 겨울.

지호와 이원은 꽤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낮 동안에는 신나서 돌아다니고 숙소에 돌아온 이후, 둘 사이에서는 전에 없었던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은 지호와 달리 이원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신지호.”

“왜.”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대학도 붙었고, 성인도 됐고. 더 방해될 거 없잖아.”

“…….”

더는 미룰 말이 없었다. 난처한 얼굴의 지호를 보고 이원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뭐야, 왜 또 그러는데? 이만큼 기다려 줬으면 됐지.”

이원이 냉큼 지호의 허리를 붙들어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이 정도의 스킨십은 해 왔었는데 새삼스레 긴장되어 지호는 이원을 밀어냈다.

“아니, 잠깐만…….”

“안달나게 하는 점도 귀엽긴 한데, 나 죽으면 사리 나오겠어.”

“개소리 좀 그만해라, 진짜.”

“이번엔 또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지호는 가끔 생각 없어 보일 만큼 시원시원한 이원의 성격이 부러웠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생각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지호는 망설이고 눈치 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벼, 별로일까 봐…….”

“뭐?”

주이원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지만 지호는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이원이 지호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지호를 꺼렸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역전되어 이원이 지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게 됐지만, 한 번 뒤집혔다면 다시 뒤집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너무나도 큰 변혁이다. 스무 살이 되도록 거의 평생을 함께 지내 왔지만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변화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흐르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대로 쭉 친구로 지낸다면 무난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괜히 사귀었다가, 주이원이 후회하면 어떡하지?

지호는 정말로 이원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더 가까워지지 않는 쪽이 나으리라 여겨질 만큼.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지나치게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경험은 죄다 얕은 수준이었다. 지금까지는 친구였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애인이 되는 건 다르다.

기껏 사귀기 시작했는데 친구인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애인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가고, 너무 빠르게 한 사람에게 매여 버렸다고 아쉬워한다면…….

결국 친구 사이로도 돌아갈 수 없는 거 아닌가.

“차라리 너 다른 사람이랑 연애 좀 해 보고 오는 게 어때?”

지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제안했다.

지호만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여러 선택지 끝에 최종적으로 지호에게 안착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렇게 몇 번의 경험을 거치는 게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길 아닐까…….

그리고 예상대로 주이원은 조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지 얼굴만 잔뜩 구기고 있었다.

“미쳤어? 너야말로 개소리하지 마, 신지호. 난 널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이랑 사귀라는 거야? 그건 그 사람에게도 기만이지.”

“아니, 호감 가는 사람이면 사귀다가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아하, 그래. 그렇게 좋아져서 너 버리고 내가 결혼이라도 하면 어쩔래?”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완벽하게 반박할 말은 없었다.

지호도 자신의 말이 이상한 개소리란 건 잘 알았다. 다만, 그저 이 관계를 바꿔 버리는 게 불안할 뿐이다. 평생 이원과 함께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함께해 본 적 없는 영역이니까.

두려워하는 지호의 심정을 눈치챈 이원이 낮게 목소리를 깔고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연애하면 너는? 너도 한 번 딴놈 만나고 오려고 이러는 거야?”

“뭐? 아니, 나는… 그런 건 절대 아닌데.”

지호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하자 그제야 이원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이원은 지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네가 뭘 걱정하는 지 알아. 우리는 지금도 좋으니까, 혹시라도 망칠까 봐 두려운 거지.”

“……응.”

“아, 좀 망칠지도 모르지. 우리가 항상 좋기만 했어? 싸운 적도 많잖아. 그러고도 매번 잘 풀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

“난 너 말고 다른 새끼를 내 인생에 끼울 생각 없어. 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너야.”

이원의 단단한 목소리와 손길에 지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원은 새빨개진 채 입을 꾹 다문 지호를 여유롭게 응시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호가 그 순간만은 확실히 기억한단 걸 알 수 있었다.

이원은 쐐기를 박아 넣듯 지호에게 속삭였다.

“자기는 나랑 사귀는 중이야. 알겠어?”

“그…….”

“설마 지금 날 차려고?”

“…….”

지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돌아갔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해…….”

언뜻 거절처럼 들리는 대답. 하지만 이원은 지호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거절로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지호는 이원을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원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하는 걸 사과하는 거니까.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스템의 관여로 지호가 다른 세계의 관리자인 이원에게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를 세우고 있다고 가정하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지호가 강해지면 그만이다. 지금의 지호는 약해져서 시스템에게 휘둘리는 처지이지만, 본래 관리자는 시스템을 제어하는 존재니까.

원래 이원은 지호가 관리자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태도가 불량스러운 관리자인 자신과 달리, 지호의 성격상 정말로 이 세계를 위해 헌신할 게 뻔했으므로.

데리고 튀고 싶지만 관리자는 결국 그 세계와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다. 이원은 지호를 데리고 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이 세상을 구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신지호 한 사람을 위해 주이원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노력했다.

신지호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조금도 소모할 일이 없도록.

이원은 지호의 뺨에 손을 얹고 가볍게 문질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꿈에서 그리던 살결과 체온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당장 부담스럽게 굴진 않을게.”

“지금까지 충분히 부담스럽게 굴고 있었는데?”

뾰족하게 말하지만 가시를 세워봤자 아프지도 않아서, 이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웃을 때마다 지호가 얄미워한다는 건 알지만, 그조차 귀여워서.

“자기가 진짜 부담스러운 게 뭔지 몰라서 그래. 하아, 나이는 먹어 놓고 더 순진해지다니…….”

물론 이원도 조금 속만 나이를 먹긴 했지만, 할 거 다 했던 예전보다 훨씬 순진해진 연인은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서…….

없던 양심이 아프지는 않고 솔직히 볼 때마다 꼴리는데, 이미 오래 참았으니 조금 더 못 참을 것도 없었다.

“당장 예전처럼 애인 같은 관계로 돌아가자고는 안 할게. 일단은 좀 가까운 친구처럼 지내는 거야. 자기가 조금 더 적응하고… 나한테 다시 반할 때까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

“자신이 있으니까. 일단 난 얼굴이 되잖아.”

“…….”

지호가 노려본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너한테 강요 안 해. 서두르라고 재촉하지도 않아.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 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내 거야.”

“…….”

“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너일 테니까.”

“정말로 나야?”

“뭐?”

“아니, 이플리스에 가서… 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계속 나만 생각했어?”

이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호가 자신을 의심할 때도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는데(그야 정말 의심할 짓을 하긴 했으니까) 지금은 정말로 억울했다.

“자기, 내 정절을 의심하는 거야?”

“정절이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다행히도 깊은 의혹은 아니었는지 지호는 이원을 한 번 쏘아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저건 걱정하는 얼굴이다.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생각보다 되게…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있었어?”

“그냥 좀 오래 있었지. 지구보다는 거기서 더 오래 살았으니까.”

이원은 일단 얼버무렸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잘 넘어갔으니, 다음에 일이 터졌을 때 동정표를 구하려면 적당히 숨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몸에 구멍을 내는 것도 여러 번 하면 효율이 떨어질 테니까.

“왜 돌아온 거야?”

“응?”

“그, 널 따라온 사람들은… 자기 기반 다 버릴 만큼 널 좋아해서 따라온 거잖아. 너도 그만큼 거기서… 어쩌면 여기에서보다 더 많은 걸 쌓을 수 있었을 텐데.”

“거긴 네가 없잖아.”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플리스에서 주이원을 존재한 건 다른 세상에서라도 살아가고 있을 신지호의 존재였다.

그곳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냈다.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지구의 일은 하나씩, 하나씩 잊혀갔다. 뒤늦게 기록을 시작했지만 이미 풍화되어버린 그에게 지구의 일들은 과거의 흔적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빛을 내는 존재가 있었다. 하루라도 빠짐 없이 생각했기에 지호에 관한 감정만은 생생했다.

하지만 언젠가 지호조차 과거가 되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이원은 그때부터 지호의 기억에 매달렸다. 쉼 없이 곱씹고 상상하면서… 신지호만은 잊지 않도록, 온전히 기억하도록 애썼다.

그러다 보니 이원의 안은 곁에 없는 연인으로만 가득 찼다. 다른 이에게 내줄 공간이 전혀 없을 정도로.

“나는 계속, 계속 이곳에 돌아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으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니 이 어중간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지호가 마음을 열 때까지, 조금쯤은 더 기다려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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