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플리스의(4)
“습격 당시의 꿈을 보여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하연이 몸을 돌렸다. 정중하던 조금 전과 달리 싸늘한 눈빛이 태용을 향했다. 군의 장교처럼 각 잡힌 자세로 하연이 설명했다.
“조사해서 알고 있겠지만 나는 몽마다. 이 세계에도 몽마가 있으니 어떤 존재인지는 당신들도 잘 알겠지. 나를 신뢰하는 상대의 꿈속에 들어가는 정도는 쉬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꿈을 통해 읽은 건 나의 스타일리스트, 고혜주의 기억이다.”
이하연이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는 지호와 달리 태용이 먼저 손을 덥썩 잡았다. 지호가 이어서 손을 잡자, 이하연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내 주변에 보이는 시야가 변했다.
꿈이기 때문인지 영상은 선명하지 않았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밤이라 어둑어둑한 골목길이 보인다. 고혜주는 폰을 보면서 거리를 걷고 있었고, 덕분에 시야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주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고혜주가 어느 순간 폰을 집어넣고 멈춰 섰다. 그리고 불안한 움직임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리던 고혜주의 시각이 간신히 누군가의 모습을 포착했다.
고혜주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세진. 분명 미르에서 실종된 첫 번째 길드원이었다.
박세진은 한 눈에 보기에도 흉흉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고혜주는 그대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박세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그는 고혜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고혜주도 어떻게든 반항하려 했지만 전력차는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이내 고혜주의 시야로 피가 튀었다. 괴로움에 인상을 찌푸렸는지 시야가 깜박깜박 눈꺼풀 아래로 닫히는 순간, 고혜주가 떠올린 것인지 이하연의 모습이 언뜻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결국 몇 초 지나지 않아 고혜주는 바닥에 쓰러졌다.
제 상사의 능력을 아는 고혜주는 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박세진을 노려보았다. 박세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 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 버렸다.
그것으로 이하연이 보여 주는 꿈이 끝났다.
고혜주의 부상이 상당히 분한 듯 이하연은 노기를 숨기지 않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확실히 봤겠지? 그녀는 지금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 필요하다면 이 영상의 진위를 그쪽 능력자가 확인해도 좋아.”
“아니…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하긴, 이미 했으니까.”
아마 태용은 예전에 지호에게 사용했던 스킬을 써 이하연이 하는 말의 진실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결과는 미르 길드의 선제공격.
김태용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기 길드에서 무고한 사람을 공격했을 줄이야. 평소 무분별한 분란을 꺼리는 김태용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침음하던 김태용은 이하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일단 고혜주 님께 죄송합니다. 제가 길드원의 관리에 소홀하여 이런 불찰이 일어났습니다.”
“네 탓이 아닐 테니까 상관없어.”
듣고 있던 이원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것도 세테르가 장난질을 한 것 같은데. 그 새끼가 좋아하는 방식이거든.”
“하지만 조승택이 뭐하러 이플리스까지 휘말리게 해?”
“그냥 좀…….”
“세테르와 저는 사이가 나쁩니다.”
설명이 어려운지 말을 흐리는 이원 대신 하연이 대답했다. 그녀는 태용을 대할 때와 달리 지호에게는 무척 깍듯이 말을 높였다.
“이플리스는 제가 이원 님을 위해 움직이는 길드로, 온전히 이원 님의 뜻에 따릅니다. 이원 님은 지구에서 생을 마감하길 바라시니 저 또한 그것을 바랍니다. 하지만 세테르는 이원 님께서 이플리스로 돌아가시길 바라니, 그의 눈에 제가 곱게 보이지 않겠지요. 물론 세테르도 제 딴엔 이원 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호를 건드렸는데 무슨.”
이원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척하는 목소리와 달리 눈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정신 조작은 시스템으론 불가능한 영역이야. 이것도 누군가가 힘을 빌려준 거지.”
“그래?”
“응. 세테르는 이플리스에서도 SSS급의 강한 능력자이지만, 정신 계통의 스킬은 없어. 게다가 지구의 시스템까지 활용했잖아? 무슨 수를 쓴 건지 이해가 안 돼.”
“그 스킬은 전에 지구에 왔을 때부터 활용했던 것 같은데.”
지호의 추측에 이원이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원의 사나운 눈이 고양이를 향했다.
“저 머저리가 다 못 모으고 다닌 시스템의 파편… 그걸 악용하는 놈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게 가능해?”
“사실 나도 들어본 적 없는 사례라서 확실하진 않은데, 시스템의 ai는 원래 관리자라는 개체와 연동되어 의사를 지니는 거니까……. 어쩌면 시스템이 파편화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깃들어 특별한 의지를 지녔을 수도 있고. 또는 시스템 자체가 이 세상 자체를 돌아다니며 스스로 어떤 기준을 학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증거 없는 추측 단계였지만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도망친 조승택을 잡는다 하더라도 추가로 분탕치고 있는 자를 붙잡아야 일이 해결될 테니까.
“곤란하네…….”
상대의 정체는커녕 목적조차 모르겠다는 게 더욱 곤란하다.
“일단… 장기전이 되겠네. 미르 길드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가서 이야기 좀 나눠 봐야 할 것 같군. 은원을 청산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고.”
이원이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태용을 응시했다. 그러자 태용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단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만…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김태용은 주이원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지호에게 호의적이라 대던전까지 공략해 재앙을 막아 낸 각성자. 그러나 안전하다고 보기에는 다른 세계의 관리자 출신.
아마 한동안 미르 길드 내부가 시끄럽지 않을까 싶었다.
심란한 얼굴의 김태용이 인사하고 나가자, 이원은 자연스럽게 이하연을 돌아보았다.
“루, 너는 세테르가 남긴 흔적을 찾아라. 행적은 쫓을 필요 없어. 네가 찾기는 어렵겠지.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작은 거라도 찾아내.”
“네, 알겠습니다.”
조금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명령에도 이하연은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곧장 따랐다.
주이원은 마지막으로 고양이에게 눈짓했다.
“여기 고양이는 잠깐 나가 주고.”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