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이플리스의(2) (122/283)
  • 14. 이플리스의(2)

    다만 눈앞의 세테르는 재수가 없어서 이원은 제 속내를 아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다행히도 세테르는 직접 주이원을 돌보지는 않았다. 그는 왕의 심복으로 일하며 은밀히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몹시 바빴다.

    대신 세테르는 다른 사람에게 주이원을 떠넘겼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렘 족인 크사냑 오스페람이라고 합니다. 음…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원을 돌보게 된 건 훤칠하게 큰 키에 눈부시도록 밝은 금발을 지닌 남자였다. 평범한 인간과 달리 묘하게 매끄러운 광택이 도는 크사냑의 태도는 세테르보단 호의적이었다.

    “크사냑이 당신을 돌볼 겁니다, 주이원.”

    “아. 이름이 주이원입니까?”

    “이름은 나중에 바꾸도록 하지. 성은 나나 후케르의 것을 주고, 이름은 역대 왕 중에서 따오는 게 좋겠어.”

    “그럼 그 전까지는 주이원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제멋대로 지껄이는 세테르보단 크사냑이 훨씬 상냥했다. 하지만 이원에게 호의적이라고 해서 당장 호감이 생기진 않았다.

    주이원은 이플리스의 모든 것이 싫었고, 다정하게 굴며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크사냑도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몇 달이나 함께 하며 조금씩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이용하기 위해 데려온 세테르와 달리, 크사냑은 주이원을 동정하고 동시에 조금씩 정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혹시라도 모를 추적을 피해 크사냑은 이원과 함께 바다를 항해하며 도망다녔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은신처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추적당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종종 종일 헤엄쳐도 다음 은신처에 도망치지 못할 때면, 크사냑은 해수면 위에 떠서 이원을 제 배 위에 올려 두고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원은 그가 수십 마디를 말하면 한두 번쯤 대꾸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이원이 자신의 성이 ‘주’이고 이름이 ‘이원’이라는 걸 알려 준 날. 크사냑은 진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정말 크게 기뻐했다.

    “이원, 이원. 좋은 이름입니다. 제가 앞으로도 당신을 쭉 이원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야? 어차피 내 이름은…….”

    “이원이 자신의 이름을 ‘주이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하지만 세테르는…….”

    “세테르의 말 따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이원이 왕이 될 텐데, 세테르는 턱짓으로 부리게 될 겁니다.”

    지호는 자신만만한 크사냑의 말에 그만 웃어 버렸다.

    그때부터였다. 이원이 크사냑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대화가 이루어지며 주이원은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이플리스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첫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대재앙을 물리치고 균열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것. 물론 균열은 반복해서 나타나지만 이플리스에서는 조금의 위협도 없이 오히려 자원으로 사용된다는 것까지.

    다만 그 평화는 ‘왕’이 존재하기에 가능했다.

    아주 오래전, 균열이 발생한 초기 시대에 한 관리자가 ‘왕’을 칭하며 나섰다. 그 왕이 이플리스를 안정권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플리스에서는 관리자를 왕으로 섬기며 나름의 발전을 이뤄 나갔다. 균열 직후에 다시 발생했던 신분제는 점차 사라졌지만 왕은 특별한 존재였기에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했다.

    실제로 왕, 즉 관리자가 가진 힘은 이플리스가 아무리 발달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왕은 세계를 위하는 존재였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이번 대의 왕, 테네브가 미쳐 버리기 전까지는.

    “왕은 이 세계를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왕이 말하길, 이 세계는 너무 낡고 고루해졌다고 합니다. 던전이 되는 게 훨씬 더 세계의 균형에 이로울 거라며…….”

    “미친놈이네.”

    이원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미 관리자로서 완성된 그가 벌이는 계획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테네브 또한 세계를 위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기에 준비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보다 못한 시스템은 다음 대의 관리자를 탄생시켰다. 그가 테네브의 목을 치고 새로운 관리자가 되어 이플리스를 구원해 주길 바라면서.

    “그 또라이 새끼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러고 있진 않았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이원이 말을 흐렸다. 그러자 수면 위에서 느릿하게 흘러가던 크사냑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또 신지호를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 망할 새끼가 나를 견제한답시고 다른 세계로 보내지 않았다면, 난 평생 지호를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움 섞인 목소리에 크사냑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미안함 섞인 얼굴을 보며 이원은 어리광부리듯 크사냑의 거대한 몸체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이원의 체온만큼 달아오른 미끈한 몸체가 작게 들썩였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네요.”

    “궁금해하지 마.”

    “……설마 제가 당신의 연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겠습니까. 나이도 800살쯤 차이 나는데요.”

    “생긴 건 20대잖아. 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1년 정도 도망 다녔을 무렵,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이 끝났다. 세테르는 들키지 않을 만한 거점을 마련해 주었고 거기서 주이원은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법을 익힌 주이원이 가장 먼저 찾아본 건 차원 이동에 관한 마법이었다. 그 사실을 안 세테르가 나타나 이원을 비웃었다.

    “쓸데없는 시도 하지 마시죠.”

    “넌 내가 왕이 되면 목을 잘라 버릴 거야.”

    “제가 이래 봬도 드래곤 로드입니다. 제 목이 얼마나 값진지 아십니까?”

    “목숨 아까우면 입 다물고 있어.”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세테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데려온 왕은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재목이었다. 벌써 어지간한 마법사의 수준은 한참 뛰어넘었고, 몇 년만 지나면 세테르조차 가볍게 압도할 것이다. 그리고 미친 왕으로부터 이플리스를 구원해 새로운 강인한 왕이 되어 주겠지.

    세테르는 이 어리고 강한 왕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주이원이 지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플리스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제가 차원 이동에 성공한 건 시스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네.”

    “시스템이 자기 왕을 놔주는 방법을 사용할 것 같습니까?”

    세테르는 정말 얄미웠다.

    사실 차원이동 마법은 이미 이플리스에서 어느 정도 연구되어 있다.

    문제는 좌표다.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이 존재하는데, 이원이 지구로 한 번에 도착할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게다가 이제는 이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연인에게 해만 되는 존재였단 것을.”

    “…….”

    창백해진 이원이 입을 다물고 책을 넣은 채 도망쳤다. 세테르는 굳이 이원을 따라오지 않았다.

    이원의 몸 안에는 자신이 원래 가진 것과 다른 마력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 있었지만, 이원이 마법을 배울수록 하나로 섞여 가는 그것은… 바로 신지호의 마력이었다.

    어릴 적부터 주이원이 조금씩 갉아 먹은 신지호의 마력.

    신지호를 평생 약한 몸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마력.

    아무것도 모른 채 이원은 지호의 곁에 붙어 있었고, 그가 붙어 있었기에 지호는 십여 년을 계속해서 마력을 빼앗긴 채 고통스럽게 살아갔다.

    그의 빠른 성취는 지호를 거꾸러트리고 쟁취한 도둑질의 증거였다.

    이원은 마법을 배우며 자신의 빠른 성취가 설렜고,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지호를 갉아먹은 값이라고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호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지호에게 이 힘을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은 마음조차 어쩌면 제 오만일지도 모른다.

    주이원은 신지호에게 독이었다.

    어쩌면 지구로 돌아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 * *

    그러면서 왜 돌아왔어, 이 도둑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