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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후이자 최초의(7) (106/283)

11. 최후이자 최초의(7)

질투할 자격조차 없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주이원이 자신의 생을 끊고 싶음에도 아득바득 지탱해 나간 이유가 신지호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기에. 그들이 함께 쌓아간 시간조차 신지호에게서 기원한 것이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주이원은 결국 신지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무 미련 없다는 듯 홀가분하게 제 첫사랑에게로 떠났다.

그리고 이하연은 계속해서 주이원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했다. 그가 평범한 인간에게 존대하고 잘 보이기 위해 기꺼이 머리를 숙이는 일 따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수많은 세계는 초반에 붕괴하며 계급 사회로 변화한다. 당연히 새로운 권력자는 각성자다. 균열로부터 제 몸을 지킬 수 없는 비각성자는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세계는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주이원이 존재하는 세계다.

균열이 발생한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 수백 년이 지나도 나타나기 힘든 개체가 이 세상에 끼어들었다. 주이원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고 모든 재앙을 인위적으로 틀어막았다.

덕분에 이 사회는 균열 이전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때문에 이원이 절대자처럼 행세하지 않는 건 당연한데도, 그저 이원이 타인의 시선 따위를 의식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래도 다 놓친 건 아니잖아? 하나쯤은 잡았으니까 괜찮아.”

“네…….”

“그럼 가자.”

이원이 눈짓하고 하연이 앞장섰다. 깊은 밤의 드림로드는 무척 적막했다. 숨겨진 계단을 타고 내려간 두 사람은 비밀통로의 끄트머리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사람은 바로 드림로드의 사장, 최상호였다. 그는 하연을 보고 반가운 눈빛을 했다가, 이원을 보고 다시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아.”

“하하, 이 정도야 수고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럼 저는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보다 어린 이원이 반말을 하는데도 최상호의 태도는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언뜻 하연과 눈이 마주친 상호는 ‘우리 이하연이, 파이팅!’하고 입 모양만 뻐끔대 응원하고 올라갔다. 그걸 본 이원이 픽 웃고 상호가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군.”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경고처럼 들리는 말에 하연이 재빨리 선을 긋자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 사람을 쉽게 버리면 쓰나. 나도 저자는 꽤 맘에 드니 곱게 쓰도록 해. 너도 여기서 정붙이고 살면 좋지.”

“……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 힘든 말을 던진 이원은 상호가 지키고 있던 문 위로 손을 얹었다.

이원의 손끝에서 흘러간 마력이 혈관처럼 문 전체로 뻗어나간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함정이 발동하도록 몇백 겹씩 설치해 둔 결계지만 이원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단번에 움직이는 거대한 마력, 그러나 바깥으로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는 정교한 제어 능력까지.

‘이게 약해진 거라니.’

이하연이 알고 있던 주이원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었다. 신지호와 함께하기 위해 이원은 자신의 힘을 절반 이상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많이 약해졌음에도 이원의 강함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속으로 감탄하며 하연은 이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찌르던 피비린내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짙어진다. 안에는 커다란 짐승이 피투성이로 늘어져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사자의 몸과 꼬리, 독수리의 날개와 머리를 지닌 환수 그리핀.

지구에서 전설 속의 동물로 알려진 대부분의 환수는 실제로 존재했다. 개중 그리핀은 꽤 유명하고 강력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리핀은 인간으로 변하지 못할 만큼 약해져 죽어 가는 중이었다.

이원을 본 순간 그리핀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발악하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원은 손도 쓰지 않고 마력으로 그리핀을 밀어냈다. 벽에 세게 부딪쳐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도 그리핀은 이원을 노려보았다.

“주이원, 이 새끼…….”

악에 받친 목소리가 와닿지 않는 듯 주이원은 가볍게 혀를 찼다.

“별 소득도 없었는데 품이 너무 많이 든 건 아닌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미르 놈들이 생각보다 겁 많은 게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눈앞의 그리핀은 미르 길드 소속의 헌터였다. 그는 인간형으로도 A급의 꽤 강한 환수이자 미르 길드에서도 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이원이 이 자를 잡아오며 알고 싶었던 건 하나의 정보였다. 며칠간 그리핀의 머릿속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영역까지도 헤집어졌다. 하지만 원하는 정보는 없었다.

결국 헛수고였다. 이제 그리핀에게는 별다른 가치도 용건도 없지만 이원은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죽고 싶은 것 같으니 죽여 주지.”

이원의 낮은 목소리에 환수가 몸을 떨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치욕 속에서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음을 선고하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덜컥 밀려왔다.

인간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닌 환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주이원은 죽음 이상으로 불길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핀은 발버둥 쳤지만 공포에 질린 몸은 뻣뻣하게 굳어 바르작대는 게 고작이었다. 이원은 그런 그리핀에게 손을 뻗었다.

“잘 가져갈게.”

무성의한 말은 죽을 자를 향한 예의나 인사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주이원이 이 스킬을 사용하길 꺼렸을 때부터 이어진 습관일 뿐.

시체처럼 서늘한 손이 환수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순간.

환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정신이 헤집어지며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때의 감각은 어린애 장난처럼 여겨질 만큼 무시무시한 격통이 내리꽂혔다.

모든 것이 저 손 아래에서 분해된다. 마력과 생명력, 육신, 그리고 영혼까지도.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져 주이원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핀은 영겁처럼 긴 고통을 느꼈으나 실제로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

이원이 손을 뗐을 때 환수는 흔적도 없이 분해되어 사라진 채였다. 이원은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수백 년 살아온 그리핀의 마력이 이원에게 흡수됐지만, 이 정도 마력은 이원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원은 훨씬 더 깨끗하고 먹음직스러운 영혼에게서 마력을 포식한 적이 있었다. 이 별이 수천 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노력의 결정체를 마음껏 맛보았다.

수많은 이를 잡아먹어도 지호를 한 번 맛본 것보다는 못했다.

“…….”

이원은 습관처럼 찾아온 갈증을 내리누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런 쓰레기로 입맛 버리는데 정보도 얻지 못하다니. 손해가 크다.

지금까지 잡아 온 미르의 길드원은 모두 다섯. 하지만 아는 놈은 전혀 없었다. 이원은 그리핀을 포식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김태용을 잡아 오는 게 낫겠는데.”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게다가 일이 커지면 신지호 님께서 아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알아.”

기겁하는 하연에게 이원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이원을 지호가 본다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당연히 실망할 테고, 슬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제 인생에서 주이원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할 지도 모르지.

보통은 균열이 발생하고 처음 3년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초기의 큰 고비를 넘기고 나면 세계의 생존율은 급격히 올라간다.

최초의 관리자 신지호는 이 순간을 위해 공들여 만들어진 존재다. 이 세계가 한낱 던전으로 전락할지 온전한 원래의 세계로 남을지는 관리자가 크게 좌우한다.

세계는 신지호에게 좋은 것만을 주었다. 아름다운 외모, 명석한 두뇌, 건강한 신체,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까지 전부.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이 세계를 제 목숨보다 사랑할 수 있도록.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떻게든 첫 3년을 넘길 수 있도록.

그런 신지호가 고작 정보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반길 리 없다. 알면서도 이원은 굳이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신지호가 좋아하는 건 예전의 주이원이니까.

자신의 과거에 질투하게 될 줄이야.

이원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는 건 확실히 뼈아팠다. 오늘 지호를 따라간 게 잘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차라리 잊어버리는 쪽을 택하고 싶을 만큼.

주이원은 결코 과거의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멍청하고, 나약하고… 그러나 지금의 이원보다 훨씬 순수하고 다정한 인간을.

기적처럼 돌아왔지만, 정작 주이원 자신만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무의미한 질투를 하느니 신지호의 옆에 서기 위해 발악할 수밖에.

“용궁. 용궁이라…….”

이원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되뇌었다.

관리자인 신지호가 이 땅에 태어나도록 운명이 정해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강력한 마력의 흐름이 일었다.

마력의 영향을 받아 한국은 각성자의 비율이 그 어떤 나라보다 높았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덕분에 겉으로 드러난 헌터계 외에도 이면의 세계 역시 한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힘이 제일 강했다.

그중에 가장 강한 것이 바로 동해의 용궁. 자신들의 대리인인 김태용을 길드장을 내세운 미르의 실세였다.

현재 주이원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을 방해하는 미르 길드를 견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원은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먹으면 미르 길드를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미르 길드만 잡아 족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진 않는다.

미르만큼의 규모는 아닐지라도 전 세계에 수많은 세력이 있다. 미르를 없애면 제2, 제3의 미르가 생겨날 뿐. 오히려 저들끼리 겁먹어서 미르보다 단단하게 규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주이원은 미르의 기원이자 이능력자들의 수장 격인 용궁을 굴복시키고 싶었다. 몰살할 생각은 없다. 지금처럼 멍청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저 우두머리 몇의 목을 치고 공포를 각인시키면 된다. 몰살시키는 것 다음으로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한편 고민에 빠진 이원을 바라보는 하연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원은 충성스러운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걱정되나?”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걱정이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은데.”

“걱정되긴… 합니다. 평온하게 사실 생각으로 돌아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조급하신 듯하여…….”

“그랬지. 그런데 다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속이 안 풀려서.”

“너무 조급하면 실수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적절한 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원수에게라도 몸을 숙이고 기다려야 한다. 하연은 이원이 제게 직접 해 준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지.”

이전과 달리 지금 이원의 기반은 절대적이지 않다. 주이원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통제하길 원한다. 불확실 요소를 모조리 제거해서라도 제 손 안에 완벽히 넣고 굴려야만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변수가 지나치게 늘어나고 지호에게 몇 번이나 위기가 다가온 지금, 이원의 마음은 급했다.

“그런데 그건 나보다 아래인 것들의 이야기고.”

“…….”

“걱정하지 마, 여기까지 와서 내가 실패할 리 없으니까.”

조급해지면 한두 개쯤은 실수할지도 모르겠지만, 실패하진 않을 것이다. 실패할 수 없다. 그는 결코 실패할 수 없었다. 이원은 인생의 가장 큰 실패를 되돌려 지금, 이곳으로 돌아왔으니까.

이것은 마지막 기회.

두 번 다시 손에서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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