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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후이자 최초의(6) (105/283)
  • 11. 최후이자 최초의(6)

    강남역은 지호의 돌발행동으로 발칵 뒤집혔다. 한적한 동네에서 했어도 소문이 퍼질 판국인데, 빨간 날의 강남역에서 뺨에 뽀뽀를 해 버렸으니.

    입막음은 이미 글러 먹었고, 지호는 제발 이 일이 뉴스에는 안 나오기만을 빌 뿐이었다. 안 나오겠지, 이런 건?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분하는 바람에 멀리 피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근처로 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대피한 곳은 〈하늘상점〉의 스태프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쪽으로 도망치지 않을 텐데. 다른 곳으로 피하려던 지호를 알아본 허수혁이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섰다. 워낙 급해서 얼결에 따라 들어왔지만 적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잠깐만 신세 지겠습니다. 금방 나갈게요.”

    “네, 네…….”

    힘없이 대답하는 수혁은 어째서인지 내내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추태를 보인 바람에 많은 사람이 놀란 것 같아 지호의 뺨이 괜히 화끈거렸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중이나 기자가 따라온 건가 싶었는데 들어온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델타의 길드장, 에이드리언.

    반짝이는 금발을 포마드로 넘기고 8월의 날씨에 스리피스 슈트까지 차려입어 단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허리 숙여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인사한 지호와 달리 이원은 고개만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끝냈다. 괜히 지켜보는 지호가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무례한 태도였지만 에이드리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래는 제가 허수혁 군의 미튜브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이제 누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일이 벌어져서 말이지요. 인사라도 드릴까 해서 잠시 찾아왔습니다.”

    “아, 네…….”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 준다. 밖에서 일어난 일을 몰라서 저렇게 평온한 게 아니구나……. 이제 보니 묘하게 즐거운 낯이기도 하고. 에이드리언은 웃는 얼굴로 이원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원.”

    이원은 또다시 무성의하게 고개만 까딱였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쌈 싸먹은 태도에 지호만 안달이 났다. 지호는 중재를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두 분, 자주 보는 사이시죠?”

    “네. 이원이 미국에 오면 주로 델타와 협력하니까요.”

    에이드리언은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였다. 확실히 주이원은 델타와 꽤나 공고한 관계를 쌓고 있었다. 일뿐만 아니라 종종 사적으로 식사하는 장면이 목격된 적도 많다.

    그런데 대체 왜 하늘과 손을 잡은 걸까.

    “왜 이원의 청람을 두고 하늘과 계약했는지 궁금하십니까?”

    “아뇨. 그냥…….”

    표정에서 드러났나 싶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에이드리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딱히 청람과 하늘을 갈라서 한쪽만 편을 들려고 한 건 아닙니다. 이미 청람과는 협력 중이니, 다른 곳과 두루두루 협력하면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길드의 궁극적인 설립 목표는 균열 등의 재해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것. 저는 델타의 길드장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반박할 수 없이 깔끔한 말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에이드리언의 말이 맞지만, 이미 기업화된 수많은 길드는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이니까.

    물론 다른 길드에서 서로 라이벌인 두 길드와 동시에 협력한다고 하면 정보를 빼간다거나, 재어 본다거나 하는 오해를 살 것이다. 하지만 델타는 한결같이 공익을 최우선하는 행보를 보였기에 지금 에이드리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지호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이 사람은 직접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대단했다. 지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길드장에 가까운 사람.

    “그런 의미에서 다들 친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적당한 경쟁은 도움이 되지만 그 이상은 해로우니까요.”

    편하게 말한 에이드리언이 간이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리고 이원에게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그리고 이원, 당신은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요.”

    “진정?”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예전에도 같은 충고를 하지 않았나요?”

    “시끄러워.”

    능청스러운 조언에 이원은 꽤 짜증 난 태도로 응수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꽤 친하긴 친해 보인다.

    이원이 하늘과 델타의 협력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은 건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청람 쪽에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야 다행이지만.

    “저, 신지호 길드장님.”

    지호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대피시켜준 장본인, 허수혁이었다. 지호는 수혁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곤경을 피했어요.”

    “아, 아뇨.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는 거였고…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저로서는 마침 잘 되었다고 해야 할지…….”

    어째 첫 만남보다 더 수줍어하는 수혁의 눈빛에서 지호를 향한 호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뭔가 이전과 달라진 태도에 그간 변화가 있어서 시스템창을 확인했지만 이전과 비슷했다.

    뭐, 한 번 던전을 같이 공략했으니 친하게 느낄 수도 있지.

    지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수혁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수혁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아, 너무 세게 잡았나요?”

    “아뇨, 그렇게 힘이 세진 않으신데…….”

    수혁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지호의 몸이 홱 돌아갔다. 어느새 다가온 이원이 살벌한 얼굴로 지호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쏘아보았다.

    “왜 그러는지 알겠어?”

    “이해했습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말은 한동안 계속됐다.

    * * *

    박건호는 벌써 두 달이 넘게 이플리스 길드의 뒤를 캐고 있었다.

    심증은 확실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 뭐라도 확실한 걸 잡고 싶어서 박건호는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두 달간 살펴본 이플리스의 운영 방식은 확실히 은밀하다.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오늘 박건호는 제대로 꼬리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오늘 박건호의 추적 대상은 이플리스의 길드장과 직접 거래하는 사람이다. 박건호는 순조롭게 그자의 옷에 솜솜이를 붙였다.

    ‘부탁한다, 솜솜아.’

    박건호의 A급 스킬이자 파트너인 솜솜이는 작은 솜털처럼 생긴 소환수였다. 솜솜이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모두를 주인인 박건호에게 전해 줄 수 있었다.

    솜솜이를 붙인 대상이 드림로드 소속사에 들어간 건 30분 전. 솜솜이가 불안해하는 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사해야 하는데.’

    솜솜이는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어도 죽지 않고 역소환된 후 부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역소환되면 이전까지 수집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지기에 무용해진다. 이번 기회에 들킨다면 다음 기회는 또 언제 올지 모른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애가 아닌데.’

    박건호는 초조했지만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노네임에 들어오기 전까지 솜솜이는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긴 했지만 지금만큼의 의미를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노네임에 들어와서부터 박건호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우연히 다친 길고양이를 주워 키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다른 길드에 갔다면 이 정도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가까이서 본 신지호는 정말로 괜찮은 길드장이었다. 그는 사랑받고 자라서 아낌없이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게는 조금도 적용되지 않고 타인만을 강화해 주는 그 능력까지도 신지호의 성향과 딱 맞았다.

    늘 쫓기듯 삶을 살아오던 자신에게 편안함을 준 길드장을 가능한 한 힘껏 도와주고 싶었다.

    조마조마하게 솜솜이를 기다리는데 드디어 대상이 무사히 드림로드를 빠져나왔다. 솜솜이는 적당한 때에 대상에게서 떨어져 박건호에게로 돌아왔다.

    박건호는 야구공 크기로 몸을 키운 채 제 손에 몸을 비비는 솜솜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다정하게 속삭인 건호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솜솜이가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공유받은 박건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 * *

    이하연의 소속사, 드림로드의 한 사무실 안.

    막 손님을 보낸 이하연은 눈앞에 놓인 빈 잔을 치우고 손수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는 조금 멍하고 굼뜨다는 평을 받는 이하연이지만, 지금의 이하연은 숙련된 군인처럼 정교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다른 한 잔의 차를 테이블 맞은편에 밀어 둔 이하연이 허공을 응시했다.

    “정말 그냥 보내도 괜찮으시겠어요?”

    남의 대화를 훔쳐 듣던 쥐새끼는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껏 지난 3년간 비밀로 운영하던 길드가 발각될 판국이었다.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허공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주이원이었다.

    “지호가 아끼는 개인데 흠집 내면 안 되지.”

    이원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오늘 오후에 뜬 기사 때문에 이원의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신지호가 주이원의 뺨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수십 장은 찍혔는데, 기분 좋을 수밖에 없는데. 하연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기억을 지우실 수도 있잖습니까.”

    “됐어. 지운다고 지호가 포기하겠어? 여기도 언젠가 들키긴 할 거야. 그럴 계획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너무 서두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서두르고 있긴 하지. 변수가 많았잖아. 지호가 관리자로 각성하는 시기는 좀 더 늦췄어야 했어……. 뭐, 죽게 생겼으니 그 녀석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녀석’에 대해 언급하며 이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하연이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아직 잡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그건 죄송해해야지. 아직 이름도 못 받고 고양이에 빙의한 놈 하나를 못 쫓아서야.”

    이름도 못 받고 고양이에 빙의한 놈 따위로 지칭하기에 상대는 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아직 관리자로서 완벽하게 각성하지 못한 신지호보다 더 능숙하게 시스템을 다루는 자.

    하지만 이하연은 변명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무심한 이원의 저 말과 태도가 바로 이하연이 변명할 필요가 없는 이유였다.

    주이원은 신지호를 제외한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신지호 외에 이원이 아낀다고 할 만한 사람은 ‘그 사람’ 정도……. 하지만 그조차도 이원에게서 완벽한 신뢰를 얻진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하연보다도 더 오래, 아주 오랜 시간 주이원의 곁을 지켰는데도.

    사실 이하연은 처음에 신지호를 싫어했었다. 왜 부득불 주이원이 과거만을 생각하며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지호와는 고작 20년도 안 되는 세월을 함께했을 뿐이다. 우리와 엮인 시간이 훨씬 더 많은데, 왜 당신은 과거의 신지호만을 좇는 건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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