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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후이자 최초의(5) (104/283)
  • 11. 최후이자 최초의(5)

    지호가 입을 꾹 다물자 이원이 손으로 지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외면할 수 없어서 뚱하게 쳐다보니 이원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왜?”

    “아니, 역시 지호가 관리자가 맞구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지호는 화들짝 놀랐다. 놀라서 순간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는 지호를 이원이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쩌면 주이원은 관리자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관리자의 정체까지 지호로 어렴풋이나마 추측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원은 대체 관리자에 대한 것이며 지호의 정체를 무슨 경로로 알게 된 걸까. 지호가 묻기 전에 이원이 실토했다.

    “미르 길드는 여러 종족과 각성자 이전의 이능력자가 모인 길드지. 덕분에 그쪽에서는 내가 모르는 정보도 많이 돌아.”

    “……미르에 사람 심었냐?”

    “정확하게는 포섭이지.”

    싱긋 웃는 이원의 말이 묘했다. 그냥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다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콕 집어서 미르 길드를 언급하는 게…….

    “너, 그날 다 들었지?”

    그날이라는 게 태용이 지호를 찾아온 날 말고 또 있겠는가. 주어가 없는데도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평범한 가게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킬 줄은 몰랐는데…….

    “그 빌딩은 내가 만든 마법의 정수야. 아무리 조심해도 거기 있는 한 내 눈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지.”

    즉, 샅샅이 감시하고 있다는 건가. 거기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생각에 지호는 오싹해졌다. 눈앞에서 실실 웃고 있어도 상대는 미르 길드에서 공인한 등급 측정 불가의 괴물이다. 이원이 제게 해를 끼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소름끼쳤다.

    “갑자기 이사하고 싶어진다, 야…….”

    “물론 노네임 사무실 층에는 수 안 썼어. 특히 네 방은 각종 결계를 모두 설치해 뒀거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비밀 얘기하려면 사무실로 불러서 해.”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영 못 믿겠다. 지금 위치가 좋긴 하지만 역시 사무실을 빼야 할까. 지호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이원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정말 안 썼다니까.”

    “맹세해?”

    “맹세해.”

    “뭘 걸고 맹세할 건데?”

    “나는… 너를 걸게.”

    나? 지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야, 날 걸면 넌 손해 보는 거 없잖아.”

    “난 다 잃는 건데. 신지호 잃으면.”

    시종일관 장난스러웠던 지호와 달리 이원은 진지했다. 무거운 목소리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이원을 힐끗 돌아봤다. 마주한 이원의 눈동자가 지호를 너무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지호 귀 빨개졌다.”

    “시, 시끄러워.”

    이상하게 열이 오르고,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뭔가 이상하다.

    지호는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원보다 앞장서서 빠르게 걸었다. 졸졸 따라오는 이원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걷던 지호가 멈춰 섰다.

    늘 익숙한 거리 한쪽에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부자연스럽게 한쪽에만 몰린 사람들이었다.

    “저기 왜 사람이 몰렸지?”

    인파의 뒤에 보이는 건 하늘 길드가 운영하는 〈하늘상점〉이었다. 이곳에서는 비각성자도 거래가 가능한 안전한 아이템이나 하늘 길드 헌터의 캐릭터 상품 따위를 팔았다.

    소박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이미지 마케팅일 뿐, 〈하늘상점〉은 대기업인 천공의 예산이 듬뿍 들어간 플래그십 스토어였다.

    원래 사람이 많긴 하지만 막 오픈했을 때 이후로 저 만큼 몰린 건 처음 보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지호는 가까이 다가갔다.

    〈하늘상점〉의 입구 쪽에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인파의 중심이었다. 카메라 두어 대가 남자를 촬영하고, 남자는 웃으며 활기차게 주변과 인터뷰하듯 이야기한다.

    지호는 상대를 곧장 알아보았다.

    “어, 허수혁이네.”

    “뭐?”

    이원이 불쾌한 목소리로 받아쳤으나 지호는 눈치채지 못한 채 방송 촬영중인 수혁 쪽을 관찰했다.

    “하늘 소속의 허수혁 헌터야. 미튜버 허쉬. 몰라?”

    지호도 얼마 전까지는 잘 몰랐었지만 하늘 길드와 함께 던전을 공략할 때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허쉬, 본명은 허수혁. 형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스킬이 자체 디버프를 받아, 측정 등급이 본인의 원래 등급보다 낮았던 사람이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원이 허수혁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걸 알아야 해?”

    “야. 사람한테 저거라니…….”

    이원의 기분이 확연히 저조해졌다. 지호가 미튜브 따위에 관심이 없는 걸 잘 아는 이원이 사납게 속삭였다.

    “넌 저걸 어떻게 아는데.”

    “재운이가 알려 줬어. 자기가 좋아하는 미튜버라고.”

    조카의 이름이 나오자 이원의 경계가 조금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유쾌하지는 않은 듯 수혁을 쏘아봤다.

    “네 조카 좀 이상해.”

    “……동감이야.”

    어떻게 하늘 길드 소속의 허쉬를 좋아할 수 있을까. 지호 역시 허수혁 개인에게 감정은 없지만 팬으로 좋아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의 천공과 하늘 때문에 청람이 발목 잡힌 게 몇 번인데.

    이원은 지호 이상으로 재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저게 뭐가 좋은 거야?”

    “아이돌 출신이라던데? 잘생겼잖아. 말도 잘하고.”

    “아.”

    별 생각 없이 한 칭찬이었는데 이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 새끼, 생각났어. 묘하게 익숙한 게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전에 너랑 얼굴 붙이고 몸 맞대고 질척한 사진 찍은 그 새끼잖아.”

    “……이상하게 말하지 마.”

    이원이 말하는 그 사진은 그냥 평범한 셀카였다. 몸이 닿아 있긴 했지만 좁은 카메라 안에 둘 다 나오기 위한 접촉이었을 뿐, 결단코 이상한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원의 귀는 지호의 이성적인 설명을 듣지 않고 튕겨 냈다. 한참 투기하는 후궁처럼 수혁을 노려보던 이원이, 화살을 지호에게로 돌렸다.

    “자기야, 저런 놈이 취향이야?”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또 헛소리 시작이다. 이원은 지호의 떨떠름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을 올렸다.

    “생각해 보니 난 네 남자 취향에 관해 들은 적이 없어. 날 좋아한 건 어릴 때부터 붙어 다녀서 그런 거고, 저게 원래 네 취향인가?”

    “미쳤냐?”

    왜 좋아하는 대상이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남자를 좋아한다고 쳐도 허수혁도 주이원도 지호의 취향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쪽은 주이원이지만,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지호의 반응에 이원은 대놓고 삐졌다.

    “지호야.”

    “왜.”

    “아까 선태웅한테 준 마석값 줘.”

    불퉁한 목소리를 듣자 하니 쉽게 풀릴 삐짐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선태웅이 그냥 준다고 한 걸 제멋대로 옆에서 끼어서 보상해 주고 그 값을 치르라니? 지호는 일단 항변했다.

    “그건 네가 맘대로 준 거잖아!”

    “하지만 선태웅이 준 마석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걸? 내가 선태웅에게 보상 안 줬으면 자기, 계속 양심에 찔렸을 텐데.”

    “…….”

    맞는 말이라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선태웅이 넘긴 마석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지호가 아니라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마석이지만, 공짜로 날름 받아 오기엔 양심에 찔릴 만큼 귀중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원이 정말로 지호에게 돈을 받을 생각으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 다른 걸 요구하겠지. 지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확실히 이원에게도 그냥 받긴 찝찝하니까 정산하고 가는 게 나았다.

    “그냥 뭘 바라는지 말해.”

    “그 새끼랑은 들러붙었으니까…….”

    지호의 항복에 이원이 씩 웃으며 고민했다.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이원의 눈이 이내 불길하게 반짝였다.

    “나랑은 뽀뽀하면 되겠다.”

    미쳤나?

    지호는 녹이 잔뜩 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이원과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원의 스킬 덕에 아무도 두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누가 들었을까 봐 무서운 소리였다.

    “돌았냐?”

    “안 돌았는데.”

    “딴 건 안 돼?”

    “으응, 안 돼. 아, 입술에 하라는 건 아냐. 그건 우리 자기한테 진도가 좀 빠르지. 그냥 뺨에 해 줘, 뺨에.”

    뺨도 빠르다.

    “가볍게. 그 정도는 쉽잖아?”

    하지만 이원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가볍게 말한다. 한 번 말한 이상 다른 걸 제시할 놈이 아니란 걸 지호는 잘 알았다. 고집 센 녀석. 지호가 해 주지 않겠다고 버티면 다른 걸 제시하는 대신 그냥 됐다고 넘어가겠지만…….

    결국 이것저것 재어 보던 지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라면 유치원 다닐 때나 초등학생 때는 스스럼없이 몇 번이나 지호 쪽에서 했었고…….

    뭐, 생각하다 보니 커서도 그리 이상하진 않은 것도 같다. 이상하지 않으니까 주이원이 제안하지 않았겠는가? 그래, 친구 사이에 뺨에 뽀뽀 정도야 할 수도 있지.

    “알았어. 그럼 나중에 집에 가서 양치 좀 하고…….”

    “근데 자기야. 뜸 들이면서 기다리다가 집에 가서 준비하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무슨 신혼여행 후 첫날밤도 아니고. 일단 이원이 한 번 저런 식으로 말한 이상, 집에 가면 분명 묘한 쪽으로 의식될 것이다.

    “그냥 지금 해.”

    “하지만 여긴 밖이잖아, 미친놈아.”

    “어차피 아무도 안 봐. 그냥 빨리 해 버려.”

    꾸물거리면 더 이상하다니까? 얄밉게 재촉하며 이원이 제 뺨을 톡톡 쳤다. 확실히 이원의 스킬 덕분에 사람들이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진 않지만…….

    술이라도 마시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입술을 맞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원은 잔뜩 긴장한 지호를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긴장되면 눈 감고 해.”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쏘아붙였지만 지호는 상대의 충고를 새겨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가볍게 돌진해 이원의 뺨에 제 입술을 찍었다.

    주이원이먹다버린포션 @akrkawnd

    (신지호가 주이원 뺨에 뽀뽀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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