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최후이자 최초의(4)
“크흠, 흠.”
태웅의 기침 소리에 지호는 화들짝 놀라 이원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이원이 매섭게 태웅을 노려본다. 지호는 또다시 중재를 위해 가운데에 섰다.
“주이원. 그리고 선태웅 헌터.”
지호는 크게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들은 거… 일단 비밀로 해 두자고요.”
“그래, 그게 낫… 겠다.”
눈앞의 연애 행각에 잠시 잊고 있던 무명의 말이 떠오르자 태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찝찝한 진실보다는 차라리 눈꼴신 광경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못 볼 꼴 봤다 싶으면서도, 주이원의 맹세에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된 건 선태웅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태웅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씨발, 생각 같아서는 그냥 잊어버리고 싶군.”
“잊게 해 줄까?”
이원이 주먹을 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됐거든? 이 미친놈.”
“자, 싸우지들 말고… 일단 돌아가자.”
지호는 매일 싸우는 원아를 말리는 유치원 교사가 된 심정으로 중재했다.
하지만 방주에서는 어떻게 나가면 되는 거지? 평범한 던전은 대부분 보스 몬스터를 죽여서 나가는데, 여기 있는 ‘보스 몬스터’라고 불릴 존재는…….
세 사람의 시선이 무명에게 쏠렸다. 태웅이 가장 먼저 무명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나가려면 이 놈을 죽이면 되는 건가?”
“우리 엄마랑 똑같이 생겼는데 죽는 꼴을 보라고요?”
지호가 사납게 쏘아붙이자 태웅이 머쓱하게 주먹을 내렸다.
“아, 아니, 아니아니, 물론 평화로운 방법이 있겠… 지?”
조금 전과는 180도 달라진 자세로 비굴하게 무명에게 질문하자, 무명은 태웅은 무시한 채 지호를 향해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관리자님께서 방주의 기능을 활용해 드나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능을 개방하지 못하셨으니……. 일단은 저도 마음대로 출입시킬 수 없는지라, 일종의 퀘스트를 드려서 성공하신다면 열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뭔데, 그 퀘스트라는 게?”
무명이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무명의 손끝을 따라 마력이 반짝이는 궤적을 그리더니 허공에 나타난 것은… 색색의 공을 담은 투명한 상자였다. 상자의 뚜껑 부분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꺼낸 공에서 나온 미션을 수행하거나, 또는 조건을 충족하십시오.”
뭔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듯한 광경이었다. 얼이 빠져 있던 태웅의 이내 뭔가 미심쩍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거 설마 처음부터 짜고 치는 방송이냐?”
“이런 세트장을 만들 예산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긴.”
지호의 논리에 태웅은 곧장 진정했다. A급 헌터의 감각을 속일 만큼 세트장을 만들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세계의 멸망이니 뭐니 하던 것과는 공략법의 장르가 지나치게 다르지 않나?
그에 대한 설명은 무명이 덧붙였다.
“제가 지금까지 TV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관찰한바, 이런 식의 운에 맡기는 게임이 쉽고 빠릅니다. 게다가 공 안에 든 미션은 대부분 어렵지 않으니 쉽게 성공하실 겁니다. 사실, 청의 방주는 현재 성장하지 못한 상태라 애초에 어렵고 복잡한 시험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호오. 하긴 이 녀석, 너를 돕는 녀석이라고 했으니까……. 딱히 성가시게 굴진 않겠구나.”
“네. 이번에 실패하시더라도 다음 시험을 드릴 겁니다. 다만 저는 규칙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인지라 한 번 실패하시면 또 쉬운 걸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보다는 조금 귀찮아지시겠지요.”
“다음 시험은 뭔데요?”
“바깥의 백사장으로 가셔서 스킬을 쓰지 않고 황금빛의 코인을 찾아오시면 됩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냐?”
“코인이 어떤 크기인데요?”
“10원 동전과 비슷합니다.”
“작잖아!?”
끝없이 펼쳐지던 백사장에서 스킬도 없이 10원짜리 동전 찾기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습게 보이던 투명한 통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함정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잘 뽑아라. 잘.”
지금까지는 장난스럽던 태웅이 진지하게 눈을 부릅뜨고 지호를 노려보았다.
어깨에 내려앉는 묵직한 부담감을 느끼며 지호는 노란색 공을 뽑았다. 반으로 가른 공 안에서는 무명의 말대로 미션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쪽지를 읽은 지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뭐래?”
“음, ‘순결한 자여, 그대에게 작은 선물을.’이라는데요. 뭐… 비유적인 건가?”
“동정이신지를 여쭙는 겁니다.”
무명의 직설적인 해석에 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게다가 어머니의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까 부끄러움이 세 배로 증폭됐다.
“아니, 그런 건 왜 묻는데요!?”
“인류 평균적으로 볼 때 어려우면서도 여러분이라면 쉽게 충족하실 수 있는 조건이라…….”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걸 넣어? 민망한 마음에 지호는 괜히 옆에 있는 이원을 쿡쿡 건드렸다.
“야, 주이원…….”
“응?”
“너 순결하다며? 얘한테 선물 줘요.”
“어? 아니…….”
지호는 이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무명의 앞으로 떠밀었다. 제 앞에 선 주이원을 본 무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분은 동정이 아니십니다.”
“…….”
지호는 경멸 어린 눈으로 이원을 노려보았다.
매일 자기가 동정이니 순결하다느니 떠들어 놓고 뭐라고? 애초에 진지하게 믿진 않았지만 확인 사살까지 받으니 배신감이 치밀었다.
지호가 더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이원은 한숨을 쉬며 지호를 무명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뭐, 이원이 더럽더라도 일단 나가서 따지고 보면 될 일이니…….
“관리자님 또한 동정이 아니십니다.”
“뭐, 뭐?”
일단 자신을 이용해서 나갈 생각이었던 지호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동정이 아니라니? 분명 뭔가 해 본 기억이 없는데…….
아니, 잠깐. 분명 그날 사진을…….
“지호야.”
지호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전에 이원이 뺨을 꼬집었다.
“뭐, 뭐야?”
“동전 찾을 준비 해야지.”
“아.”
막막한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자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떠오를 뻔했던 생각은 금세 사고 아래에 잠긴 채.
지호가 힘없이 처음 도착했던 백사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데 태웅이 지호와 이원을 붙들었다.
“……야.”
“네?”
길게 설명하는 대신 선태웅이 무명의 앞으로 나섰다. 무명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박수를 짝, 쳤다. 그러자 작은 박이 터지고 꽃가루가 날리는 환영이 그 뒤로 떠올랐다.
“순결한 자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
“…….”
지호와 이원의 눈이 동시에 태웅을 향해 쏠렸다.
정말 선태웅이 동정이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뭐가 그리 찔린 건지, 태웅은 귀 끝까지 벌게진 채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뭐, 무, 뭐, 왜!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하는 거야!”
“세상에.”
방탕하게 주흥을 즐길 것처럼 생긴 선태웅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순수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호도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긴 했다.
가벼운 연애는 싫다. 처음 만난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 없이 누군가와 섣불리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자신은 분명한 확신이 있어서 ■■과…….
‘머리 아파…….’
생각에 빠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지호의 기억에 걸린 봉인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정신에 깊이 파고들어 익숙해졌다. 풀린 상태보다 억압된 상태를 더 편하게 느끼도록, 쉽게 벗어나기 힘들도록.
그러니 봉인이 풀리려 할 때 고통이 수반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끔찍한 통증이 시작되려 해서 비틀거리는 지호를 이원이 붙들었다.
“신지호.”
이상하리만치 또렷한 울림을 지닌 부름에 지호가 우뚝 멈춰 섰다. 생각이 멈췄다가, 일시에 사고가 전환된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서서히 또렷해지는 지호의 시야로 떨떠름하게 마석을 받아 드는 태웅이 보였다.
태웅에게 마석을 건네준 무명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청의 방주는 본디 관리자님만이 오실 수 있는 장소. 잠시 그분의 수에 의해 은둔이 드러났으나… 온전한 자격을 얻으실 그 날까지 다시 봉해 두겠습니다.”
“그분이라는 게 누구야?”
설마 고양이에게 극존칭을 하는 건가? 하지만 지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무명의 목소리는 그 모습과 함께 점점 물에 녹듯이 사라졌다.
“가 버렸네.”
태웅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명이 서 있던 자리에 게이트가 생겨났으니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뭐, 쉽게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나름의 소득은 있으니 됐다.
이제 나가면 끝, 인데.
가장 먼저 앞장서서 나갈 것 같던 태웅이 몸을 돌렸다. 퍽 비장한 얼굴로 지호에게 다가온 태웅이 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건네려는 건 조금 전 무명에게 받은 마석이었다.
“……저 주시려고요?”
“어. 어차피 너만 들어올 수 있는 던전이었다며? 난 여기 억지로 낀 거니까……. 게다가 네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고. 난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거든.”
지호는 얼핏 봐서는 F급의 마석처럼 가치 없어 보이는 둥그런 돌을 시스템창으로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지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도저히 사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지호는 다시 채갈 새라 태웅이 주는 마석을 고이 받았다.
“감사히 잘 쓸게요.”
“내가 준 거 평생 잊지 마라.”
씩 웃으며 생색내는 태웅에게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이원이 갑자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녔을 법한 반짝이는 마석을 이원은 태웅에게 무성의하게 던졌다.
“이거랑 바꾼 셈 쳐.”
“야, 왜 네가 바꾼 셈 쳐?”
마석에서 흩뿌리는 찬란한 광채를 보아하니 저건 못해도 S급, 잘하면 SS급이다. 제 마석도 아닌데 아까워서 지호가 탄식했다.
“그러게. 왜 네가 주냐?”
하지만 말만 툴툴거릴 뿐, 태웅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석을 고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지호는 아쉬운 눈으로 마석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아깝긴 해도… 뭐, 태웅이 건네준 마석의 가치에 비하면 SS급 마석조차 별 거 아니다.
‘오늘은 소득이 많네.’
일행은 곧장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게이트는 원래 없던 것처럼 사라졌고, 결계도 다시 알아보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여졌다.
혼자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던 건호가 세 사람의 등장에 활짝 웃었다.
“아, 돌아오셨습니까. 거, 소득은 좀 있었나요?”
“네. 덕분에요.”
박건호의 연봉을 올려 주고 상여금도 줘야겠다. 지호는 뿌듯하게 일행과 함께 내려갔다.
태웅이 밥을 같이 먹자고 주장했으나 이원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오늘은 지호도 이원을 속여서 끌고 온 죄가 있어, 어울리지 않고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에는 이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조금 막히는 도로 위에서 지호는 계속 이원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지호의 시선은 이원이 차를 주차하고 식당을 찾아 걷기 시작한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 시선을 즐기던 이원이 물었다.
“자기,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그냥?”
“……너 누구랑 했어?”
호기심에 못 이겨 물어본 지호는 가볍게 움직인 제 입을 탓했다. 왜 이런 걸 물어봤지. 주이원의 사생활일 뿐인데. 물어볼 필요 없는 이야기 아닌가?
자책하는 지호를 보며 이원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지호랑 했지. 내 첫 경험부터 마지막 경험까지 모두 지호 건데.”
“미쳤냐?”
“당연히 지호의 첫 경험부터 마지막 경험까지도 다 나야.”
“…….”
미친놈이랑은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