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염가에 잘 쓰겠습니다(2)
“동해 용왕의 셋째, 김태용이 지구의 관리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아, 아니, 하지 마세요!”
절이라니. 난생 처음 받아보는 행동에 깜짝 놀란 지호가 급히 태용을 붙잡아 일으켰다. 창고로 쓰는 곳이라 옷에 잔뜩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데도 태용은 홀로 태연했다.
“그저 관리자님께 예를 표했을 뿐입니다.”
“괜찮아요, 연세도 많으시다면서 무슨 절을…….”
원래 지나친 격식을 차리는 걸 안 좋아하는데, 상대가 100살이어서야 대접받는 건 더더욱 불편하다. 하지만 연세라는 말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태용의 속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제 나이는 많지 않습니다. 용으로는 상당히 젊은 축입니다.”
“아, 어리시구나.”
“어린 건 아닙니다.”
조금 전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태용이 딱 잘라 말했다.
어쩌란 거냐…….
하지만 어리다는 말에 발끈하는 건 확실히 어리다는 증거였다. 괜히 호진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 모양이다.
부담스러운 인사를 끝내고 지호는 호진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호진도 당연히 이 자리에 끼어들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빠지는 게 더 이상하기도 하고. 차라리 지호 쪽에서 누구 하나 제 편을 데려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차피 사정을 모두 알리고 데려올 만한 사람도 없지만.
지호는 괜한 압박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시죠?”
“저를 부른 건 신지호 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미르 길드는 목적이 있어서 지호에게 접근한 거 아닌가? 그러니 뭔가 양호진처럼 이야기를 털어 놓을 줄 알았는데, 태용은 아무 목적 없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순수한 눈빛이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건 됐고…….”
지호는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태용을 마주한 채 혀를 찼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천 년 묵은 여우처럼 능청맞은 호진 상대라면 모를까, 지호보다 연상이지만 어쩐지 푸릇푸릇한 티가 나는 태용에게는 말을 막 하기가 어려웠다.
거래의 장으로 생각하며 왔지만… 결국 지호는 어느 정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 먹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온 거예요. 미르에서는 절 어쩌고 싶은 건지. 전 아직 미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음, 그렇군요.”
태용은 조금 난감해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에 대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는 일단 미르가 어떤 길드인지 배경적인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김태용은 차를 따라 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미르는 전 세계의 여러 종족과 마법사 단체가 규합해 만든 길드입니다. 지호 님의 생각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족이 있습니다. 마법사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시작하니 말입니다. 원래 이능을 지닌 이들은 이런 식으로… 규합된 경험이 없습니다. 각 단체마다 성향과 목표가 너무도 다른 탓입니다. 그러다가 균열이 발생하고, 대응을 위해 급히 길드를 설립하였는데……. 워낙 여럿이 모여 있어서 다소 여러 의견이 충돌하는 편입니다.”
“개판인가 봐요.”
차를 홀짝이던 지호가 간단하게 요악하자 태용이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단체는 단체 나름대로 이득을 취하려 하고, 개인은 개인 나름대로 본인의 뜻을 밀어붙이려 하고……. 또한 제가 인간에 비하면야 많은 나이이나 장생종 사이에서는 젊은 축인지라. 어르신들께서는 저를 신뢰하지 못하시기도 하고…….”
결국 미르 길드장은 그럴싸한 감투가 아니라 사이에 끼어서 고생하는 역할이라는 거다. 과거, 길드원 사이에서 치이던 길드장으로서 순간 동정할 뻔 했다.
“왜 김태용 헌터가 길드장을 맡은 거예요? 김태용 헌터가 어린… 아니, 젊은 거면 좀 나이 들고 연륜 있는 다른 사람이 맡는 게 낫지 않나?”
“그도 그렇습니다만. 길드를 맡을 수 있는 다른 어르신들께선… 공사가 다망하시어…….”
김태용이 쩔쩔매며 변명했지만 그 태도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더 훤하게 그려졌다.
“떠넘겼군요.”
뻔하다.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귀찮은 걸 만만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건 유구한 일인가 보다. 그런 게 아니라고 차마 강하게 부정하지 못하는 태용을 보며 호진이 웃었다.
“그런 것도 있고, 떠넘길 수 있는 어린 것 중에는 여기 이 도련님이 제일 강직하고 책임감 넘치는 것도 있고.”
“아닙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도련님과 비슷한 또래인데 정말 개망나니인 녀석도 있거든. 그 녀석한테 맡기면 일은 제대로 안 하고 길드장 감투로 여자나 꼬시러 다닐걸?”
“그 자와 비교하면 물론 제가 훨씬 낫습니다만.”
태용이 정색했다. 저 겸손한 태용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어지간한 망나니인가 보다.
지호는 대화하며 긴장이 조금 풀린 태용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럼 다시 물을게요. 미르 길드가 아닌 김태용 길드장님은 절 어쩌고 싶은 건가요?”
“저는… 당연히 지호 님을 돕고 싶습니다.”
“그 말은 미르 길드 내에 반대 의견도 있다는 거죠?”
“네. 조금…….”
눈치 보는 태용에게 호진이 들으란 듯이 속삭였다.
“이런 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아요, 도련님. 패를 안 까면 신뢰받기 어려우니까.”
“하오나…….”
“도련님 성격에 말하기 힘들 테니 내가 말할게. 사실 그대는 우리가 기대한 관리자라기에는 너무 약하거든?”
“호진 님! 말을 조금만 조심하셔서…….”
태용이 화들짝 놀라 만류했지만 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아요.”
“그래, 난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일단 사실을 알아야 하잖아? 신지호도 그걸 바랄 테고.”
“맞아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지호의 단호한 태도에 호진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호진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우리 쪽에서 몇몇은 그대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호. 말 그대로의 순수한 보호라면 태용이 망설이며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호는 그 말에 숨은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말이 보호지, 실제로는 감금이겠네요.”
“맞아. 극진하게 대우하긴 할 테지만 바깥에 못 나갈 테니까 결국 감금이지. 다들 위험 요소는 없애고 싶은 거야. 관리자가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없으면 곤란해질 것 같으니까.”
“다른 의견은요?”
“음, 여기서부터는 주류가 아닌 의견인데. 확실한 검증을 해 봐야 한다거나, 어차피 청람이 있으니 맡기고 지켜보자거나, 잡아다 실험하자는 놈도 몇 있었고…….”
“극단적인 의견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기겁한 태용이 끼어들자 호진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수지. 게다가 실험 운운하는 놈은 진작 길드에서 축출했어. 하지만 미르 길드 밖에는 그대를 노리는 자도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아.”
“……충고 감사합니다.”
경계심 어린 지호의 인사에 호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축출했다니까. 어쨌든 내부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상황은 아니라 우리 길드에 두는 것도 좀 위험하고, 그대를 이대로 둔 채 돕자는 의견이 가장 많지.”
“그렇군요…….”
종합하자면 미르 길드 내부에 다소 위협은 있지만 엄청나게 경계해야 할 수위는 아닌 것 같다. 일단 길드장인 김태용이 지호의 편이니…….
뭐, 두 사람의 말을 믿는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결론일 뿐이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호의 눈이 반짝였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요. 남의 길드 사람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단호한 말에 태용은 거절당할 줄 몰랐는지 경악했고, 호진은 눈을 휘며 즐겁단 듯이 웃었다.
“아, 그렇게 나오는 거야?”
“호, 호진 님은 좋은 분입니다. 곁에 두면 분명 도움이…….”
“C급 힐러는 발에 챌 정도로 많다고요. 내가 뒷통수 근질근질한데 감수할 정도는 아니에요.”
“호진 님께선 단순한 C급 힐러가 아니잖습니까?”
“제가 써먹는 건 딱 그 수준이잖아요?”
직구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 같지만……. 곧이곧대로 요구할 생각은 없는 지호가 태용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굳이 제가… 첩자인 게 밝혀진 C급 헌터를 길드에 둬야 할까요?”
“그건…….”
서로의 눈동자가 들여다보일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태용이 몹시 당황했다. 뻣뻣하게 굳은 태용에게 지호는 협박하듯 속삭였다.
“청람의 길드원이 C급 헌터로 미르에 섞여 있다면 두실 건가요?”
“그, 그런 억울한 취급을…….”
태용이 진심으로 억울한 듯이 항변했다. 아니, 청람이 뭐 어때서.
“저한테는 청람이 더 믿음직한데요. 누나네 길드고, 친구 길드기도 하고.”
억울해하는 태용 대신 호진이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지호가 뭘 노리고 있는지 눈치챈 것처럼.
“과한 욕심은 독이 된단다.”
“과한 수준은 바라지 않아요.”
“무, 무슨 말씀들을?”
아무래도 고지식한 길드장은 여전히 지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결국 지호 대신 호진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길드장님 말은, 노네임에 임승주 말고도 간판 A급 헌터를 추가하고 싶다는 거지?”
정답이다.
보통 ‘등급이 높은 헌터’를 말할 때는 A급 이상을 가리킨다. 지금 노네임에 있는 고등급의 헌터는 셋. 길드장인 신지호, 부길드장 임승주, 그리고 새로 영입한 정가은이다. 그리고 계약상 던전 공략에 참여하지 않는 정가은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고등급 헌터는 둘 뿐이다.
하지만 양호진이라면?
그는 임승주와 다른 의미로 길드에 묶어 둘 수 있는 자다. 지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물론 지호도 과한 것을 바라진 않았다.
“A급 전투계 헌터. 그 정도면 됩니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과한가? 싶지만. 사태를 곧장 파악하지 못해 눈만 깜박이던 태용은 이해를 끝내자마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괜찮겠지요, 호진 님?”
“……나라면 좀 조율해 봤을 텐데, 그걸 바로 수락하네.”
잠시도 망설이지 않는 태용의 반응에 호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호진이었으면 이것저것 더 조건을 붙여서 조율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수락해 버렸으니 무르기에는 늦었다.
“저희가 먼저 속였으니 신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왕자님의 그런 면은 좋아해.”
양호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쉬울 뿐, 계약 자체는 그리 손해 볼 것 없다고 여겼는지 호진도 어깃장 놓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양호진 헌터. 내일 당장 협회로 가서 재심사를 받죠.”
“급하구나, 그대.”
그럼 안 급하게 생겼는가? 그 귀한 A급 헌터가 하나 더 늘어날 상황인데. 게다가 속은 S급이니 실전에서는 훨씬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하루라도 빨리 공개하고 싶었다.
“그래. 어차피 하기로 했으니 그러자꾸나.”
“그리고 승급하시게 되면 계약금은 200% 인상해 드릴게요.”
“……도둑놈이구나, 그대.”
순순히 대답하던 호진이 처음으로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인상이지만, 수가 많은 C급 힐러와 A급 헌터의 대우가 천지 차이인 건 당연한 일. 후려쳐도 보통 후려치는 게 아니다.
평소라면 잘 대우해 줬을 지호지만… 어떤 의도였든지 간에 속인 사람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 줄 필요는 없다. 이 정도도 감지덕지 아닌가? 게다가 천 년이나 살았으면 이미 돈도 많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 계약에서는 이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아, 원래 갖고 있던 아이템도 좀 착용하시고요.”
어차피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새로 아이템 사줄 돈도 부족하니 가진 걸 쓰면 좋겠다. 오래 살았으니만큼 유용한 보물 한두 개 쯤은 있지 않겠는가?
“그래, 뜯어 먹어라. 뜯어 먹어…….”
다 포기한 것처럼 호진이 한탄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중에 제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헌터 스페이스
제목: 속보 양호진 A급으로 승급
근데 양호진이 ㄴㄱ?